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셋 에브리씽 1화

값비싼 것들의 주인이 사라지고 있다.

by 권다이

누군가에게는 당연했던

또한 누군가에게는 의미 없던 것들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 나는 10개가 넘는 기업에 서류를 제출했지만

합격이라는 문은 졸업하고도 여전히 저 멀리 아득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대기업, 중견기업, 중소기업 등 가리지 않고 70개가 넘는 회사에 지원했지만

돌아오는 건 상냥하고 다정한 거절 의사뿐.

어떤 회사는 오지 말라는 아니 꿈도 못 꾼다는 문자조차 보내주지 않았다.

참으로 매정했다.


'내가 그리도 부족한 걸까. 이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라는 존재론적 문제 제기까지 하며

여러 가지 이유를 내 취업시장에 연결시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모두가 겪는 일이라며 자기 위로를 하였다.


취준생이라면 잘 알겠지만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은

우습게도 인스타그램이다.


입 근처까지 이불을 덮어쓰고 어두운 방에서 두 눈동자만 밝게 빛나는 모습.


손가락을 위아래로 프로페셔널하게 흔들어대는 모습은

마치 회의실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김대리의 손짓과도 유사하게 느껴지는 그 순간

휴대폰 상단의 시계를 쳐다보니, 어느새 눈 뜬 지 1시간이 훌쩍 지나간 것을 깨달아버렸다.


5초 법칙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던 나는

그 자리에서 오른발로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을 확 들쳐버렸다.

완전히 걷어지지 않은 탓에 똑같은 발차기를 3번이나 반복했다.


그렇다 이게 내 아침 루틴이고, 죄책감과 현타 속에서 하루를 시작하게 된다.

여느 취준생과 똑같이.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니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이고

어제와 너무나 똑같아 보인다.


면접은 준비하고 있는 건지 자를 때가 한참 지나서 눈을 찌르고

콧잔등을 간지럽히고 있는 앞머리와

잔디처럼 촘촘하게 자라난 턱수염.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샴푸통과

화장실 문 밖 방바닥에 튄 물자국을 보면

이 4평 남짓한 원룸이

나를 옥죄여 오는 감옥과 같이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아침에 보았던 인스타그램 스토리 하나가 생각났다.


대학 동기인 윤기는 나처럼 아직 취업을 못 했다.

하지만 어제 여자친구와 오마카세 식당에 가서

윤기가 좔좔 흐르는 스시를 먹었다.

나도 스시를 꽤나 좋아한다.

아니 사실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다.


하지만 언제 먹었는지 기억도 잘 안 나는 것은

그 친구에게 절대 말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다.


'그 친구는 돈이 어디서 났길래 그렇게 비싸고 맛있는 것들을 먹으며 다닐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순간

친구 할아버지가 예전부터 땅부자였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우리 집 땅이라고는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 묶여 있는

대지지분이 전부이다.

하지만 '서울도 아니고, 심지어 경기도도 아닌 지방 아파트의 가격이 얼마나 할까'

라는 생각이 먼저 치고 올라왔다.


그래도 부모님 노후 자산인 이 아파트는

어쩌면 부모님에게 나보다 더 소중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사실은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인 것만 같다.



부모님은 아직 나를 돌봐주고 계신다.

외벌이이신 아버지는 곧 퇴직을 앞두고 계신다.


30년이 넘게 일하셨지만 부모님에게 남은 자산이라곤

지금 살고 계신 아파트 한 채이다.

지방에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다.


앞서 말했다시피 아파트도 비싸지 않고

물가도 대도시보다 저렴하며

노후 생활도 연금과 아파트 한 채면 된다는

안일함이 가득한 게 지방의 현실이다.


하지만 실제 그 시간이 다가오며

부모님들이 깨닫게 되는 사실이 있었다.


자식들이 지방에서 떠나간다는 사실이다.


수도권 특히 서울로 취업한 자식들은

해당 지역에서 거주하고

결혼 후 생활도 직장 근처에서 하게 되지만


그 동네의 아파트 가격은

부모님 본인이 거주하는 아파트의

적게는 5배, 많게는 20배 이상 차이 나는 게 현실임을

믿고 싶지 않아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때가 분명히 찾아온다.


그들이 이 사실을 체감하게 되었을 때

이미 그들의 자산은 어느 범위를 벗어나기 힘들어지고

소비가 늘어난다면 그들의 노후도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다.

우리 세대 부모님들 중 자식을 노후자산으로 생각하는 부모님도 계시다는 사실이다.


자식 된 입장에서 잘 챙겨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도 있지만

"내가 키워줬으니 너는 내 노후를 위해 일정 부분 관여해야 해"라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부모님이 밉고 버겁게 여겨지는

청년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들도 그저 그 윗세대의 관습 같은 것을

끊어내지 못하는 것이겠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즘 세대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보니

자식세대들에게는 자신들도 먹기 힘든 상황인데

부모님의 노후까지 책임지라니

너무 가혹한 짐을 짊어진 채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게 된다.


얼마나 불쌍한 세대인가.



형은 대기업에 다니고 있다.

들어간 지 4년이 조금 넘었고 직무는 적성에 맞는 듯 열심히 다닌다.

하지만 옆에서 지켜본 형은 어쩌면 실패한 인생에 가깝다.


형은 취업하자마자 부동산 대세장이라는 명목하에

무엇을 사도 오른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얼마 없는 돈과 대기업이라서 가능한 대출을 끌어모아

말 그대로 영끌로 아파트 상투를 잡았다.

그것만 있었다면 참 다행이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코인이라는 무서운 투자처에도

손을 대었다.

잃고 따고를 반복하다가

결국 대출까지 받아 코인에 몰빵을 해버렸는데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라 생각한다.


대출로 받은 금액까지 전부 잃어버렸다.

암울하고 힘든 나날들을 여전히 보내고 있다.



아버지는 오늘도 출근을 하셨다.

토목회사에서 오래 몸 담으셨지만

현재는 프리랜서로 일을 받아가며 생활 하신다.


너무나 순박하고 착한 성격 탓에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분이 해고된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대신해서 회사를 나왔다.

그때는 내가 중학생 무렵이다.


40대 초반이라는 나이에 대학도 나오고

기사 자격증도 가지고 계신 아버지는

지역에서 나름 주요 도로들을 맡아서 공사해 왔기에

아무래도 자신감이 있으셨던 것 같다.

나였어도 자신감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예상과 다르게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왔다.


외벌이 아버지마저 회사를 나오니

가족들은 생계를 위협받게 되었다.

그래도 다행인지 어머니께서 곧바로 일을 잡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수년간 힘든 시간을 보내던 아버지는

다행히도 이전 회사 사람의 소개로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지금은 이전과 비슷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 오랜만에 대학 동기에게 연락을 받았다.

상반기/하반기에 한 번씩은 꼭 보자는 약속을 했던 친구이다.

하지만 연말인 지금,

두 번의 만남 중 한 번이 어렵사리 성사되었다.


강남역 9번 출구, 난생처음 보는 낯을 가진 사람들이

출구에서 끊이지 않고 고개를 들며 올라온다.

낯익은 친구의 얼굴이 보이자 나도 모르게 반가운 미소가 지어졌다.


오랜만에 맞춰보는 발걸음이지만, 여전히 속도는 내가 빨랐다.

하지만 인생의 속도는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친구는 역삼역 근처 이름만 대도 알만한

대기업에 취업했다는 소식을 들려주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좋은 소식에

나도 기분이 덩달아 좋아졌다.


다들 궁금해하는 연봉이 얼마고, 복지는 어떻고

성과급은 얼마 정도 주냐는 질문을

속사포처럼 물어봤다.

하지만 그 벅찬 소식들이 결코 내 마음의 곳간을

채워주진 못했다.


내 마음은 여전히 유리창에 “임대 구함”

A4 종이가 붙어 있는 텅 빈 상가와 같았다.



고개를 들고 맥주를 들이켜려는 순간

축구가 나오던 TV에서 "속보"라며

긴박해 보이는 소식을 전해왔다.


강남역 중심에 있던 커다란 빌딩의 소유자가

"공란"으로 바뀌었다는 소식이었다.

족히 3천억 원은 넘을 빌딩의 소유자가 없어졌다니?

말도 안 되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별 감흥이 없었다.

혀를 끌끌 차며 ‘아휴, 저거 가진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월세만 받아도 한 달에 억 소리 나겠네’라는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또 다른 속보라며 잠실과 홍대의 큰 빌딩들에도

똑같은 현상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강남

잠실

홍대

...


무언가 이상했다.



세상의 값비싼 것들의 주인이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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