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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사서 May 27. 2020

외할머니의 시래깃국

엄마의 엄마의 맛

 안 먹어! 안 먹어! 그거 쓰레기국이란 말이야!


한바탕 소란이 났다. 오일장에 나섰다가 채소 노점에 김장 배추를 팔고 남은 잔뜩 쌓여있는 배추 우거지가 실해 보여  골라서 줍는 것을 손녀가 본 것이 화근이었다. 한참을 주워도 얌전히 있길래 그런가 보다 했는데 그것을 유심히 보던 손녀가 결국 거기서 주워온 배추 우거지로 만든 배추 시래기를 넣은 국을 보고 울음이 터진 것이다.


"내가 다 봤어! 할머니가 쓰레기 주워온 거! 쓰레기국 안 먹을 거야!"

"아니! 이게 쓰레기국이 아니라 시래깃국이라니까. 할머니가 깨끗하게 씻어서 말려서 끓인 거야. 아이고 그게 언제 적인데 그걸 기억하고…"


온 가족이 맛있게 먹는 시늉을 해도 손녀는 할머니가 쓰레기를 먹는다며 남들이 먹는 꼴도 못 보고 엉엉 울었다.


"먹지 마! 쓰레기야! 쓰레기! 먹지 마! 할머니가 시장에서 줍는 거 다 봤다고! 나 거지 아니야! 주운 거 안 먹어!"


제 엄마의 수저를 빼앗으며 절대 쓰레기국은 먹을 수 없다고 자지러진 손녀의 모습에 그만 온 가족이 웃음이 터졌다.




싱싱하고 파릇했던 기세는 어디 가고 부들부들 씹을 것도 없이 목구멍으로 쑥 하고 넘어가는 배추 시래기가 환상이다. 배추 시래기는 배추였다는 사실을 잊을 만큼 향도 식감도 전혀 달라져있다. 오랜 시간 바람과 햇볕에 잘 마른 채소에서 나는 녹진한 맛은 싱싱한 채소는 꿈도 꾸지 못할 맛이다. 달큼하던 채즙이 사라진 자리에는 햇빛과 바람 그리고 시간이 만들어낸 깊은 맛이 채워져 있다. 질기던 줄기도 말리고 여러 번 삶고 헹구기를 반복하며 부드러워져 있다. 머리도 떼지 않은 멸치로 국물을 우려내고 오랜 세월이 맛으로 우러나는 집된장에 마늘과 국간장으로 간을 한 국물이 시래기의 결 마다 깊이 스며들어 어우러지는 맛은 배꼽 아래까지 따뜻하게 번지는 것 같다.


지금이야 시래기도 돈을 주고 사야 하는 시대지만 내가 어릴 적만 하더라도 우거지를 말려 시래기를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김장을 하고 남은 우거지를 말리기도 했지만 채소가게에서 내 놓은 우거지를 줍는 일도 흔했다. 시골의 오일장에는 머리가 희끗한 할머니부터 새댁까지 옹기종기 둘러앉아 그중에 깨끗하고 실한 우거지를 줍느라 수선했다.


그날은 김장철 즈음이라 배추를 다듬고 남은 푸릇한 배추겉잎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사람들이 둘러앉아 배추 우거지를 줍던 모습은 도시에서만 살던 내가 봤을 때 영락없이 사람들이 시장 바닥에서 쓰레기를 줍는 것 처럼 보였다.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으려 할 때면 늘 엄마가 "에잇! 지지야 지지!" 했고, 땅에 떨어진 과자를 주워 들면 친구들이 "땅거지래요~ 땅거지래요!" 놀려댔다. 그런데 외할머니가 채소가게 바닥에 버려진 배추 우거지를 줍고 있었다. 그 모습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외할머니의 옷자락에 매달려 '할머니 지지야 지지'만 속으로 외쳤다. 그래도 금방 외갓집에 사는 토끼가 생각났다. 토끼한테 밥주려고 줍나보다 하고 한참을 바라봤는데, 처마 밑 빨랫줄에 해를 넘겨 한참을 매달려 있던 토끼밥이 내 밥상 위에 올라왔으니 경악할 따름이었다. 게다가 음식의 이름이 '쓰레기국'이라니 내가 뒤로 넘어가 안 먹는다고 떼를 쓸 이유는 충분했다.


'시래깃국'이 '쓰레기국'이 아니라고 아무리 어른들이 말해도 그 말이 들릴리가 없었다. 쓰레기로 끓인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어른들이 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할머니가 주워온 것은 맞지만 깨끗이 씻어 손질하고 바람에 잘 말려 또 푹 삶아 된장국에 넣어 끓인 것이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내 눈으로 시장 바닥에서 주워온 걸 보았으니 먹지 않는다고 떼를 썼다. 어른들이 결국 두 손 두발 다 들고 달걀프라이를 대령하고서야 겨우 밥을 먹었다.


그때까지 나에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은 외할머니가 해준 음식이었다. 태어나보니 운이 좋게도 엄마는 전라도 영암의 한 마을에서 그중에서도 음식 솜씨가 좋기로 소문난 집의 맏딸이었다. 그 손맛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엄마의 손맛도 온 동네에 소문난 맛이지만, 외할머니 손맛을 따라오지 못했다. 전라도는 음식을 잘한다고들 알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동네 사람들이 손에 꼽는 집이었으니 음식 맛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나의 피와 살에 남아있고, 기억과 추억에 한가득이 외할머니가 해주신 음식이다. 명절이면 직접 타래과를 튀기고 꿀에 절여 주시던 것, 여름이면 밭에서 막 따온 조선호박으로 호박전을 해주시던 것, 토란대며 고구마순이며 지천에 자라난 풀들을 고소하고 맛깔나게 나물로 무쳐 주셨던 것, 옷을 만들어 입는 것인 줄 알았던 모싯잎으로 떡을 해주셨던 것까지 외할머니와 음식을 함께 다듬고 만들던 기억으로 내 유년의 행복이 가득 채워져있다.


"네가 얼마나 영민했냐면, 할머니가 호박전을 해주니까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요.'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 먹어봐요.' '호박이 어떻게 이렇게 달아요?' 하면서 호호 불어가면서 먹는데 얼마나 영민했는지."


외할머니는 아직도 내가 아주 어렸을 적 호박전을 먹으며 신나 했던 걸 말씀하신다. 그리고 나도 그날의 호박전이 기억난다. 조선호박에서 설탕을 가득 뿌린 것처럼 달큼하고 부드러운 채즙이 흘러나오고, 고소한 기름에 방금 부쳐진 호박전은 슈퍼에서 파는 과자들은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맛이었다. 호박은 원래 맛이 없는건데, 외할머니가 전으로 부치니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졌다. 그 때가 아마도 네 살, 다섯 살 즈음이었다. 그날은 비가 왔는데 툇마루에 외할머니와 마주 앉아 부쳐진 호박전을 호호 불어가며 끝도 없이 먹었던 날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어려서 장과 위가 약했던 나는 초등학교 입학 즈음 일주일에 두세 번씩 응급실에 실려가곤 했다. 밤새 토하고 울다가 실신해서 응급실에 실려가기 일쑤였다. 그런 나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던 초보였던 엄마는 외할머니에게 도움을 청했고, 외할머니는 두말도 없이 시골로 내려보내라고 했다. 엄마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응급실에 가는 애를 어떻게 병원도 제대로 없는 시골에 보내냐고 저어했지만, 외할머니는 내 밥 먹으면 다 낫는다고 자신만만했다. 엄마는 결국 나를 외갓집으로 보냈고, 거짓말 같이 외할머니 밥을 먹는 내내 한 번도 배앓이를 한적이 없다. 다시 도시로 돌아와서도 배가 아파서 병원을 가지 않았다. 나에겐 외할머니가 최고의 요리사이자 의사이자 마법사였다.


그런 외할머니의 음식 중에서 유일하게 먹지 않는 음식이 바로 '시래깃국'이었다. 된장찌개는 맛있게 잘도 먹으면서 꼭 '시래깃국'을 끓이면 절대 먹지 않았다.


나중에 간신히 시래깃국과 얽힌 오해를 풀고, 외할머니의 시래깃국을 처음 먹던 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외할머니의 호박전에서 시래깃국으로 바뀌었다. 외할머니의  담근 달큼한 된장과 시래기의 깊고 감칠맛 나는 맛이 부드럽게 어우러지면서 갓 지은 쌀밥과 어우러지는 그 맛은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동생이 시래깃국을 먹을 수 있을 나이가 됐을 때쯤 동생을 앉혀놓고 "이건 쓰레기 국이 아니라 시래깃국이야.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국이야."하고 가르치기까지 했다.  


외할머니의 시래깃국은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이 세상에 유일한 맛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래기를 말리는 온도, 바람, 토양 그리고 그것을 말리는 사람의 솜씨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잘 못 말리면 쿰쿰한 군내가 나기도 하고 채소의 풋내가 지워지지 않기도 한다. 달큼한 배추의 향 머금은 고소하고 바스락거리는 시래기로 말리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무심하게 툭 걸쳐 놓고 잊은 듯 보여도 벌레가 꼬이지 않게 살피고, 비나 눈을 맞아도 푹 젖어 썩지 않게 바람길이 통하는 곳에서 바삭하게 말려야 한다. 외할머니의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손길에 잘 마른 시래기를 다시 가마솥에 푹푹 삶고 헹구기를 반복해야 한다. 시간의 때를 벗고 부드럽고 촉촉해진 시래기는 된장의 풍미를 해치지 않고 가득 머금을 준비를 마친다.


외할머니의 된장은 동네사람들도 호시탐탐 노리는 진미 중에 진미였다. 가끔은 간밤에 장을 도둑맞았다며 엄마에게 하소연하시던게 생각난다. 아주 큰 무쇠솥에 콩을 삶고 커다란 돌절구에 빻아 모양을 잡아 꾹꾹 다져 메주를 만들고, 그 메주를 아랫목 발효해서 윗목에 대나무로 만든 걸이에 대롱대롱 매달아 오랫동안 숙성하면 하얀 곰팡이가 꽃처럼 피었다. 어려서 겨울방학에 외갓집을 가면 메주 띄우는 냄새가 가득했다. 꼬릿하기 보단 오래묵은 구수한 냄새가 묵직하게 자리잡은 방에서 꼼지락거리면 그 냄새가 온통 온몸에 배었다. 애써 피운 하얀 곰팡이를 박박 닦아 장을 담그고 숙성하면 외할머니의 장독에는 종종 하얀 장꽃이 피어났다. 숙성이 되면 된장과 간장을 가르고,  항아리에 된장을 꾹꾹 눌러 담아 오랜시간 숙성시켰다. 그 길고 긴  모든 여정이 외할머니의 된장의 맛의 비법이었다. 세상의 그 누구도 그 맛을 따라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외할머니도 이제 연세가 있으셔서 간이 짜지고, 맛이 조금은 변했다. 외할머니가 끓여주시는 시래깃국에서 예전의 그 맛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손맛을 물려받은 엄마의 시래깃국에서 예전 외할머니의 시래깃국 맛이 느껴진다. 외할머니가 직접 끓여도 예전에 그맛이 나지 않는데, 절대 같아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맛이 점점 비슷해진다.


엄마의 맛을 기억하는 딸이 만들어 내는 맛은 엄마에게서 딸로 그 딸이 엄마가 되면 또 딸에게 끝도 없이 전해지는 유산인 것 같다. 힘들고 지칠 때 춥고 배고플 때 다른 그 어떤 음식보다 시래깃국에 밥 말아 깍두기 하나 얹어 먹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그게 엄마의 엄마의 맛이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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