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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사서 Apr 25. 2020

엄마, 백 원만

내 생애 첫 경제활동

출근길 라디오에서 자주 듣던 노래가 흘러나왔다.


내가 돈을 버네, 돈을 다 버네 '엄마 백 원만'했었는데~

늘 듣던 노래였는데, 갑자기 '엄마 백 원만'이 머리에 와서 박혀버렸다.




'엄마 백 원만!'은 정말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엄마가 백 원을 주면 집 앞 슈퍼에서 쌍쌍바도 사 먹을 수 있고, 분홍색 껌이 막대기인 딸기맛 하드도 사 먹을 수 있었다. 둘리 소시지는 무려 두 개나 사 먹을 수 있었고, 귤색의 동그란 플라스틱 통에 들어있는 대롱대롱이라는 아이스크림도 사 먹을 수 있었다. 내 기억에는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인 5~6살 때이다.  집 앞 슈퍼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탐험을 하듯 동네 오빠들을 따라 나서 길 건너 국민학교 앞 문방구 갔을 때 세계가 한번 더 넓어졌다. 학교 앞 문방구에는 백 원으로 살 수 있는 불량식품이 알록달록 산처럼 쌓여있었다. 그때 처음 먹은 빨간 봉지, 파란 봉지, 노란 봉지에 들어있던 새콤달콤한 가루를 입에 털어 넣었을 때의 상큼함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난다. 첫 불량식품의 기억이다.


엄마가 백 원을 주면 아이스크림이나 과자를 사 먹고 남은 십원 이십 원을 둘리 소시지를 먹고 남은 동그란 원형통으로 만든 저금통에 저금을 했었다. 그때는 슈퍼에서 백 원짜리를 사면 십원을 거슬러줘서 십 원짜리 동전을 많이 거슬러 받았었다. 내 저금통이긴 했지만, 사실 엄마가 슈퍼에서 거슬러 받은 십 원짜리를 넣어두는 용도의 저금통이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그 저금통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살금살금 몰래몰래 엄마가 집을 비우면 저금통의 뚜껑을 열어 십 원짜리를 들고 학교 앞 문방구로 달려갔다. 처음 맛 본 불량식품은 내 생애 첫 일탈을 가져다주었다.


십원에 두 개를 주는 사탕과 플라스틱 스푼에 새콤달콤한 가루를 개어서 넣어 굳혀 놓은 것 같은 불량식품은 오십 원이면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주먹만 한 눈깔사탕도 오십 원이면 살 수 있었다. 또 도넛처럼 생긴 사탕을 입에 물고 불면 휘파람을 불 수 있었다. 또 백 원에 열개나 주는 땅콩 캐러멜도 입안에서 녹여먹으면 달고 맛있었다. 백 원만 들고 가면 주머니 가득 불량식품을 사 먹을 수가 있었고, 5살짜리가 가기에는 제법 먼 동네 뒷산을 넘어 초등학교 앞 문구점으로 달려갔다.


그러다가 사달이 났다. 엄마가 반도 넘게 줄어들어버린 저금통의 무게에 꼬맹이의 일탈을 눈치채 버린 것이다. 엄마가 늘 "엄마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뭐지? 거짓말하는 거, 도둑질하는 거지!"라고 누누이 말해왔던 터라 나는 저금통에서 돈을 꺼내는 일이 나쁜 짓인 줄 알았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다 결국 들켜버린 날, 엄마는 화가 많이 났다. 엄마는 경찰을 부른다고 했다. 우리 집에 도둑이 들었으니, 경찰 아저씨를 불러서 도둑을 잡아가라고 해야겠다고 했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같이 불량식품을 사 먹었던 동네 오빠 집으로 울면서 도망쳤다. 아줌마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내가 도둑질을 해서 엄마가 경찰 아저씨를 불렀어요. 저는 이제 감옥에 갈 거예요." 하며 엉엉 울었다. 아줌마는 나를 오빠들 방에 있는 이 층 침대에 숨겨주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제 경찰이 잡아갈 거라며 엉엉 울었다. 거기에는 공범들인 오빠들도 같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엄마는 밖에서 "경찰 아저씨 도둑 잡아가세요~"라고 소리쳤다.


작은 방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곧 경찰차가 잡으러 올 거 같았다. '이제 곧 경찰 아저씨가 오겠지? 엄마는 화가 많이 났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울다 지쳐 잠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 깨어났다. 깨어난 나를 앉혀 놓고 엄마는 "어제 엄마가 경찰 아저씨한테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경찰 아저씨한테 빌어서 어제 경찰 아저씨가 그냥 가셨는데, 다음에 또 그러면 정말 잡아갈 거래."라고 타일렀지만, 나는 뭔가 반항심이 생겼다. "하지만, 그 둘리 저금통은 내 저금통인데, 내 저금통에 있는 돈을 꺼낸 것도 도둑질이에요?"라고 물었고, 엄마는 "그게 엄마 저금통이지 왜 네 저금통이야? 엄마가 훨씬 더 많이 돈을 넣었는데!" 하며 결국 회초리를 들었다. 엄마는 황당하고 당돌한 내 대답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엄마 백 원만!'을 언제까지 했나 생각해보면, 아마도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도 계속 '백 원만'타령을 했던 것 같다. 그즈음에는 엄마한테 백 원만 달라고 해도, 엄마가 오백 원짜리 동전 하나를 주거나,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내밀었다. 그즈음 엄마가 "백 원만 달라고 했으니까 백 원만 줘도 되지?" 하면서 백 원짜리 하나만 내밀면 입을 쭉 내밀고 삐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엄마 백 원만'을 끊게 된 시점은 3~4학년이 되면서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오게 된 즈음부터다. 초반에는 엄마가 도시락을 싸주었지만, 엄마가 맞벌이로 보험회사에 나가게 되면서 도시락을 싸줄 여력이 없어졌다. 도시락을 싸지 못하는 날에 천 원짜리 한 장을 쥐어주며 슈퍼에서 점심을 사 가지고 가라고 했다. 그때는 도시락을 싸는 거보다 그게 더 좋았다. 좋아하는 우유를 고를 수 있고, 날마다 다른 빵으로 골라먹는 것도 재미있었다. 또 남는 돈으로는 집에 오는 길에 백 원짜리 떡꼬치도 사 먹을 수 있었다. 주머니에 늘 백 원짜리 몇 개쯤은 가지고 다닐 수 있어졌다. 백 원짜리 몇 개만 있으면 그렇게 마음이 든든했다.


지금은 백원이 그때의 십원도 되지 않는 것 같다. 백 원으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그때는 그래도 십원이면 사탕 한 개 정도는 사 먹을 수 있었는데, 요즘은 백 원을 들고 슈퍼에 가면 살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백 원짜리 주머니에 넣고 든든하던 그날이 "엄마 백 원만 했었는데"라는 노래 가사로 내 마음에 꽂혔다.


요즘 엄마가 메신저로 "이거 필요해요~ 이거 좀 사주세요." 할 때마다 엄마가 그때 나에게 주셨던 백 원의 기쁨을 줄 수 있을까 싶어 "결제 완료" "주문했어"로 화답한다. 엄마가 나에게 백 원을 쥐어줬을 때처럼 엄마도 조금은 행복했으면 좋겠다.




# 약 30년 전 일이다. 이 글을 쓰다가 엄마에게 내 기억을 확인하려고 전화를 했는데 놀라울 만큼 일치했다. 엄마는 7살 즈음이라고 기억했는데 그때 살던 동네에서 나는 6살에 이사를 왔기 때문에 오히려 나의 기억이 맞았다.


# 엄마에게 "내가 왜 내 저금통에서 돈을 꺼낸 게 도둑질이냐고 따져 물었을 때 어땠어?" 물었더니 "아니, 저금통만 자기꺼지 거기 돈은 내가 다 넣었는데 황당했지, 하하하 그런 것도 기억나니? 매 맞은 것도?" "근데 다섯여섯 살짜리가 너무 날 넘은 거 아니야? 나지만 좀 얄밉네! 맞을만해." "그러니까, 매 맞았지! 하핫 너는 네 살부터 못하는 소리가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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