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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씀 Dec 15. 2017

그리운 이들을 추억하는 밤

그래서 슬픈 밤

어린 시절, 외갓집에 가면 항상 대문 밖에서 외할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와룡산 아래에 자리 잡은 마을에서 태어난 외할아버지는 먹고살기 힘든 시절임에도 그 끝을 모르고 자랐다. 키가 180cm. 지금으로서도 상당히 큰 키였기에 마실이라도 할라치면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일이 일상이었다. 농사철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이 집 저 집 도와주는 일이 많아 힘 좋은 키다리 총각은 쓰임새가 많았다. 농사일뿐만 아니라 마을에서 일손 거들 일이 있으면 항상 불려 나갔다. 악기도 곧잘 치고 소리도 좋아해서 소위 요즘 말로 마을의 스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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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아버지는 그때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그리 많지도 적지도 않은 18살에 장가를 들었다.

키가 워낙에 컸던 외할아버지와는 반대로 키가 워낙에 작았던 외할머니가 외할아버지 눈에 참 이뻐 보였다고 한다. 장가를 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아이를 가졌고 그 뒤로 줄줄이 아이 여섯을 더 낳았다. 중간에 일찍 세상을 뜬 아이들도 있었는데 아이를 참 좋아하던 외할아버지는 그게 마음에 걸려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첫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터졌다. 그때만 해도 마을 밖의 소문은 그리 빠르지 않아서 전쟁이 터지고 한참 지나서야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대구 근처 다부동까지 북한군이 내려와서 외할아버지도 하릴없이 총을 들고나가야 할 판이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친형님이 대신 가겠다고 해서 가족들과 함께 있을 수 있었다. 대신 간 친형님은 다행히도 무사히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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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나고 비교적 사는 형편이 나았던 형님네의 땅을 일부 받아서 손수 집을 지었다.

요샛말로 하면 분가를 한 셈인데 다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인 마을이라 분가의 개념은 다소 약했다. 전쟁이 나기 전에도 마을의 일을 많이 거들었던지라, 집을 지을 때 필요한 것들을 마을 사람들이 돕기도 하고 형편이 안 되는 이들은 아이들을 대신 봐주기도 했다. 황토를 옮겨와서 석회와 섞어 담을 쌓은 다음에 집을 지었는데, 태어난 아이들과 태어날 아이들을 생각해서 넉넉히 방 13칸, ㄷ자의 형태로 지었다. 아이들이 커서 각자 가정을 꾸리고 손자, 손녀들을 데리고 왔을 때에도 방이 남을 만큼 그 품이 넉넉했다.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외할머니에 비해 감성적이었던 외할아버지는 마당 가운데 정원을 만들어 돌을 두른 다음 참나무와 소나무 대여섯 그루를 심었다. 여름이 되면 마당 가득 매미 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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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채에 바로 부엌을 두고 바깥에도 가마솥을 걸어 아이들이 씻기 용이하도록 아궁이를 지었다.

겨울이 되면 바깥으로 나가 눈 구경을 하다 쟁여둔 고구마를 포일에 싸서 불이 날름거리는 아궁이에다 던져놓곤 했는데, 불구경을 한 밤에는 꼭 자다가 오줌이 마려워 일어나곤 했다. 푸세식 화장실은 그 검은 아가리가 날 삼킬 것만 같아서 어른들 중 한 명을 깨워 같이 가곤 했다. 주로 외할아버지와 같이 갔는데 손을 꼭 잡아주던 그 두꺼운 손의 감촉이 아련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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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는 모진 면이 있어서 손자, 손녀 녀석들은 그 앞에 서면 쩔쩔매곤 했다.

반대로 항상 웃으며 잘 놀아주던 외할아버지는 인기가 많았다.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경상도 남자는 "밥 묵자, 자자."가 전부라고. 마냥 상냥하진 않았지만 외할아버지의 아이 다루는 방식은 어린 시절 느끼기에도 뭔가 달랐다. 나는 딸깍이를 가장 좋아했는데, 외할아버지가 내 턱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면서 "딸깍딸깍, 요놈 이빨로 땅콩이나 까먹자." 하며 흔드는 놀이였다. 턱에 힘을 빼고 그저 흔드는 대로 가만있는 거였는데 입에서는 "아아아아"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침에 깨워주는 것도 하나의 놀이였다. 이불에 파묻힌 손자, 손녀들 중 요 놈이다 싶은 녀석 하나를 얼러서 양 팔을 잡고 깨워주는 거였는데, 잡힌 녀석이 칭얼거리는 소리를 내면 다른 녀석들은 그 소리에 잠에 깨서 밥을 먹으러 가는 식이었다. 울음이라도 터질라치면 "울면 홍콩 할매가 니 잡아다가 저기 변소에 넣고 지키고 서있는데이." 이 말을 해서 울음을 그치게 했다. 외할아버지가 말한 홍콩 할매는 자신의 친 누이였다. 그 당시 유행하던 괴담이 홍콩 할매 괴담이었는데, 방학을 맞아 외가(혹은 친가)에 놀러 온 조카 손주 아이들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던 이모할머니에게 우리가 붙인 별명이기도 했다. 아이들을 먼저 보내고 남편마저 보내 쓸쓸히 노년을 보내던 이모할머니에게 우리들의 존재는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애들이라 시끌벅적하기도 했고 반대로 본인의 상황과 다른 남동생의 집이 부러우면서도 스스로 쓸쓸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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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갓집 안방에 붙어있는 다락방에서 노는 것도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였다.

해가 쨍쨍하게 뜬 여름날에도 다락방은 서늘했는데 우리들이 올라가기에 어렵지 않아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낮에는 외할아버지가 넣어둔 과일과 과자를 먹으며 뒹굴거렸고, 밤에는 귀신 이야기를 많이 했다. 한참 이야기가 달아오를 때쯤, 밖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외할아버지가 "이 놈들!"하면서 문을 벌컥 열면 다락방 가득 비명이 울려 퍼지곤 했다. 자식들을 다 출가시키고 노년에 다소 심심했던 외할아버지에게도 우리들의 방학은 신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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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나 다른 외삼촌, 이모들이 외갓집에 간다는 전화를 하면 외할아버지가 통닭을 시키곤 했다.

먹을 음식이 없어서라기보다 좀 더 아이들 입맛에 맞는 것을 찾다 보니 통닭을 고른 셈인데 그야말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닭은(정확히는 통닭) 만인의 입맛에 들어맞는 식재료다 보니 그때 당시에도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참 인기가 좋았다. 좀 더 거리가 가까웠던 우리 가족은 외갓집에서 통닭을 먹는 일이 잦았다. 학교를 다니는 때에는 외갓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방학 때는 일주일 정도 있었는데 외할아버지를 따라가서 마을에 있는 쇠나 북을 따라 치거나 마을 초입에 자리 잡은 느티나무 아래서 동네 할아버지들이랑 이야기하는 것이 주된 일과였다. 두 살 위의 누나는 다른 사촌들과 냇가에 가서 고디(다슬기)를 잡곤 했다. 그렇게 고사리손으로 잡아온 고디를 푹 삶아 저녁에는 이쑤시개로 알맹이를 빼내 먹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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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시간이 지나고 외할아버지는 폐기능이 안 좋아지셔서 병원에를 갔었다.

여기선 진단이 어렵다고 경북대병원으로 진료를 다시 받으러 갔는데, 심장 쪽에 문제가 생겨서 폐에도 무리가 온 것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방학이 시작되고 늘 그랬듯이 외갓집에 가니 안방에는 산소통이 있었고, 외할아버지는 코에 호스를 꽂고 누워계셨다. 그 키 크고 건장하던 외할아버지는 진단받은 지 몇 달 만에 살이 쏙 빠져 인사도 잘 나누지 못했다. 외할아버지의 소변통을 비우는 게 새로운 일과가 되었고, 욕창이 생긴 등과 엉덩이에 부채질을 하는 일도 함께였다. 손수 만드신 아궁이는 외할아버지의 기저귀를 태우는 용도로 쓰였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외갓집에서 큰 소리가 난 게. 곧 돌아가실 것 같다고 땅이랑 다른 것들 유산 상속 처리해야 한다는 말이 오갔고, 누워있었지만 정신은 또렷했던 외할아버지는 그 날 선 말들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포근하던 외갓집 마당은 잘 돌보지 못해 을씨년스러워졌고 어른들의 목소리는 끝을 모르고 높아졌다. 급기야 눈 내리던 겨울밤, 고성이 오가다 못해 주먹이 오갔고 자주 외갓집에 놀러 갔었던 나는 그날 밤이 마지막 외갓집에서 지낸 밤이었다. 그리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집에 걸려온 전화 너머에는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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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로 바뀌고 얼마 되지 않았던 1997년의 봄날.

학교 마치고 간 외갓집에는 빨간 등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죽음의 무거움을 느끼기에는 어린 나이였기에 나를 붙들고 우는 어머니, 이모들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지금이었다면 안아드렸을 텐데. 외할아버지가 누워있던 안방에는 병풍이 쳐져 있었고, 그 앞에는 외할아버지의 영정 사진과 생전 좋아하시던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병풍을 걷어내면 외할아버지가 "현이 왔나. 할배랑 밥 묵자."라고 할 것만 같은데 병풍을 걷어낼 수 없었다. 제사상에 손대면 안 되는 건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한 구석에 있던 통닭을 들어다 외할아버지의 영정 앞에 놓았었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때는. 그래도 나무라는 어른들은 없었고 그저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렇게 찾던 현이가 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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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이었던 것 같다. 꿈에 외할아버지가 보였던 게.

꿈속에서 외할아버지는 퀴퀴한 냄새가 나지도, 코에 호스를 꽂지도 않은 정정한 모습이었다. "외할아버지, 어디 가요?"라고 물어본 것 같기도 하다. 외할아버지는 말없이 웃으며 꼭 안아주었다. 그렇게 외할아버지를 보내드렸다.  외할아버지가 떠난 후 외할머니는 피우던 담배를 끊으셨고 어머니는 한참을 앓았다. 그리고 10년이 지나 내가 군입대를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고, 그때도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했다. 그렇게 또 10년이 지났다. 큰 외삼촌은 한 달 전에 세상을 떠나셨고, 어머니와 이모들, 외삼촌들은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다. 나도 그립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큰 외삼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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