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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동규 Jun 28. 2022

페데스트리안

그네들 말대로 훈과 연심(蓮心)1)의 만남에 내 책임이란 게 없지 않아 있는 듯싶소. 알겠소, 적잖이 있소. 거참, 지대하오! 됐소?

     

     

훈이 두문불출한 지 자그마치 일 년 하고 반이다. 내가 고까운 것은, 지금껏 33번지2)에 드나드는 건 정작 본인들이면서 저들 하던 얘기가 시들해지니 식후 이를 쑤시기라도 하듯 훈 얘기를 꺼내 그를 왜 거기서 데리고 나오지 않느냐며 나를 비방하는, 자칭 훈의 친구라고들 말하는 이 작자들의 행태다. 내 장담하는데 여기에는 훈의 친구가 없다. 그게 나를 포함하는 선언이 될지라도.

여기 내게 부과된 이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2년 전에 훈을 33번지 유곽으로 데려갔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당시에 나는 세상 물정 모르고 공부밖에 할 줄 모르는 이 숙맥을 골려줄 생각에 신이 나 있었다. ‘책상 앞에 앉아 시나 짓고 논문이나 쓰며 혼자 고상한 척하는 놈아, 나는 네가 자나 깨나 하늘을 올려다본다는 걸 안다. 이따금 날갯짓해본다는 것도. 그러나 오늘 네가 계속 외면하던 땅을 쳐다보게 될 것이다. 별도 달도 눈에 들지 않는 차가운 밤의 대지를.’ 나는 나도 유곽에 처음 가는 중이라는 사실도 잊고 훈이 당황해하며 보일 표정만을 고대하며 걸었다.

각 방 미닫이 위에 붙여놓은 문패3)가 아니고서는 분간이 잘 안 가는 열댓 개의 가구들 앞에 섰을 때, 나는 훈에게 이 중에 아무 방에나 들어가면 여인이 있을 것이요, 식견이 우리보다 넓은 사람일 터이니 아무 주제로나 대화도 하고 차도 마시고 시간을 보내다 자정 전에 돈을 얼마 즈음 주고 나오면 된다고 일렀다. 그러면서 쳐다본 훈의 표정은 사실 평소와 대동소이하긴 했지만, 나는 그것도 그가 너무 당황스럽고 긴장한 나머지 얼굴이 얼어붙은 것이라고 여기고 넘겼다. 훈은 방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나는 몇 분 안에 그가 도로 뛰쳐나오리라 생각하여 다른 방에 들어가지 않고 잠시 밖에서 기다렸다. 나오지 않는다. 하하, 그건 그거대로 통쾌한 일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니 나는 안심하고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현 선생, 선생 말대로 내가 만난 여인은 참으로 아는 것도 많고 또 생각이 깊고, 심지어는 아름답기까지 하더군요.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선생이 만난 분은 어땠나요?” 나는 훈의 그 말에 너무도 만족스러운 나머지 거봐라, 내가 어디 허튼소리 하겠냐, 나 역시도 오늘 고매한 여인을 만났다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석 달인가 지나서였나, 훈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건너 들었다. 도대체 누구랑? 나는 수소문했다. 연심이라는 그 이름을 찾기까지 나는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의아해하는 눈초리를 받았다. 듣자 하니, 훈이 내 덕에 아내 될 사람을 만난 거나 다름없다던데 정작 내가 그 사람 이름도 못 들어봤다며 본인들에게 묻는다는 게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냐는 것이었다. 황당하다 못해 화가 나려는 찰나에 설마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 탓에, 나는 얼른 훈을 찾았다.

“어허, 참. 지난번에는 내가 지나쳤대도 그러네. 그리고 장난 좀 쳤기로서니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한단 말이야?”

“복수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선생, 아까부터 뭘 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결혼한다는 연심이, 그 여자 저번에 내가 자넬 데려간 유곽 출신이 아니야?”

“하하, 연심이를 그때 만난 건 맞지요. 그런데 출신이라고 말할 것 같으면 그때 유곽에 들어갔다 나온 현 선생과 나는 유곽 출신이 아니랄 수 있소?”

“내가 그런 말장난이나 듣자고 이렇게 급하게 찾아온 게 아니야. 복수를 하는 게 아니라고? 이봐 훈이, 자네 나를 따라 유곽에 간 일로 고결함에 흠집이 갔다고 생각한 게 아닌가? 그래서 자네 남은 생을 걸어가면서까지 내게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을 안기려는 것이고. 그렇잖은가? 좀 솔직해지게!”

이내 훈이 웃음기 가신 얼굴로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생이 말한 대로 복수를 하려거든 누구든 자기 남은 생애 역시 걸어야지, 안 그렇소? 복수하는 데 있어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오. 다만 나한테는 선생에게 복수를 할 만한 이유가 없소.”

“그러면 결혼은 왜, 아니 그러니까 정말로 마음에 있어 혼사를 치른단 말이야?”

“······.”

“거봐, 대답을 못 하잖아!”

“나야 당연히 연심이를 좋아해요! 그런데 연심이도 나를 좋아하는지, 그런 연유로 청혼을 받아준 게 맞는지는 물어봐야 알겠소.”

역시나 하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백번 양보해 잠깐 사귀는 건 몰라도 결혼은 안 된다는 식으로라도 설득해보려던 내 마음이라던가 의지라던가 하는 것들이 싹 가셨다.

“그래, 하긴 이미 결혼까지 하기로 되어있는데 인제 와서 좋아하고 안 좋아하고가 뭐 의미 있겠어? 잘 살면 그만이지. 축하해! 조만간 선물 들고 오지.”

“고맙소. 선생, 어두운데 조심히 들어가시오.”

     

그러나 내가 다시 찾아가기 전에 훈이 느닷없이 나를 찾아왔다.

“현 선생, 선생은 박제를 좀 할 줄 아시오?”

“몇 번 해보긴 했는데 왜, 뭐라도 잡았나?”

“아, 아직 잡은 건 아니고 곧 뭐라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렇지? 근데 뭘 잡는다고 해도 어지간하면 박제는 안 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아. 곧 결혼도 하잖아. 박제해놓으면, 신혼집에 어디 둘 데나 있어? 참, 집이라 하기도 좀 그렇긴 하다만. 자네 그 유곽에 들어가 살겠다 했다며. 이유가 있어?”

“선생, 나는 선생이 나를 두고 했을 예상과는 다르게 그날 선생이 데리고 가는 곳이 어딘지, 뭘 하는 곳인지 정도는 다 알고 갔소. 사람이 어떻게 하늘만 보고 살겠어, 안 그러오? 그러니 내게는 선생에게 복수할 만한 이유가 없는 것이오.”

훈의 그 말로써 그날 수치를 당한 게 훈이 아닌 나였다는 사실을 마주하여, 이루 말할 수 없이 분했다. 그마저도 훈이 선심 쓰듯 말해주고서야 알았다는 건 덤이었음이다. 그런데 수치심이나 노여움보다도 커다란 궁금증이 이는 것이었다.

“이봐, 훈이. 그럼 제 발로 거기 갔다는 거야? 아니 그보다도 방금 자네 말이 어떻게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는가?”

“선생, 우리는 어느 나라 사람이오? 나는 경술년(庚戌年)4)에 나서 올해 스물넷인데,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오히려 이제 와 모르겠더란 말이오. 사는 물이 조금만 더러워져도 자취를 감춰버리는 버들치나 산천어 같은 물고기들이 있는가 하면, 일본 놈들한테 나라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고도 우리는 여전히 이 땅 위에 있소. 그 증거로 나도 선생도 여기 있지 않소?”

“그럼 우리가 여기 계속 사는 게 잘못이라 이건가?”

“아니, 여기 사는 건 문제가 안 되오. 문제는 무진 열심히 살았단 거요.”

     

     

“이봐, 현 씨! 우리 얘기 듣고 있어? 에이, 우리가 뭐라 했다고 삐친 거야?”

“하하! 아이고 이 사람아, 자네 기분 나빠지라고 한 말이겠어? 안타까워서 그래, 안타까워서. 왜, 자네가 제일 잘 알잖아? 우리 중에서도 훈이 제일 머리 좋고 똑똑한 인재였는데···. 하기야 거기서 만난 여자랑 그렇게 덥석 결혼해버릴 줄 누가 알았겠어?”

“그렇지! 그리고 결혼이야 남녀가 서로 좋아서 했다고 쳐도 왜 그 비상한 머리로 하던 것 다

관두고 거길 들어가 사느냐 이 말이지!”

“그야 우리나 남들 얼굴 보기 창피해서 그렇겠지 뭐. 너 같으면 얼굴 들고 밖에 나다니겠냐?”

“아, 그건 그래. 이번엔 네 말이 맞네.”

“뭐? 언제는 내가 틀린 말 했다 이거야 지금?”

좀 알고 지내던 한 천재에 대한 조롱과 자기들 삶의 안정에 대한 안도감만 오가고 있을 뿐이니, 분명 내 눈앞의 이 셋이 훈에 대해 느끼는 바에 안타까움 같은 건 조금도 없다.

“그만치들 하시오! 그렇게 안타까워서 그간 어떻게들 사셨소? 누가 들으면 그동안 훈을 만나려고 33번지에 그만치 기웃거렸던 줄로들 알겠소. 됐소, 말 더 꺼내지 마시오. 내가 지금 가서 데려오겠소. 안 나오겠다 하면 둘러메서라도 데려올 테니 그런 줄로 아시오.”

     

나름 훈이 결혼하고 첫 방문인데 빈손으로 가긴 그래서 과일을 좀 샀다. 나를 반기지는 않더라도 과일은 받아주겠지. 나를 따라 밖으로 나오지는 않더라도 과일은 받아주겠지. 애당초 나도 훈이 왜 지금 사는 방에 들어가 살기로 했는지 아는 마당에 훈을 만나도 억지 부릴 생각 따위 들지 않는다. 저기 남아있는 셋도 오히려 내가 훈을 데려올까 봐 조바심을 내고 있을 터다.

     

     

“열심히 사는 게 왜?”

“선생, 내게는 나라를 빼앗겼다는 사실에 대한 지식은 있지만, 나라를 빼앗기던 순간에 대한 유별난 탄식이나 울분 같은 건 거의 없었소.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부모의 마음이라고 하면, 심지어 그게 빼앗기거나 잃어버린 나라에서라고 해도 자기 자식만큼은 잘살기를 바라는 게 아니요? 두 분이 이전에 대한독립을 얼마나 외쳤을지는 알 길이 없지마는 내 부모님도 내게 커서 훌륭한 사람이 돼라, 많이 배우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런 말 몇 번은 하셨소. 굳이 그 말을 따르려고 한 것도 아니건만, 나는 결국 열심히 살았소. 기왕 태어난 김에, 뭘 잘 모르는 김에 이상이나 야망 같은 것도 갖고 살았었다 이 말이오.”

“그러면 이제는 뭘 좀 안다는 말인가?”

“경성에 와서 선생 같은 수재들을 여럿 만났잖소? 머지않아 각자 가진 재능을 펼쳐 살아볼 이들 말이오.”

     

     

유곽 입구가 이제 저 앞에 보인다. 일 년 반 만이구나! 드나드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아는 얼굴을 마주칠까 들어가기가 좀 망설여지기도 하는 것이, 나는 훈이 말마따나 열심히 살아온 한 사람으로서 경성공고 건축과를 졸업하고 총독부에서 건축기사로 일한다. 갈수록 보통학교만 나와서는 일을 구할 수가 없고 전문직이 갈 수 있는 데도 줄어드는 형편이니, 나는 나름 성공한 셈이다. 하지만 지금의 자리에 앉기까지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모른다.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받았던 차별과 핍박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걸 다 이겨내고 어느덧 총독부 안의 일본 관료들 사이에서도 나름 인정받고 있는 나 자신을 생각하자면 이 젊은 나이에 감개무량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를 돌이켜봤을 때, 훈은 다가올 이런 심상을 이미 염두에 둔 것 같았다. 내가 이제야 일본인, 그것도 소수의 몇 명에게 약간의 인정이나마 받게 된 것을 기뻐한 반면으로, 일찍이 특정할 수도 없는 어느 시기에서부터인가 저들이 우리보다 우월하다고 인정하는 맹목적인 믿음이 내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 훈과 나눴던 대화가 아니었다면 여전히 알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정체되어 있고 낙후된 민족이라는, 그런 얼토당토않은 내용까지도 내가 열심히 배우고 받아들이고 있었구나, 하는 자각도 미련히 없었을 것이다. 저들은 우리 중 한 명이라도 더 자신들의 사관(史觀)을 배우고 받아들이기를, 나중에는 우리 스스로가 자연히 다음 세대에 물려주기를 거듭 꾀해 오고 있다. 저들은 언젠가 망국에 대한 설움보다 독립에 대한 체념과 회의 또는 두려움을 더 느끼게 될 세대를 기다리고 있다.

나라가 망하고 오히려 더 잘 사는 앞잡이의 자손들이나 나라를 망하게 하여 부러울 것 없이 살던 매국노의 자손들은 그들이 누리던 것을 잃고 곧 처단의 대상이 될 것이니 독립을 두려워하겠고,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 할지라도 자긍심을 갖기보다 자신이 핍박 속에 숨어 사는 것에 도리어 그들을 원망하거나, 애초에 그들과 생각이 달라 부역에 가담하는 자가 생기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겠고, 이런 날이 오게 된 다음에야 대한(大韓)이 다시 설 곳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참으로 시간은 우리 민족의 편이 아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 자신이 우리 민족의 편인가 싶었다. 일본이 지어놓은 학교에서 배우고 이제는 일본인 사이에서 일하며 녹을 먹고 사는 나는 어느 편에 서 있나. 내가 세상에 난 걸 이유로 좀 열심히 살아왔기로서니,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 바칠 용기까진 없었으나 그렇다고 일본 제국주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려던 바도 아니었다. 나는 다만 적응이 머잖아 순응이 되는 경우를 몰랐다. 참, 사람 일이 그렇다. 그러나 비단 나만 아니라, 당장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할 사람부터 시대가 어떻든 잘 살고 봐야겠는 사람까지 해당 안 될 부류가 없을 것이다. 살아가긴 살아가야겠는데 그렇다고 아무 세상에서나 그저 열심히 사는 건 잘못이 되는지도 모른다, 이래도 저래도 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끔만 해 놓았구나! 진퇴양난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망국(亡國)의 설움과 양심의 가책이 내게 몰려옴을 느꼈다.

그러자 훈이 전에 했던 말과 행동이 다시 생각나는 것이었다. 전에 결혼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 내게 복수하는 것이냐고 물었을 때, 훈이 아니라고 부인하면서도 복수 자체에 대해서만큼은 몇 번이고 숙고해본 투로 답하던 게 왠지 위화감이 든다 했다. 훈이 누군가를 향해 복수를 다짐하긴 했다는 인상이 남는 걸 당장에 그 대상이 나는 아니라고 하니 눙쳐놓았던 게 생각나지 뭔가. 늦게나마 짐작하건대, 아니 확신하건대 훈이 연심이를 유곽 밖으로 데리고 나와 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저 안에 들어가 오늘까지 두문불출하고 있는 것, 바로 그것이 훈이 자신의 남은 인생을, 이상을, 야망을 걸고 하는 일본에 대한 최후의 복수이리라. 나로서는 생각해낼 수 없고 해볼 엄두도 낼 수 없는 일로, 그 이유마저 간사한 것이다. 나는 지금보다 좀 검소하게 사는 정도야 할 수 있지만, 일생의 경험과 공부를 통해 얻은 지식으로 미래에 성취할 수 있을지도 모를 모든 걸 놔 버리고 내던지는 것은 단지 가정해보는 것만으로도 견뎌내기 어려웠다. 내가 이미 들인 시간과 앞으로의 가능성이 너무도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전에 이해할 수 없었던 훈의 말과 행동들을 두고 더는 다른 사람들처럼, 아까의 그 세 사람처럼 웃음거리로 삼거나 비아냥댈 수가 없었다.

     

“안녕히 가세요.”

“내일모레 또 올게! 그땐 경성(京城)역 쪽에 저녁 먹으러 나가면 좋겠는데!”

“경성역 좋지요. 어머, 선생님! 현 선생님 맞으시죠? 어쩐 일로 오셨어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남자를 배웅하며 나오던 연심과 길에서 마주쳤다.

“아, 그게 과일을 좀 사 왔소.”

나는 간만에 연심을 찾아온 손님인 양 말을 하고 말았다. 필시 훈을 만나러 왔다고 했다면 쉬웠을 것이다, 내 말에 대한 오해가 생기진 않았을 테니. 그런데 훈이 누구인가? 연심의 남편이 아닌가.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르긴 모른다만, 유곽에서 일하는 여인에게 남편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 그 사실이 저 진짜 손님에게 알려지는 게 장래에 어떤 파장을 낳을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차라리 저 남자가 보내고 있는 부당하고 언짢아지는 눈빛이 연심이 아닌 나를 향하도록 하는 게 낫겠다, 그저 짧은 순간에 그 정도까지 생각이 미쳤음이다. 동시에 나는 빈손으로 오지 않고 과일을 사길 참 잘했다고도 생각하였다.

“아유, 이런 거 안 사 오셔도 되는데요. 저는 이분 배웅 좀 해드리게요. 먼저 가 계시겠어요? 참, 방이 어딘지는 아셔요?”

“알고 있소.”

사실 잘 몰랐지만, 모른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하여튼 방을 찾자면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니 나는 유곽에 들어가 방마다 붙은 문패를 훑어보며 돌아다니는 중이다.

     

“훈, 안에 있는가?”

연심과 훈이 사는 이 방에만 문패 대신 연심의 이름이 적힌 작은 명함5)이 붙어 있다. 방은 여기가 맞을 것인데 훈의 대답이 없다. 근데 도리에 맞긴 이게 맞을 것이다. 아무렴, 남편이 방 안에 같이 있는데 손님을 들이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연심은 훈을 집 밖으로 몇 시간이라도 내보내 놓고 이렇게 일하는 것일 테다. 또 어쩌면 훈이 알아서 자리를 피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당연한 이치라도 현장에 당도하기 전까지는 미처 생각지도 못할 수도 있다는 게 사람의 한계인가 한다. 어쨌든 훈이 방에 없는 것 같기는 하나, 그가 영 방 안에 자신을 가둬두고만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 조금은 안도감이 든다.

     

“선생님, 들어가 계시지 왜 밖에 계셨어요?”

“아, 훈은 안에 없나 보오. 빈방에 들어가기는 좀 그래서 그냥 기다리고 있었소.”

“네, 그이가 요즘 종종 나갔다 오는데요, 뭘 하고 다니는지를 도통 모르겠어요.”6)

“언제 돌아올지는 대강이라도 아시오?”

“보통은 자정 조금 넘어서 돌아오는데···.7) 일부러 보러 오신 걸 텐데, 그나저나 방이 지저분해서 어떡하죠.”

“괜찮소. 내가 기별도 없이 와서 그런 거니. 오히려 다음 손님을 받아야 할 텐데, 내가 방해되는 건 아니오?”

“아뇨, 그런 걱정하지 마셔요. 원래 이 시간대에는 손님 많이 없는걸요.”

     

연심을 뒤따라 들어온 방은 원래도 크지 않아 보이건만, 이마저 두 칸으로 나뉘어 있다.8) 칸이 나뉜 대로 부부가 방을 나눠 쓴다고 하면, 대충 봐도 벽에 치마랑 저고리가 여럿 걸려 있고 화장대가 놓인 여기가 연심의 방이렷다.

“훈이 윗방을 쓰는 거 같은데 좀 봐도 되겠소?”

나는 사 온 과일을 내주면서 허락을 구하고 훈이 쓰는 윗방을 보고 있다. 방바닥에 이부자리 말고는 뭐가 없다. 꾸며놓았을 거란 기대 같은 게 없었다 해도, 훈은 여기 들어오면 도대체 뭘 할까? 아까 연심이 그가 요즘 나다닌다고 하지 않았던가. 오늘처럼 오전부터 밖에 나가서 자정 넘어 돌아오는 게 일상이라면야 이해가 간다고 해도, 매일 그런 게 아니고서야 이 방 안에서 하루를 보내야 했던 날이 있었을 것이다.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런 날들을 이 안에서 어떻게 보냈나 하는, 약간은 두려움과도 같은 의문이 들었다. 궁금하긴 하지만, 알고 나면 오히려 착잡할 것이다. 몇 시간 더 여기 앉아 있는다고 훈이 올 것 같지도 않고, 그만 일어나는 게 좋겠다. 그런데 한 번도 갠 적 없어 보이는 훈의 이부자리9)가 시선을 끈다.

     

이불 안에 뭘 숨겨놓았냐, 나는 이불을 걷어보았다. 그러나 훈은 이불 아래 요에 아무것도 숨겨놓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이지 못질이라도 하였나, 웬 구멍이 이렇게 많은지! 정교하다고는 못 해도 크기들이나 난 위치나 얼추 균일해 보이는 게 일부러 냈음이 틀림없다. 왜? 여기에 뭔가 고정이라도 시켜놨던 것인가? 무엇을? 아니, 누구를!10)

     

     

나는 너무도 소름이 끼쳐 과일을 내오는 연심에게 간신히 인사를 하고 급히 밖으로 나왔다. 훈은 이불 아래 요에 자기 자신을 숨겨놓았었다. 밖으로 나가고 싶었을 것이다. 나오고 싶었을 것이다. 그걸 자신에게 못질해가며 견뎠구나. 그러나 이제 밖으로 나온 것을 보니, 훈이 그 힘겨운 복수를 마치려나 보다. 전에 품었던 이상도 되찾을 것이다. 다만 내가 너를 다시 만나볼 수는 없겠구나···. 내가 너를 보러 오는 게 늦었다.

     

그는 날갯짓해보고 있으리라. 곧 날아가리라.11) 이미 그런 줄도 모른다. 한데 내게는 날개가 없다. 저기 저 사람도, 또 바삐 가는 저기 저 사람에게도. 남은 우리는 숙명적으로 이 위에서 걷거나 달음박질칠 수 있을 뿐이다. 잃어버린 나라의 땅이라고 내가 밟고 다닐 때마다 푹 꺼져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말이지 다행한 일이 아니다. 내가 밟고 다니는 것은, 민족의 미래인지도 모른다. 부끄러운 자취를 감출 수도 없이 거니는 내 발아래 민족의 미래가 밟혀 꺼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걸음을 다 멈춰버릴 수도 없다. 마냥 걸을 수도, 걷지 않을 수도 없구나. 훈아! 나는 이제 어찌하면 좋으냐! 어쩌면 좋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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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상, 『이상 소설 전집』 (서울: 민음사, 2019), 110.

2) 이상, 위의 책, 85.

3) 이상, 위의 책, 86.

4) 1910년.

5) 이상, 앞의 책, 86.

6) 이상, 위의 책, 113.

7) 이상, 위의 책, 104.

8) 이상, 위의 책, 88-89.

9) 이상, 위의 책, 90.

10) 이상, 위의 책, 83.

11) 이상, 위의 책, 116.


원저 : 이상, 날개(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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