과거 회상
내가 중학교 2학년이던 2000년 그해 여름날은 참 더웠다. 매년 그 무게가 다른 것이 더위와 추위라지만 어쩐지 그해 여름의 무더위는 참 찐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국민학교 절반, 초등학교 절반씩 사이좋게 다니고 집 근처의 중학교로 진학했을 때, 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누나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시기였고 나는 이제 출발점에 서있었는데 어쩐지 수월하지가 않았다. 뭐든 해결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을 한 선생님들은 학생 관리보다 다른 업무에 시달리고 있었고, 어른들의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모르던 나는 그저 개밥의 도토리처럼 이리저리 치이고 살았다. 초등학교 때 한 반이었던 아이와 작은 다툼이 있었는데 억울해서 선생님을 찾아간 뒤 오히려 나를 보는 아이들의 시선은 달갑지가 않았다. '쪼잔하게 그런 걸 말하냐.'는 거였는데,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애들이 내 자리에 침을 뱉기 시작한 게.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도, 공부를 잘하는 것도, 싸움을 잘 하는 것도 아닌 그저 그런 애였던 나는 그저 그런 애들과 어울렸고 비주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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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을 그렇게 보내고 2학년이 되어서도 별 다른 것은 없었다. 그저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애들이 2학년 때도 같은 반이 되었고 여전히 나는 비주류였다는 것. 한 학기가 지나고 초가을 무렵이 되어서 우리 학교 옆에 있는 여자 중학교에서는 축제를 열었고, 주류라 불리는 아이들은 어떻게든 여자애들을 꼬셔보겠다고 야단 법석이었다. 그 사이에 주류가 되려고 발버둥 치던 녀석이 있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뾰족구두를 신고서 폼을 잔뜩 재던 녀석은 꼭 난쟁이 스머프 같았다. 나도 모르게 웃었는데 눈에서 불이 번쩍했다. 비틀거리다 교실 바닥에 넘어졌었는데, 녀석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갖고 있던 라이터로 태워 죽이겠다며 야단법석인 녀석을 말리는 애들은 없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일어난 재미난 일이라고만 생각을 했을 것이다. 재미있었겠지. 나는 그들을 위한 어릿광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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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참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나에게는 다행인 타이밍이었고 녀석에게는 불행인 타이밍. 그때는 담임 선생님이 성적 관련으로 학부모 면담을 요청한 시기였는데, 마침 어머니가 온 날이었다. 그때는 어머니가 타지로 일하러 간 아버지 몫까지 신경을 쓰느라 힘든 시기였는데 학교에 왔다가 자식 놈이 밟혀있는 걸 본 것이다. 어느 부모님이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어머니는 그 모습을 보고 문자 그대로 뚜껑이 열려버렸다. 라이터로 불태워버리겠다며 협박 아닌 협박을 하던 녀석은 뺨을 맞고서 한참이나 어리둥절해 있었다. 같이 모여 구경하던 아이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나는 어머니와 함께 상담실에 들어가게 되었다. 언제부터 그런 일이 있었는지 오늘만 그랬는지, 다른 애들을 괴롭히지 않는지. 그런 물음이 탁상 위를 오갔고 어깨 피고 살라는 말을 듣고 나서 상담실 문을 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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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교문을 어머니와 함께 나서면서 아무런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초가을에 들어간 때였는데 여전히 더웠고, 땀에 절어있었던 여름 교복의 감촉이 되려 편안했다. 손빨래를 하고서 저녁을 먹을 때도 별 말이 없었고 잘 시간이 되어서야 어머니는 말을 건넸다. 이제 무슨 일 있으면 말하라고. 나는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등교한 학교는 여전했다. 주류는 여전히 기세 등등했고 비주류는 전전긍긍했다. 다만 주류를 꿈꾸는 아이들은 더 이상 내 자리에 침을 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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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2학기가 되었다. 미술 시간에 자유 주제로 자유롭게 미술 활동을 하게끔 해줬는데, 언젠가 TV에서 본 장승과 점묘 화가 생각났다. 동네 산에 올라 적당한 나무를 구해서 내려온 뒤 조각칼로 나무를 깎았고, 한편으로는 쉬는 시간마다 미리 그려둔 담임 선생님 초상화 펜그림 위로 사인펜 점을 찍기 시작했다. 어차피 자유 주제였고 어떤 방식으로든 해도 된다고 했으니 순전히 내 의지로 하는 활동이었다. 처음에는 쟤가 뭐하나 했던 애들이 점점 관심을 나타낼 즈음에 교내 백일장이 열렸었다. 내친김에 이것도 하자 싶어서 여러 편의 글을 써서 냈는데, 정작 중요한 공부는 하지 않고 엉뚱하게 창작 활동만 했었다. 그래서 그때 잠시나마 붙은 별명이 무려 '예술가'였다. 한 달이 지나고 다 깎은 장승 두 개를 교내 미술 전시회에 제출했고, 점묘화로 완성시킨 초상화는 담임선생님께 감사하는 의미로 액자에 넣어 드렸다. 교내 백일장에서는 운 좋게도 우수상을 받게 되었고, 항상 근심 걱정이던 어머니가 잠시나마 웃기도 했었다. 친척들에게 전화해야겠다는 어머니를 말리길 잘 했지. 아무 특징도 없던 애가 그림을 그리고 장승을 깎고 글을 쓰니 좀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애들이 오다가다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주류인 애들이 자기 얼굴도 그려달라며 종이를 건네기도 했다. 물론 실력이 없다며 거절을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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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이 되어서야 진학에 대한 걱정이 들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들은 공부를 놓지 않아서 큰 걱정이 없었지만 나는 학교를 설렁설렁 다닌 덕에 인문계 진학도 덜렁덜렁거린 것이다. 지금은 인문계든 실업계든 본인 할 도리만 하면 괜찮지만 그때는 그게 참 걱정이었다. 주류가 되려고 발버둥 치는 애들이 가던 데가 실업계였으니까. 까딱하면 그 아이들과 다시 3년을 보내야 하는 걱정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누나를 졸라 수학을 배우기로 했다. 중학교 영어는 주야장천 외우면 되는 일이었고 국어와 사회는 별 걱정이 없었다. 다만 공부하는 방법을 몰랐고 그중에서도 수학은 답이 나오지 않았다. 누나에게 혼나가며 수학을 배운 뒤 20~30점에 머물던 점수는 차츰 오르기 시작했다. 1학기 기말고사에서 70점대로 올랐고, 2학기 중간고사에서는 100점을 맞았다. 단순 대입만 하면 되는 행렬 파트여서 재미있게 배우기도 했고 성취감을 느낀 건 덤이었다. 한 학기 내내 진로 상담을 신청하다가 2학기가 되고 성적이 안정권에 접어들고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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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기 기말고사 때는 대략 진로가 결정되어 있어서 아이들의 무리도 나뉘었다. 어느 학교 분위기가 좋고 나쁘고 교복은 어떻고 그런 이야기를 애들과 나누다 문득 뒤를 보니 주류를 꿈꾸던 아이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색했다. 항상 고개를 들고 인상을 찌푸리며 다니던 애들이 고개 숙인 모습은 익숙하지 않았다. 내가 주류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중학교의 생활은 저물어가고 있었다. 졸업식 때 마주한 아이들은 예전에 보았던 뾰족구두를 신고 나타났고 머리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같이 놀던 주류들과 인사를 한 그 아이들은 비주류였던 나와 내 주변 아이들은 그냥 지나갔다. 건망증이라도 걸린 거였을까. 아닐 것이다. 그저 그 아이들에게 나는 여전히 비주류였을 것이다. 가끔은 궁금하다. 그 아이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