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사서 Aug 08. 2020

16. 만약에 내가 죽으면

엑셀과 브레이크는 둘 다 필요하지

"여보 내가 만약에 죽으면 내가 죽을 때 우리 사이에 아이가 있다면 보험금의 절반은 친정에 주고, 절반은 당신이 가지고 아이들을 키워. 그런데, 만약에 우리 사이에 아이가 없다면 여보는 1/3 만큼만 가져. 싸우지 말고!"

"알겠어."

"그리고 만약 재혼을 할 거면 그건 다시 우리 엄마 줘."

"알겠어. 그런데 왜 그런 얘길 하는 거야? 여보 살 생각을 해야지. 여보 재산 많아? 숨겨놨어?"

"아니! 보험이 많아. 아무튼 재혼하면 아이들도 보내고 재산은 다 우리 엄마 줘."

"알겠어. 그리고 나 재혼 안 해! 결혼은 한번 한 걸로 됐어. 결혼할 때 웨딩 촬영하고 결혼식 때 또 촬영하고 나 그거 두 번 못해. 그리고 아이들은 내가 어떻게든 키울 거고, 엄마도 있고 여동생도 있고 장모님도 계시니까 내가 부족할 땐 도움 받으면 돼. 왜 남의 손에 애를 키워."

"아니! 나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사진 찍기 싫어서 안 하겠단 거야? 못된 남편이네!"

"여보 근데 나 그때 많이 힘들었어. 그래서 결혼은 안 할 거야. 사진을 안 찍는다는 조건으로 결혼해 준다고 하는 사람 있으면 생각해볼게. 근데 현실적으로 사진을 안 찍고 결혼해줄 사람이 없을 거 같아. 하하하"

"그게 뭐야!"


우린 애도 없고 재산도 없고 결혼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신혼부부다.

쓸데없이 진지한 아내와 진지해질 생각이 없는 남편의 대화다.




나는 요즘 만약에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리고 그 만약은 늘 불행을 대비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까 지금이 정말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행복이 어떤 계기로 무너진다 하더라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는 중이다. 그런데 나 혼자 생각해봤자 남편의 생각을 모르고 있으면 대비가 안될 것 같아 계속 묻는다. 그런데 남편은 '가정 내 괴롭힘'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남편은 워낙 낙천적인 사람이고 대비나 계획을 하기보다는 현실에 충실하는 편이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게다가 대부분 일어나지 않을 일을 묻는 아내의 질문에 조금은 고통스러워 보인다.


원래 내가 이렇게까지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나 생각해보면 딱히 그렇진 않다. 나도 '죽기밖에 더 하겠어?' 이런 마음으로 뭐든 다 해보고 거침없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 가정이 생기고 남편이 생기고 그 행복이 너무 값지다는 생각이 드니까 걱정도 많아지고 조심성이 많아진다. 그런 내가 걱정과 불안에 브레이크만 꽉 잡고 움직이지 못하고 있으면 남편이 '괜찮아. 다 괜찮아' 엑셀을 부릉 밟아준다. 그러다 보면 내가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별것도 아니구나 하고 다시 나아갈 수 있다. 단순하게 답변하는 남편을 보면 나도 모르게 안도하게 된다.


반면 남편은 행동에 거침이 없다. 생각이 바로 행동으로 이어지는 타입으로 이미 벌어진 일을 나에게 묻거나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만 나에게 묻는다. 예를 들어 '만약에 나 회사 그만 두면 어떨 것 같아?'라고 묻는다면 그만둘 각오로 회사를 다 뒤집어놓고 퇴근한 날이다. 그럼 나는 단호하게 '안돼. 멈춰. 님아 더 이상 강을 건너지 마시오.' 브레이크를 밟아주어야 한다. 그것도 너무 한꺼번에 몰아서 밟으면 오히려 폭발할 수 있으니 ABS(Anti-Lock Brake System)처럼 나눠 밟아서 서서히 진정시켜주어야 한다. '우쭈주'와 '안돼'를 번갈아 사용하며 혼을 쏙 빼놓아야 한다.


만약에 놀이는 서로 속도를 맞춰가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고 내 행복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이미 불행한 사람이 불행을 미리 대비하기만 한다면 말라 시들어버리지 않을까? 나는 맨날 걱정을 사서 하는 반면에 통통 살이 오르고 있다. 맨날 걱정거리를 달고 살면서도 사실 걱정이 없다. 걱정 파괴범인 남편이 24시간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걱정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려고 할 때마다 덥석 덥석 집어삼키는 남편 덕에 잠만 잘 잔다. 내 걱정을 남편이 가져가면 괴롭지 않을까 했는데 남편은 걱정을 소화시켜 0으로 만드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다. 내 걱정을 마음껏 뿜어내도 내가 하는 걱정에 대해 함께 걱정해주기보다 걱정하는 나만 안쓰러워한다.


만약에 내가 죽으면? - 살 생각을 해야지 왜 죽을 생각을 해.
만약에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 입양도 생각해보자
만약에 우리 아이가 공부를 되게 못하면? - 지 할 탓이지
만약에 우리가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면? - 네가 날 사랑하는 한 그런 일은 없어
만약에 오빠가 바람이 나면? - 잘라
만약에 로또가 당첨되면? - 집이랑 차를 사고 나머지는 부모님 드리자
만약에 로또가 당첨되었는데 내가 그 로또를 들고 도망가면? - 도망가면 어쩔 수 없지 안 잡을 거야
만약에 좀비가 나타나면? - 총포사나 사격장을 가서 총을 구하고 그다음은 마트를 가고 그다음은 어떻게든 살 거야

여보!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남편은 내가 어떤 만약에를 꺼내도 단 1초도 망설임 없이 답을 말한다.

그 대답이 어이없고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닐 때도 있는데 그냥 웃고 나면 걱정이 사라진다.


남편은 나만의 걱정 인형이랄까. 나는 인형 같은 남편이랑 산다.






매거진의 이전글 15. 나를 나로 살게 하는 당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