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자르던 날

놓고 싶었던 시간에 대하여

by 권두팔

한국에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두 가지였다.

1. 정신과 방문

2. 머리를 자른 일

정신과에 간 이유는 단순했다.

약을 먹어야 잠을 잘 수 있었고,

미친 경주마처럼 뛰던 심장을

그나마 조금은 차분하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를 자른 이유는,

그가 좋아해서 길렀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냥…

네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기다린 시간,

참은 시간,

버틴 나의 시간의 흔적을

없애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미용 디자이너 선생님께

내민 사진은

김고은의 픽시컷(Pixie cut)이었다.

선생님은 쇼컷에 자신 있다며

꽤 당당하게 말씀하셨고,

그래서 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사진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내

“후회하실 수도 있어요”라는 말이 돌아왔다.

마음속으로는 '선생님이 제머리에 빵구를 내고 뭘해도 내가 결혼한걸 후회하는 것만큼의 후회는 못만들어요...'라고 생각 하고, 입으로는

괜찮다고 했다.

그냥 잘라달라고.


머리는

당장 내가 선택하고

당장 바꿀 수 있는

가장 분명한 대상이었다.

이 머리카락 말고는

아무것도 정할 수도,

진행할 수도,

보낼 수도 없었다.

모든 게 나답지 않고

나답게 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내가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머리를 자르는 일’**뿐이었다.

머리가 잘려 나갈 때마다

자꾸 생각이 났다.

‘긴 머리가 좋다고 기르라고 하던 너.’

머리를 스트레이트 하며 통화하던 순간,

염색하면서 인증 사진을 보내던 날들,

네가 사준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던 시간,

내 머리카락을 만지던 너.


그리고 그녀에게도 똑같이 그녀의 긴머리가 좋다고 얘기했던 너의 메세지....



목덜미에 닿는 공기가

시원하게 느껴질 즈음,

미용사님이 다시 물었다.

“이 정도까지만 자르시는 건 어떠세요?”

나는

더 잘라달라고 했다.

머리가 가벼워질수록

숨도 함께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길이에서

서로 타협했다.

울음과 웃음이

같이 터져 나왔다.

그날,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말아야겠다

다짐을 다시 한번 내 눈으로 떨어져있는 머리카락을 통해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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