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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장미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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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동규

주은이, 이현이, 요한이, 지곤이, 진영이, 소윤이, 소은이, 윤주, 예린이, 준서, 수, 정우, 서호, 그리고 서로 다른 두 민준이에게

일주일에 하루, 한 시간 남짓이었지만 너희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는 사실에 참 기쁘다. 아쉽게도 얼른 자라나는 너희를 위해 선생님이 금방 해 줄 수 있는 게 많지는 않구나. 그래도 이야기 하나 지어본다. 다소 거칠거나 낭만적일지 모르겠지만 너희가 어른이 되기까지, 혹은 어른이 되어서 마주하게 될 많은 고민 가운데 한두 가지에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 그리고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마주치고 또 지나쳐 가겠지만, 매주 너희를 부모의 마음으로 대해주신 전현선 선생님의 이름은 오래도록 너희 기억에 남아있으면 좋겠다,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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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눈을 떠요>라는 주말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대학 병원 의사 선생님을 섭외해 형편이 어려워 치료를 받지 못하던 사람들의 눈을 고쳐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매주 방송이 끝나면 나는 양쪽 눈을 꼭 한 번씩 윙크해보면서 내 눈은 이상이 없나 혼자 확인해 보곤 했다. 번번이 앞은 잘 보였지만 나는 그래봤자 아직 잘 보이는 것뿐이라며, 앞으로 수십 년은 더 산다고 할 때 죽기 전까지 나와 우리 가족이 사고나 질병으로 앞을 못 보게 되는 일은 없게 해 달라고 손을 모아 빌었다. 죽음보다도 눈머는 게 더 무서웠기 때문에 그랬다. 그러고 나면 잠깐 안심이 되긴 했지만, 결국에는 왜 누구는 건강하고 누구는 아프거나 장애가 있고, 또 왜 누구는 부유한데 누구는 가난하며, 무엇보다 왜 이런 게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것인지, 그러니까 대체 운이란 건 뭔지, 거듭 고민하게 되는 것이었다.

어린 나이의 내가 여러 번의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찾아오는 불운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곧이어 나는 결심했다, 안과 의사가 되겠다고. 내가 TV에 나온 그 의사 선생님처럼 명의가 된다면, 그리고 분명 그때까지 의료 기술이란 것도 더 발전할 테니까, 아무리 불운한 사람이라도 앞을 못 보는 일만큼은 피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고등학생 때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접어야 했다. 수학 성적이 형편 없었기 때문이다. 3학년으로 올라가는 겨울에 이과에서 문과로 옮겨 가면서,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싫증을 느꼈는지 모른다. 다시 무언가가 되고 싶다거나 뭔가를 하고 싶다는 의욕이 생기지 않았고, 스스로 그런 의욕이 생기길 바라지도 않았다. 그나마 대학 입시가 코 앞이니까 일단 좋은 대학에 가고 보자는 게 당시 나의 최선이었고, 그렇게 이듬해 수능 성적에 맞춰 가게 된 곳이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과였다.

그래도 이름 있는 대학에 입학했건만 내가 느끼던 싫증은 누그러질 줄을 몰랐다. 진로 탐색이나 공부는 됐고, 그저 무엇이든 가급적 신랄한 표현을 써가며 비아냥대고 싶을 뿐이었다. 가령 나는 수업 시간에 어떤 권위 있는 사람의 이론이나 학설을 접한다 해도 허점을 찾는 데에 혈안이었다. 잘 되든 안 되든 말이다. 그게 곧 공부가 되는 줄도 모르고 그랬다. 사람 일이 그렇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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