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수능과 사춘기

이때야 말로 내 삶에 가장 코미디스러운 시기가 아니었을까

가까운 듯 먼 이름, 고모라는 이름의 거울


아들아, 너에게는 두 명의 고모와 한 명의 외삼촌이 있지. 외삼촌이야 워낙 가까이 살고 자주 어울리니 너에게 친숙하겠지만, 고모들과는 조금 데면데면한 사이일 거야. 사실 고백하자면 아빠도 고모들과는 그리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단다. 특히 네 작은 고모와는 어릴 때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며 싸우기 바빴어. 고모의 관심을 끌려고 했던 것도 있는데 첫 번째는 선을 몰랐고, 두 번째는 한창 예민한 사춘기 소녀였던 고모에게 그게 참 성가시고 철없는 행동이었던 모양이야. 또 큰 고모는 아빠와 나이 차이가 꽤 나서, 어린 남동생의 일에는 별 관심이 없는 줄로만 알았지.


그래서 아빠는 꽤 오랫동안 고모들이 내 삶에 별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믿고 살았단다. 하지만 마흔이 되어 이빠 삶의 궤적을 찬찬히 톺아보니, 가치관과 취향, 그리고 사상의 뿌리는 온통 고모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 좋든 싫든 가족이란 이렇게 서로서로 삶의 궤적에 지울 수 없는 자국을 남기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보다. 그땐 서로 남보다 못한 것처럼 싸우고 지지고 볶아도, 결국 우리는 서로의 색깔을 물들이며 한 지붕 아래에서 자라났던 거지.


앞서 말한 것처럼 네 할아버지는 아빠와 고모들에게 아주 엄격한 통제와 직업적 강요를 하셨어. 특히 고모들이 안정적인 교사가 되기를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지. 하지만 아들아, 물리 법칙에 작용과 반작용이 있듯, 누르는 힘이 강할수록 튀어나가려는 반발력 또한 커지는 법이란다. 우리 집안의 내력인지, 고모들은 남들보다 훨씬 빨리 자신만의 독특한 목표를 세웠어. 큰 고모는 하얀 캔버스 위에 자신의 세계를 그렸고, 작은 고모는 진실을 쫓는 기자의 꿈을 키웠지. 강요된 길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깃발을 꽂으려 했던 그 저항하는 뒷모습들을 보며, 아빠 역시 ‘꿈’이란 건 항상 유니크하고 쉽지 않은 길이라고만 생각했어. 변호사, 교수, 그리고 프로그래머까지. 아빠의 학창 시절은 늘 무언가 열망하는 꿈들로 뜨겁게 달궈져 있었어.


고집이라는 유전자의 대물림


중학교 때 수많은 게임과 문화를 접하면서 아빠의 꿈은 점차 프로그래밍과 스토리 작가 쪽으로 좁혀졌어.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 가르치는 국영수과사 같은 기본 과목들이 얼마나 배우기 싫었는지 모른다. 내 인생에 당장 필요 없는 지식으로 머리를 채우는 게 지독한 시간 낭비처럼 느껴졌거든. “이걸 배워서 어디다 써?”라는 오만한 생각이 아빠를 지배했어. 그래서 할머니와 마찰도 심했단다. “차라리 공고를 가서 실무를 배우게 해 달라”라고 고집을 부렸지만, 결국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지.


뭐 앞서 말했듯이 정말 다행인 선택이었지만 그때는 그걸 몰랐어. 그래서 아빠의 반항심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단다. 참 고집이 센 아이였어. 지금 열한 살인 네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가끔 거울을 보는 것 같아 깜짝 놀랄 때가 있단다. 어쩌면 이건 우리 집안의 피할 수 없는 내력인가 봐. 내 생각이 너무 확고해서 남의 말은 도통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부모님의 말씀보다는 내 멋대로 사는 길을 택했으니까. 너도 벌써 고집이 만만치 않은 걸 보니 내 유전자가 확실히 너에게도 흘러 들어간 것 같구나. 그래도 나는 너보다 훨씬 늦게 고집을 피우기 시작했는데, 넌 벌써부터 이렇게 단단하니 아빠가 가끔은 혀를 내두르게 된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한 동안 공부를 완전히 놓아 버렸단다. 중학교 때 상위권을 유지하던 성적표는 고등학교 첫 시험에서 처참하게 곤두박질쳤지. 게다가 중학교 때 첫사랑에게 차였던 아픈 기억이 아빠를 엉뚱한 방향으로 등을 떠밀었어. “여자애들에게 인기를 얻으려면 공부만 하는 범생이보다는 적당히 노는 당시 말로 ‘날라리’여야 한다”는 어리석은 결론에 도달한 거야. 지금 말로 하면 양아치 정도 되려나? 뭐 그래서 일부러 노는 무리와 어울리며 피우지도 못하는 담배를 입에 물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어. 그때 어떤 드라마에 나온 대사처럼 인생이 쓰면 술이 달고 인생이 달면 술이 쓰다는 허세나 부리면서 말이지. 할머니가 사주신 넉넉했던 교복도 직접 수선집에 맡겨 바지통을 줄이며 어설픈 ‘멋’을 부렸단다. 그렇게 아빠의 좀 어설프고 위태로운 일탈이 시작되었어.


사춘기의 방: CD 굽는 소리와 나만의 우주


지금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이 아빠의 진짜 사춘기였던 것 같아. 2차 성징이 뒤늦게 찾아와 고 1에서 고 2로 넘어갈 때 키가 훌쩍 컸던 것처럼, 마음의 키도 조금씩 자라고 있었지. 지금은 네가 스마트폰 하나로 음악도 듣고 영상도 보지만, 그때는 CD 플레이어가 없으면 음악을 들을 수 없었단다. 저작권 개념이 희미하던 시절이라 인터넷에서 쉽게 MP3 파일을 다운로드 받아 CD-Writer로 ‘구워야’ 했지. CD는 보통 굽는다(Burn)는 표현을 쓰는데, 왜 그런지 궁금하면 검색을 해보렴. 하여튼 당시에 이 장비를 가진 친구가 많지 않아서, 아빠는 친구들에게 공 CD를 받아 플레이리스트를 구워주며 돈을 받는 일종의 장사도 했었단다.


점심시간이면 밥을 먹자마자 교실로 달려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책상에 엎드려 있었단다. 시끄러운 교실 소음을 벗어나 CD 속 음악이 만들어주는 나만의 무대로 도망치는 그 시간이 아빠에겐 유일한 안식처였어. 그 세계 안에서 아빠는 더 이상 성적 때문에 고민하는 고등학생이 아니라, 가끔은 락커였고 미래의 멋진 개발자이자 세상을 바꿀 혁명가로 상상하곤 했단다.


그때 아빠는 대중가요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주로 Rock 같은 시대 비판적인 음악과 팝에 심취했지. Queen의 프레디머큐리를 보며 무대를 누비는 상상을 했고, Led Zeppelin의 지미페이지의 기타를 쳐보는 상상을 했지. Skidrow나 Bon Jovi 같은 화려한 LA Rock에서 주다스프리스의 페인킬러까지 좀 대중없이 파고들었단다. 거친 일렉 기타 사운드가 귀를 때릴 때면, 학교라는 감옥에서 해방되는 기분이었어. 그 음악들은 아빠에게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꽉 막힌 현실을 버티게 해주는 산소호흡기였단다.


디지털 연결의 설렘과 0과 1의 우정


그 무렵, 아빠는 진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인연들을 만났어. 마침 휴대폰이 보급되고 집집마다 ISDN 인터넷 전용망이 깔리던 시기였지. 지금은 카카오톡으로 무료 메시지를 보내는 게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때는 한 달에 보낼 수 있는 문자 개수가 정해져 있어서 한 자 한 자 아껴가며 문자를 보냈단다. 그러다 컴퓨터로 문자를 무료로 보낼 수 있는 ‘네이트온’ 메신저가 나오면서 우리들의 대화는 밤낮없이 이어졌지. 그때는 네이트온이 고등학생 원탑, MSN 메신저가 대학생 원탑이었어.


스타크래프트 배틀넷에 접속하기 위해 수도 없이 엔터를 치고, 워키토키 같은 헤드셋을 사서 친구들과 목소리를 나누던 그 밤들. 지직거리는 마이크 소리 너머로 들려오던 친구들의 웃음소리. 그때 느꼈던 연결의 설렘은 지금의 초고속 모바일 시대보다 훨씬 거칠었지만 좀 더 원초적이었어. 학교에서는 말 한마디 안 섞던 친구들도 모니터 앞에서는 세상 제일가는 단짝이 되곤 했지. 아빠는 그 디지털의 파도 속에서 비로소 고립된 섬이 아닌, 연결된 대륙의 일부라는 감각을 익혔단다.


스스로의 경제활동과 조그만 독립의 시작


부모님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싶어 소소한 아르바이트도 시작했어. 아까 말한 것처럼 CD를 구워서 팔기도 하고 학교에 근로 장학생을 신청해 소소하게 용돈을 벌었지. 근로 장학생은 제법 오래 했어. 조금씩 하고 싶은 게 더 생겨서 더 큰돈을 벌어보려 새벽 신문 배달에 도전해서 오토바이도 타보곤 했는데. 하지만 한 달 만에 지독한 잠을 이기지 못해 포기하고 말았지. 그 외에 컴퓨터 조립 알바도 했었고 여러 가지 했었어.


그때는 내가 정말 다 컸다고 생각했어. 부모님이 없어도 이 거친 세상에서 홀로 당당히 살아갈 수 있을 거라 믿었지. 집에 오면 부모님과 대화하기보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컴퓨터 앞에 앉았어. 메신저 속 친구들과 밤새 수다를 떨며 부모님이 모르는 나만의 성벽을 쌓는 게 일상이었어. 앞으로 너도 비슷한 길을 걸을 것을 생각하니 가끔은 헛웃음도 나오고 널 어떻게 대해야 할지 걱정도 된다.


망우리 공동묘지의 밤: 비릿한 야채 곱창과 소주 한 잔


초등학교 시절, 홀로 버스를 타며 창밖을 보던 그 ‘망우리 고개’는 어느덧 고등학생이 된 아빠와 친구들의 비밀 은신처가 되었단다. 우림 시장에서 1인분에 몇 천 원 하던 야채 곱창 한 봉지와 소주 몇 병을 챙겨 용마 공원에 오르던 그 밤들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해. 어른들의 눈을 피해 놀이터나 공원에서 자리를 잡고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막차가 끊기곤 했지.


그러면 그 어둡고 서늘한 망우리 길을 겁도 없이 걸어 내려왔어. 거기가 사실은 무덤이 엄청 많은 공동묘지였는데도 말이야. 가끔은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서늘한 기분이 들었지만, 취기에 노래를 부르며 걷는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 무서울 게 없었단다. 그냥 자연 노래방이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내 목소리를 들었던 사람들은 무서웠을 것 같구나. 때로는 친구네 집 옥상에서 차가운 밤이슬을 맞으며 술을 마시다 잠들기도 했지. 아마 고등학교 1학년은 그렇게 노는 데 온 정신을 다 팔았던 것 같아.


학교가 끝나면 정문에서 친구들을 만나 노래방, PC방, 당구장을 전전했단다. 1,000원이면 떡볶이에 순대, 간까지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그 시절. 금란교회 뒤편의 떡볶이 거리는 우리들의 천국이자 해방구였어. 2학년 때는 집안 사정으로 자취를 하던 친구네 집에서 종일 만화책을 보며 뒹굴기도 했지. 이렇게 적고 나니 아빠가 공부는 안 하고 놀기만 한 것 같지만, 아빠는 그 놀이의 중심에 항상 ‘컴퓨터’라는 확실한 닻을 내리고 있었단다.


나모 웹 에디터와 제로보드: 인터넷 야생에서의 학습


큰 고모 덕분에 일찍 접한 인터넷은 아빠의 운명을 정해주었어. 오프라인에서는 친구들과 거리를 누볐지만, 온라인에서는 프리챌이나 다모임 같은 커뮤니티에서 밤을 새웠단다. 처음엔 단순히 HTML 코딩을 배우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점차 서버와 개발의 영역으로 눈을 돌렸어. 지금이야 수많은 언어와 포지션이 있었지만 그때는 비교적 많지 않았어 보통 웹은 ASP, PHP, JSP가 주류였어. 아빠는 PHP와 MySQL을 독학하며 내 인생 첫 Hello World! 를 쳐봤단다.


메모장에 코드를 한 줄씩 입력하고 웹 브라우저를 새로고침했을 때, 내가 의도한 대로 화면이 변하던 그 첫 전율을 아빠는 잊지 못해. 아빠가 온라인에서 함께하던 게임 길드 홈페이지를 직접 구축해 주고, ‘제로보드’라는 툴을 이용해 홈페이지 제작 외주를 받아 용돈을 벌기도 했지. 이렇게 커뮤니티 생활도 하며 인터넷에서 다양한 정보를 얻은 걸 또 잘난 척을 하다 보니 친구들이 아빠를 ‘백과사전’이라 부르며 조롱하기도 하고, 때론 존중해주기도 했었단다.


당시 10대들의 독립 공간이었던 ‘아이두’라는 사이트 운영진에 지원할까 고민하다가, 여러 여건 때문에 포기하며 아쉬워했던 기억도 난다. F.I.D나 이모션 같은 당대 최고의 웹 에이전시에 들어가고 싶어 밤을 새워 포트폴리오를 다듬었던 것도 생각이나. 지금은 표준에 맞춰 웹 애니메이션을 만들지만, 그땐 ‘플래시(Flash)’라는 툴로 화려한 영상들을 무작정 찍어내던 시대였지. 아빠도 플래시를 공부해 조잡하지만 움직이는 메뉴를 만들며 즐거워했단다.


인터넷 버블이 한창이던 시절이라 세상이 온통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혁명처럼 보였어. 학교에서 낡은 국영수과사만 배우는 내가 시대의 흐름에서 뒤떨어지는 느낌마저 받았었지. 서점에서 국어 참고서 대신 ‘Information Architecture’나 ‘Context Design’ 같은 원서 수준의 책들을 사서 읽다가 할머니께 등짝 스매싱을 맞기도 했어. 고등학교 2학년, 아빠는 그렇게 학교 담장 밖의 거대한 디지털 대륙을 탐험하며 가장 행복하고 뜨거운 시간을 보냈단다.


지독했던 고3, 엉덩이로 버틴 인내의 시간


하지만 현실은 차갑고 냉혹했어. 결국 대학 입시라는 거대한 수능의 벽이 아빠 앞에 우뚝 섰지. 이과를 선택했던 아빠는 2학년 말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무게를 실감했단다. 고3 첫 모의고사 날을 아빠는 잊지 못해. 문제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딱딱한 교실 의자에 오래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어. 시험 시간 내내 엉덩이가 너무 아파 집중할 수가 없었지. 결국 첫 모의고사에서 아빠는 100점대라는, 가히 충격적인 성적표를 받았단다. 할머니와 고모들도 큰 충격에 빠졌고, 아빠 역시 뒤통수를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어.


그때부터 아빠의 ‘특훈’이 시작되었어. 공부의 기본은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라는 걸 그때 배웠단다. 언어 120분, 수리 80분, 과탐 사탐 120분, 외국어 80분 그 긴 시간을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연습부터 했어. 다행히 어릴 때부터 그래도 쪼오끔 책은 읽어봤던 덕에 글 읽는 속도는 빨라서 언어 성적은 금방 올랐지만, 수학은 그야말로 재앙이었단다. 1페이지부터 다시 풀어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 결국 네 할머니 친구의 아들이 선생님이 되어 아빠의 수학 과외를 해주었단다. 그 형의 끈질긴 지도 덕분에 아빠의 수학 점수는 기적처럼 오를 수 있었어.


고1, 2 때 함께 바보같이 웃고 떠들던 친구들도 모두 입시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 엄숙해졌어. 아빠는 컴퓨터 공학과에 가겠다는 목표 하나로 모든 알바와 취미 활동을 접었단다. 아침 7시 등교부터 새벽 1시 독서실 퇴근까지,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굴레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었어. 매일 밤 자기 전, 아빠는 간절히 기도했단다. “눈을 떴을 때 만화처럼 ‘1년 후’라는 자막이 나오고, 책장에는 대학 입학증명서가 꽂혀 있게 해 주세요.” 그 지독한 고립과 육체적 고통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야.


너의 오늘이 내일의 밑거름이 되길


그래도 그 간절한 기도는 정말로 현실이 되었단다. 1년 뒤, 아빠는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의 교정을 밟게 되었지. 비록 목표했던 아니었고 턱걸이 수준으로 겨우 들어왔지만 그래도 1년간 바짝 공부한 것 치고는 뭐 나쁘지 않았던 결과였다고 생각해. 수능이 끝나고 아직도 친구들과 술집에서 사진 찍고 마무리를 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그리고 그날 우연히 만난 고등학교 선생님이 우리에게 술을 사줬던 것도 기억이 나고. 이렇게 고등학교 생활을 마무리했단다.


지금 이렇게 글로 적으니 뭔가 재미있어 보이고 그렇지만 그냥 평범했던 생활이었다고 생각해. 그래도 그때만큼은 조금은 서툰 방황과 뜨거운 몰입, 그리고 지독한 인내의 조각들이 뒤섞여 있었단다. 그때 아빠가 그토록 원했던 ‘1년 후’가 지금의 아빠를 만들었듯이, 너의 오늘 또한 언젠가 네가 꿈꾸는 내일의 단단한 밑거름이 될 거라 믿어. 그리고 너도 아빠 못지않게 더 즐거운 고등학생 시절을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단다.


네가 지금 부리는 고집이, 네가 지금 느끼는 그 막막함이 언젠가는 너만의 멋진 엔진이 될 거야. 아빠가 망우리 고개를 넘어 대학으로 향했듯이, 너도 너만의 고개를 멋지게 넘어설 수 있을 거야. 아빠가 항상 네 뒤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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