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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사서 Mar 21. 2021

청소년, 문학

주의. 지극히 개인적인 청소년 문학에 대한 단상

고등학교 때 이모가 내 방에 두고 간 김정현의 「아버지」를 읽었다.


소설의 내용은 행정고시에 합격한 한정수라는 인물이 승진하지 못하게 되며 가장으로서의 위신을 세우지 못하고 가족들에게 외면받게 된다. 심지어 자식에게까지 무능력한 가장으로 배척당하기도 한다. 그러다 췌장암에 걸리고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그 외로움을 요정의 아가씨인 소령에게 위로받으며 외도를 한다. 죽음을 앞두고 외로움에 저지른 외도를 가족들은 용서하고 그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것이 그것이라면 외도조차 묵인함으로써 배려한다. 가족들의 그러한 배려 속에서도 한정수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안락사를 선택한다.


당시 나의 감정과 맞물렸던 부분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도 인간이고 나약할 수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이 괴로웠으나 그때까지 느끼지 못했던 많은 감정을 느끼게 해 주는 소설이었다. 아버지의 직장생활을 삶을 들여다보지 못했던 나의 모습과 아버지의 외로움과 고통을 외면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오랫동안 아팠고 그게 그 소설을 오랫동안 머릿속에 가슴속에 남아있다.  그 소설을 읽고 몇 날 며칠을 우울했고 울었고 외롭다고 느꼈다. 사서가 된 지금 나는 「아버지」를 청소년에게 권할 수 있느냐고 나 자신에게 물었다.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 고등학생인 나에게「아버지」는 네가 읽을 책이 아니라고 뺏어 들었다거나, 이런 내용을 알고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면 내 머리와 가슴속에 꽂혀있는 책 한 권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청소년기에 기억에 남은 오랫동안 나를 울렸던 문학의 경험이다.




얼마 전 자료실로 돌아오고서 한참을 서가에 머무르며 책을 살폈다. 자료실에 앉아있다 보면 많은 이용자들이 묻는 질문이 있다.


"우리 아이가 중학생인데 책을 추천해주세요."

"아몬드 같은 책을 읽고 싶어요."


청소년기의 아이들의 부모님들이 혹은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도서관을 찾은 청소년들이 책을 추천해달라고 묻는다. 성인의 경우 독서상담과 도서 추천과 관련한 참고 질의의 빈도가 낮은데 청소년들에게 추천해주기 위한 성인의 질문과 청소년들이 묻는 질문의 비율은 꽤 높은 편이다. 자료실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청소년 문학자료에 대한 기초 데이터가 많지 않았던 터라 단순히 출판사의 권위와 각 학교에서 배포하는 추천도서 목록에 의지하며 몇 권의 책을 추천해주었다. 그리고 그 책들은 대로 다시 북트럭에 놓이거나 대출이 되더라도 하루 이틀 만에 다시 반납이 되곤 했다. 그건 사서로서 꽤나 괴로운 경험이었다. 이후 서가에서 '청소년 문학'이라고 되어있는 도서들을 닥치는 대로 꺼내서 속독하기 시작했다. 내가 직접 읽고 재미있는 청소년 도서를 선정하여 추천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몇 권의 깊이 빠져들어 완독 하기도 했다. 청소년이 주인공이라는 것만 빼면 일반 소설과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청소년 문학부터 보기 거북할 정도록 청소년들의 은어를 남발하고 청소년 관련 뉴스를 짜깁기하듯 어색한 작품들도 있었다. 또 동화의 불완전한 성장의 형태로 교훈을 주고 가르치려 하는 억지 화합을 보이는 청소년 문학도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게 맞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청소년기에 '청소년 문학'이라고 적힌 책들을 보는 것을 즐겼었나 하는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다.


나의 청소년기에 '청소년 문학'이라고 하면 '청소년들이 읽을 수 있는 범위는 이 정도야.' 어른들이 멋대로 그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그 안에서 안전하게 독서를 하라고 만들어 놓은 일종의 허상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나치게 청소년들이 쓰는 은어를 애써서 써 놓은 책들을 보면 '참 애를 쓰셨지만, 지금은 이런 말 안 쓰거든요.' 하면서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그 당시 독서를 꽤나하는 친구들은 사전처럼 두꺼운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 을 들고 다니면서 읽었다. 그 책을 읽지 않은 선생님들은 벌써 이렇게 두꺼운 책을 읽느냐며 칭찬하기도 하고 그 책을 읽은 선생님들은 이 책은 학교에 가져오지 말고 나중에 읽으라며 주의를 주기도 했다.  


청소년기에는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독서능력이 차이가 크기 때문에 청소년 문학이라고 이름 지어진 문학작품이 청소년을 독서력을 아우르기에는 한계가 있다. 다만 성인들에게 폭력성이나 선정성 등 청소년에게 해롭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삭제된 안전한 도서라는 정도의 안도감이 존재할 뿐이다. 최근 들어 그 틀도 깨어지고 있다. 이전에도 해외의 청소년 문학은 다루는 소재와 수위가 당시 우리나라의 청소년 문학과는 달랐다.  청소년기의 성과 사랑을 다루기도 하고 청소년의 폭력성도 여과 없이 드러나기도 했다. 청소년의 심리와 사회를 그려내기 위한 부분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우리나라의 청소년문학도 최근에는 죽음과 자살 정신과적 문제, 폭력성을 가미한 청소년 문학들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청소년이 처음 성경험을 하는 연령은 평균 13세(대한산 부인과학괴 학술지, 청소년 건강 행태 온라인 조사)로 낮아졌는데 청소년 문학에서 청소년들의 섹스는 다루어지지 않는다. 청소년들 사이에서 학교폭력과 집단 따돌림의 수법은 악랄해지고 교활해지는데 19세 이상 관람가의 드라마에서는 여과 없이 드러나지만, 청소년 문학에서는 모자이크 처리된 듯이 희뿌옇게 보인다. 아동 문학의 경우 선택의 주체가 보호자인 경우가 많고 보호자가 보기에 좋은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청소년 문학의 경우 청소년이 문학을 고르고 선정하는 독립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하는 시기에 정작 청소년들의 구미를 당기는 소재와 주제가 적다. 일반문학을 접하기에는 나이에 맞지 않다고 빼앗기고, 과제를 위해 읽어야만 강압성이 붙은 청소년 문학은 재미가 없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청소년 문학은 어쩌면 어른들을 위한 분류로 생겨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읽지도 않은 책 중에서 그나마 손쉽고 간편하게 청소년들에게 권할 수 있는 문학의  카테고리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소설은 사회의 축소판이니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부분이 어디서 불쑥 튀어나올지 모른다. 영화의 심의를 하 듯 여기까지 청소년이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는 가이드라인을 억지로 한 분류는 아닐까 하는 것이다. 15세 이상 관람가의 영화는 성인들도 재미있게 보지만 청소년 소설은 오히려 손이 가지 않는다. 청소년이 주인공인 소설은 청소년 소설이어야만 하는 걸까? 해리포터가 "(청소년 소설) 해리포터"라는 관제나 총서명을 달았다면 우리나라에서 흥행에 실패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청소년들의 독서상담을 위해서 청소년 문학을 꺼내 읽다가 생각이 여기까지 왔다. '청소년들이 어떤 책을 좋아할까? 나는 어땠었지? 나는 사서로서 청소년에게 어디까지 책을 추천할 수 있지? 청소년에게 제한적이고 어린아이라는 프레임으로 작품을 고르려고 하지 않았나? 청소년 문학은 무엇이지? 필요한 분류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이 머릿속에 얽혀있다. 이 생각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 보려고 한다.


이 글은 청소년 문학에 대한 비판 하고자 쓰인 글이 아니다. 그저 사서로서 청소년에게 문학을 추천하기 위해 청소년 문학이라는 틀에 갇힌 생각을 깨기 위해서 스스로 반성하고 깨닫는 과정을 남긴 글이다. 청소년들이 내가 머무는 자료실에 와서 "그때 사서 선생님이 추천해주신 책이 재미있어서 또 왔어요." 재잘재잘 떠드는 모습이 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이제 막 돌아온 자료실에서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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