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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사서 Jul 21. 2020

15. 나를 나로 살게 하는 당신

결혼 후 나는 나로 살게 되었다.

"여보, 화장 안 해도 돼. 나는 여보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어."


같이 데이트를 나갈 때면 예쁜 모습으로 사진이라도 찍을까 싶어 화장대 앞에서 화장을 한다. 그럼 쭈뼛쭈뼛 다가와서 남편은 늘 저렇게 말한다. 


"아니, 그래도 데이트 가는 건데 화장도 하고 예쁜 옷을 입어야 여보가 기가 살지!"

"나는 진짜 그런 거 상관없어. 그냥 나한테는 똑같아. 그냥 당신이야. 힘들게 화장하지 말고 편하게 가자. 나는 당신이 편한 게 제일 좋아."


그럼 나는 입을 쭉 내밀고 투정하듯 말한다.


"화장 하나, 안 하나 똑같단 말이야? 쳇!"

"그런 말 아닌 거 알잖아. 여보~"


그런 말 아닌 거 너무나 잘 안다. 행복한 투정이다. 응석을 부려도 따뜻하게 받아주니까 그냥 마냥 아이처럼 굴고 싶어 진다. 나는 그런 사람과 결혼했다.



 

몇 해 전 대학 동기 모임에서 먼저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는 동기가 이런 말을 했다.


"결혼을 하면 내 시간이 없어지고, 아이를 낳으면 내가 없어져."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동기들은 그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 말이 나에게는 결혼은 시한부 선고이고 아이를 낳는 것은 사망선고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없어지는 느낌이라니 그런 것을 상상하기 조차 싫었다. 그래서 나는 결혼은 내 인생에서 덜어내야 할 '악'이라는 생각을 했었던 거 같다. 결혼할 마음을 접고 있을 무렵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이 사람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지금껏 이렇게까지 '나를 나답게 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고, 그게 익숙해져서 어떤 것이 내 민낯인지 잊고 살아갈 때가 많다. 부모님의 좋은 딸로, 친구들에겐 쿨한 친구로, 회사에선 내 자리와 위치에 맞는 역할을 하기 위한 가면을 쓰고 살아왔다. 특히 연애를 할 때 그 가면은 더욱 두꺼워지는 듯했다. 좋은 사람인척, 이해하는 척, 조신한 척 겹겹이 둘러싸인 가면들이 실수로 벗겨서 내 민낯을 보고 실망할까 두려워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람과 만나고 연애를 하면서 나를 갑옷처럼 둘러싸고 있던 가면들이 한 꺼풀씩 비늘처럼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화장을 하고, 머리도 세팅하고, 말투도 조심하며 '당신의 연인으로서 나'라는 가면을 쓰려고 할때마다 그는 나를 무장해제시켰다. 가식 없이 속에 담고 있는 생각이 마치 이마에 전광판이라도 켜진 듯 모두 읽을 수 있는 사람이기에 그 앞에서 치장하고 감추는 것이 무의미해졌다. 그 사람의 그런 모습을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따라 하게 됐다. 한없이 편안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그 사람의 모습에 나도 점점 민낯이 되어갔다.


내가 스스로 정해놓은 '당신이 원하는 나의 모습'을 연기하지 않도록 늘 응원해주었다. '있는 그대로의 너의 편안한 모습이 좋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주었다. 그 사람과 결혼하고 함께 있을 때 그 무엇보다 자유롭다고 느낀다. 무겁던 가면들을 모두 벗어던지니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서로의 알맹이를 예쁘다 보듬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서로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 애쓰지 않아도 좋게 바라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늘 나를 나 답게 충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내가 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응원해주고, 자신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나의 가족, 친구와의 관계를 신경 써주었다. 또, 내가 가지고 있는 취미, 사회생활 모든 것을 인정해주었다. 결혼하고 내 삶에서 바뀐 것이라고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결혼에 대한 환상이 없고 오히려 두려워하던 사람이라 결혼을 하면 남편이 바뀔 줄 알았다. 더 솔직해지면 손바닥 뒤집 듯 바뀌어도 사랑했던 기억으로 붙들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각오로 결혼했다. 그런데 결혼하고 여전히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사랑하고 있는 그를 매일 발견한다. 그 사랑 안에서 내가 더 온전해졌음을 느낀다. 그리고 삶에 치여 포기했던 꿈들을 하나둘씩 버킷리스트로 늘어놓고 있다. 


나를 잃을 줄 알았던 결혼이 나를 나 답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다. 

결혼이 생애를 건 복불복 게임이라면, 나는 나만의 1등을 뽑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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