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생활을 지나 이름 없는 전장에서 배운 생존의 기술
아들아, 아빠가 IT라는 길을 선택했을 때 마음속에 품었던 목표는 생각보다 단순했단다. 거창한 기술의 혁신이나 인류의 진보따위는 뭐 다른 사람이 열심히 생각할 문제였고 아빠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건 딱 두 가지였지. 하나는 ‘병역 특례(산업기능요원)’를 받아 군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든 이 바닥에서 크게 한탕 해서 ‘부자’가 되는 것이었어.
당시 대한민국은 1차 IT 붐의 막바지 열기가 채 식지 않았던 시기였단다.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아빠는 전공 서적을 뒤적이기보다 어떻게든 실무 현장에 발을 들이려 애를 썼어. 운 좋게도 그때는 아빠 같은 생각을 가진 ‘어린 개발자’들이 넘쳐났고 기업들도 어느 정도 실력만 있다면 학부생이라도 인턴이나 아르바이트 형태로 채용하는 분위기였지. 학교라는 울타리는 아빠에게 너무 좁게 느껴졌어. 아빠는 강의실 창밖을 보며 늘 생각했단다. 저 담장 너머 진짜 전쟁터에서 내 가치를 증명하고 싶다고 말이야.
그렇게 시작한 첫 사회생활은 이른바 웹 에이전시라는 회사에서 홈페이지 제작 서비스였단다. 당시엔 동네 교회부터 작은 식당까지 홈페이지 하나 쯤은 있어야 한다는 붐이 일었어. 아빠는 어느 작은 개발사에서 밤에는 개발자 직원으로 일하고 주말에는 전국의 교회를 돌며 영업을 뛰었지. 장로님들과 목사님들을 찾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온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서는 온라인 성전이 필요합니다"라며 침을 튀겨가며 수주를 따냈단다.
수주 금액은 건당 100만 원에서 200만 원 남짓이었는데 계약서에 도장이 찍히면 홈페이지 빌더를 돌려 붕어빵 찍어내듯 사이트를 만들어냈어. 그때 아빠는 단순한 개발자만 하는게 아니라 비즈니스의 야생을 경험하는 영업사원도 겸했단다. 당시 대표님은 어린 아빠가 제법 영특하게 계약을 따오자 인센티브라는 달콤한 당근을 주었어. 주머니에 만 원짜리 몇 장이 더 꽂힐 때마다 아빠는 내가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어.
하지만 그 달콤함이 아빠의 눈을 가렸단다. 아빠의 원래 목표였던 병역 특례를 받기 위해서는 더 깊이 있는 알고리즘 공부와 실력 쌓기가 필수였는데 당장 눈앞의 영업 인센티브와 현장의 재미에 취해 자기 수련의 시간을 놓쳐버린 거야. 돈과 실력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아빠의 스무 살은 그렇게 애매하게 흘러갔단다.
결국 병역 특례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어. 그 바닥의 생리를 알게 될수록 아빠는 깊은 회의감에 빠졌단다. 당시 병역 특례 자리는 일종의 ‘카르텔’이 있었어. 대표의 지인이나 아는 사람끼리 서로를 품앗이하듯 채용해 군 면제를 시켜주는 비리가 많았고 설상가상으로 솔직히 실력만으로도 병특이라는 벽을 뚫기에는 그 문턱이 너무나 높았단다. 무엇보다 아빠를 좌절시킨 건 현실적인 ‘돈’ 문제였어. 병역 특례로 일하는 요원들의 급여는 일반 사원보다 훨씬 적었어. 하지만 사회에서 생활하는 비용은 일반인과 똑같았지. 월급은 쥐꼬리만한데 밥 먹고 뭐하면 남는 게 없었어. "이 고생을 3년이나 하느니 차라리 매도 빨리 맞는 게 낫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단다.
그렇게 아빠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맘 편히 군대로 떠나버렸어.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실패가 아빠를 창업이라는 더 거대한 바다로 이끌었단다.
아빠는 내 인생의 숫자를 계산해본 적이 있었어. 사회에서 처음 받아봤던 급여 명세서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거든.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 그리고 매년 10~15% 정도의 인상률. 그것을 30년 치로 환산해 엑셀 표를 그려보았더니 아빠의 미래가 너무나 정직하게 그려지더구나. 그 숫자는 결코 아빠가 꿈꾸던 부자의 삶을 보장해주지 못했어. 정해진 월급만으로는 집 한 채 사고, 가정을 꾸리고, 나중에 네가 하고 싶은 걸 다 해줄 수 있는 아빠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지. 당시 개발자 대우가 지금처럼 좋지 않았던 탓도 있었지만 아빠는 그때 깨달았단다.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노동의 대가만으로 사는 삶은 결코 자본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야.
군대에 다녀온 뒤 아빠는 세상의 변화를 목격했어. 군대에 있는 동안 아빠가 모시던 교회 영업 사장님은 제법 큰 중견 기업의 대표가 되어 있었고 과거 옥션이나 싸이월드같은 케이스를 비롯해 미국에서는 구글과 페이스북이 세상을 집어삼키고 있었어. ‘Web 2.0’, ‘UCC’라는 키워드가 강물처럼 쏟아졌고 사용자가 직접 콘텐츠를 만드는 시대가 오고 있었단다. 뭐 지금이야 너무 당연하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어.
복학 후 1~2년 정도 연애도 하고 대학 생활을 즐기며 평범한 대기업 취업을 준비해볼까도 생각했어. 하지만 마음속의 조급함이 아빠를 가만히 두지 않았단다. 더 늦으면 이 거대한 파도를 놓칠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고 이미 성공의 가도를 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했었어.
그때의 창업 시장의 분위기는 지금보다 더 불타올랐던 것 같지만 반면에 조금 느슨했던 것 같아. 지금은 수익 모델(BM)이 확실한 걸 넘어 어느정도 매출이나 유의미한 성과가 있어야 투자를 받지만 당시엔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그럴듯한 사업 계획서만 있으면 정부 지원금이나 시드 투자를 받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어. 이른바 ‘정부 지원금 헌터’들이 생겨날 정도로 돈이 풀리던 시기였지.
그리고 보통 저렇게 정부 사업을 마무리하면 이후에 결과를 가지고 평가를 받는데 그 과정도 좀 빡빡하지 않아서 어느정도 시간을 투자해서 백서만 잘 마무리하면 억대 규모의 다음 스텝 정부 지원금도 노려볼 수 있었지. 그래서 아빠도 제법 많은 정부 사업을 하게 되어 지원금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단다. 지원금은 보통 받게 되면 엄격한 관리 감독 하에 정해진 항목에 돈을 써야하지만 그때는 그것도 느슨해서 작정을 하면 현금화 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어. 주변에 그래서 여러 회사를 만든 뒤 정부 지원 사업에 도전해서 2~3개에 선정되면 해당 금액들을 모두 현금화 시키고 하나의 사업 아이템에 몰빵하는 사람도 있었단다. 환수 요건에만 해당하지 않으면 뱉어내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아빠는 운 좋게 실력 있는 기획자와 개발자를 만나 팀을 꾸렸고 선정된 몇 가지 정부지원금과 이후 2차 사업까지 연달아 선정되면서 아빠는 마치 내가 대단한 경영자라도 된 것처럼 우쭐했어. 중간에 작은 시드 투자까지 유치하고 서비스를 런칭하고 운영하기 시작했지. 하지만 3~4년의 피 튀기는 삽질 끝에 돌아온 건 쓰디쓴 ‘실패’라는 낙인뿐이었단다. 뭐 여러가지 원인이 있었단다. 내부 갈등을 해결하지도 못했고 많아지는 팀원을 관리하는 것도 힘에 부쳤지. 이후에 다른 스타트업에 들어가기도 하고 더 많은 경험을 쌓으면서 그런 것들은 사소한 것들이고 아빠가 생각하는 실패의 원인은 몇 가지 정도가 있다고 생각했단다.
첫 번째는 너무 돈만 쫓았기 때문이야. 스타트업에는 반드시 ‘데스밸리’라 불리는 암흑기가 찾아온단다. 자금은 바닥나고 지표는 안 오르고, 팀원들은 지쳐가는 시기지. 이때 돈만을 목적으로 시작한 사람은 가장 먼저 포기를 선언해. 돈을 벌러 왔는데 내 개인 통장의 잔고를 털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본능적으로 방어기제가 작동하거든. "이게 과연 될까?" 하는 의구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 현타라는게 크게 찾아오거든. 물론 돈을 좇는 게 절대 나쁜 것이 아니야. 당연히 고난의 끝에 금전적인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하지. 하지만 그 앞에는 가급적이면 사회의 불편함을 해결하겠다는 ‘소명’이 깔려 있어야 한단다. 그 소명이 있어야만 돈이 없는 순간에도 팀원들의 모티베이션을 유지하며 데스밸리를 건널 수 있거든. 아빠는 그때 소명보다 내 통장 잔고에만 매몰되어 있었어.
두 번째는 겉멋에 취해 있었던 거야. 정부 지원금을 따내고 여기저기서 청년 창업가라고 박수를 쳐주니 아빠가 정말 뭐라도 된 줄 알았어. 강연 제의가 들어오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가 대중 앞에서 마이크를 잡았지. 정작 중요한 건 사무실에서 코드를 한 줄 더 짜고 고객의 목소리를 듣는 것인데 아빠는 지금도 있을 것 같긴한데 창업가들의 비공개 모임 같은 곳이 있었고 거기에 나가 성공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내가 그들과 동급이라는 착각에 빠져 살았어. 진짜 성공한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네트워킹 시간이 아까워 오직 사업에만 몰입하고 와달라고 졸라야만 오는데 아빠는 거꾸로 외적인 화려함에만 신경을 썼던 거야. 내실 없는 나무는 거센 바람 한 번에 뿌리째 뽑혀버리고 말았단다.
세 번째는 결정적인 순간에 용기가 없었단다. 사업을 하다 보면 모든 것을 걸고 방향을 틀어야 하는 ‘피보팅’의 순간이 오거나 혹은 내 사업을 접고라도 유망한 유니콘 기업의 초기 멤버로 합류해야 하는 기회가 오기도 해. 아빠에게도 그런 기회가 있었어. 지금은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거대 유니콘 기업의 초기 멤버 제안을 받았었지. 하지만 아빠는 끝내 내 자존심과 안락함을 버리지 못했어. 모든 것을 던질 용기가 없었던 거야. 비겁하게 현실과 타협하며 어설프게 버티다가 결국 골든타임을 놓치고 말았단다.
아들아, 아빠는 네가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스타트업을 시작하겠다고 하면 도시락을 싸 들고 다니며 말릴 거란다. 아빠처럼 조급함에 밀려 시작하는 창업은 그 대가가 너무나 가혹하기 때문이야. 아빠가 느꼈던 세 가지 뼈저린 후회를 너는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첫 번째 후회는 쉬는 경험의 부재란다. 일을 하는 경험을 말하는게 아니야. 바로 쉬는 경험이 없게 된단다. 아빠는 첫 번째 기업에서 휴가라는 걸 써본 적이 없었어. 나에게 휴가란 게으른 자의 것이었어. 젊었기 때문에 주 6일 매일 10시간 이상 일했단다. 무식한데 신념은 있으니 그냥 몸을 갈아넣은거지. 그러면서 보상에 대한 갈망이 커지고 나중엔 결국 지친단다. 지금도 많은 스타트업은 밤낮 없이 일을 할꺼다. 노래를 부를 때 호흡이 중요하듯 저렇게 밤낮없이 일하려면 쉬는 법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해.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인 회사에 다녀보며 삶과 일의 밸런스를 맞추는 법을 반드시 배우고 그 방법을 알고 나서 스타트업에 가야 너도 오랫동안 풀파워로 노를 저을 수 있단다.
두 번째 후회는 저소득의 늪에 빠진다는 거란다. 이건 아주 차가운 현실이야. 아빠는 첫 단추를 중소기업(스타트업)에서 끼웠어. 시작 연봉이 낮으니 이직을 할 때마다 그 낮은 테이블을 기준으로 협상을 해야 했지. 어차피 전 직장 건강보험료 납입 금액으로 네 직전 연봉은 무조건 알게 되어있어.
때문에 대기업에서 5,000만 원으로 시작한 사람과 스타트업에서 3,000만 원으로 시작한 사람은 5년만 지나도 가질 수 있는 자산과 복지의 격차가 억 단위로 벌어진단다. 그거 말고도 대출 금리, 임직원 혜택, 인적 네트워크 이 모든 것이 첫 직장의 이름표에 따라 결정돼. 아빠는 나중에 대기업으로 이직하며 겨우 이 테이블을 정상화했지만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러니 아들아 처음에는 무조건 규모가 큰 곳에서 네 가치를 높게 측정받고 시작하렴. 그게 네 선택지를 넓혀주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거야.
마지막 후회는 재기의 난이도와 간판의 무게란다. 아빠는 소위 말하는 명문대 출신이 아니었어. 스타트업이 실패하고 다시 취업 시장에 나왔을 때 세상의 시선은 차가웠단다. 어차피 대기업 못 가니까 스타트업에서 대표 놀이 했겠지라는 편견과 싸워야 했어. 다행히 아빠는 실무 레퍼런스가 좋아서 살아남았지만 아빠 주변에는 여전히 저소득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친구들이 많아. 처음부터 좋은 간판을 달고 시작하는 것은 나중에 네가 실패했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주는 가장 안전한 에어백이란다.
아들아. 아빠의 말이 너무 겁을 주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너를 주저앉히려는 게 아니라 네가 더 멀리 더 안전하게 날아가길 바라는 아빠의 마음이란다.
회사를 다니며 사회의 룰을 충분히 배우렴. 대기업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돈의 흐름과 조직의 생리를 익히고 네 한계가 어디인지 먼저 확인해보렴. 그러고 나서도 가슴속에 억누를 수 없는 불꽃이 타오른다면 그때 비로소 과감하게 네 사업을 시작해도 늦지 않단다.
다만, 그때가 오면 아빠처럼 겉멋에 취하거나 돈에만 매몰되지 말거라. 네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단단한 소명과,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실력을 갖춘 뒤에 뛰어들렴. 아빠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게. 아빠는 이루지 못한 그 마지막 ‘용기’만큼은 꼭 네가 가졌으면 좋겠다. 네 인생의 주인이 되어 모든 것을 걸고 도전해볼 줄 아는 세상에서 가장 용기 있는 남자가 되길 이 아빠는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