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군지 알 수 있을 때 타인 또한 알 수 있음을.
사랑하는 아들아, 아빠가 결혼을 하고 나서 내 삶은 마치 폭주 기관차처럼 숨 가쁘게 달려왔단다. 너라는 기적이 내 품에 안겼고, 처가라는 새롭고 낯선 세계와도 인연을 맺게 되었지. 새로운 삶의 방식에 적응하고, 서툰 아빠 노릇 그리고 남편 노릇을 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눈을 뜨면 하루가 시작되었고, 눈을 감으면 다시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나날들의 연속이었지.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처가의 문화도 익숙해지고, 너도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면서 아빠에게도 조금씩 '빈 시간'이 생기기 시작하더구나. 처음에는 이 낯선 여유가 어색해서 어쩔 줄 몰랐어. '이 시간에 뭘 해야 하지?'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지. 마치 오랫동안 쉼 없이 달려온 마라토너가 갑자기 결승선을 통과한 후 느끼는 묘한 공허함 같았달까.
점점 나에게 주어지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아빠는 깊은 고민에 빠졌단다. 이제는 아빠가 너에게서 어느 정도 '정서적 독립'을 하고, 온전히 나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부모가 자식에게서 졸업한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때 처음 깨달았지.
돌이켜보면 아빠는 너에게 조금 과하게 의존했던 것 같아. 네가 웃으면 나도 행복했고, 네가 아프면 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으니까. 네 삶이 곧 내 삶이었고, 네 성취가 곧 나의 존재 이유였지. 하지만 아들아, 부모가 자식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는 법이야. 이 시점에 내가 너에게서 제대로 독립하지 못한다면, 나는 아마 평생 너에게 집착하는 '헬리콥터 대디'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어. 내가 그토록 경계했던, 자식의 인생을 휘두르려는 부모의 모습 말이야.
하지만 너에게서 독립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더구나. 결혼 전, 나 혼자일 때의 독립과는 차원이 달랐어. 여전히 내 경제 활동의 대부분은 너를 위해 쓰이고 있고, 내 시간의 중심은 아직도 너에게 맞춰져 있으니까. 물리적 독립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정서적 독립'이라도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지.
가끔은 '굳이 지금 독립을 해야 할까? 그냥 이대로 계속 너의 작은 손을 잡고 살 순 없을까?'라는 나약한 의문이 들기도 했어. 네가 주는 그 무한한 사랑과 행복에 안주하고 싶었거든. 하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어. "만약 내가 이 시점에 너에게 독립하지 못하고 계속 네 손을 잡고 있는다면, 먼 훗날 아빠가 힘없고 늙었을 때, 내가 너에게 바쳤던 그 모든 시간과 헌신을 청구서처럼 너에게 들이밀며 보상받으려 하지 않을까?"
그 상상만으로도 아빠는 소름이 돋았단다. 내 삶의 주체성을 잃고 너에게 기생하는 삶, 그것은 나에게도, 너에게도 비극일 테니까. 그래서 아빠는 과감하게 '너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기로 했어.
독립 준비를 위해 가장 먼저 내가 해야 했던 일은, 나라는 사람이 진짜 독립이 가능한 사람인지, 내면의 상태를 냉정하게 진단하는 것이었어. 아빠는 아주 어릴 적부터 외로움을 참 많이 타는 사람이었단다. 처음에는 누구나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어. 하지만 어른이 되고, 수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깨달았지. 내가 남들보다 유난히 더 외로움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아빠가 젊은 시절 그렇게 수많은 여성을 만나며 방황했던 것도, 그리고 너에게 이토록 깊이 감정을 이입하며 집착했던 것도, 어쩌면 내 안에 깊이 뿌리 박힌 외로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어. 혼자서는 온전할 수 없다는 결핍감이 나를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의존하게 만들었던 거지.
솔직히 고백하자면, 아빠는 조금 우울감을 안고 살았어. 앞서 수없이 이야기했던 자격지심, 관계의 실패 그리고 사회생활의 스트레스 같은 안 좋은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인 결과물이었지. 나는 이 외로움과 우울감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어. 내가 나 스스로 행복하지 않은데 어떻게 너에게서 온전히 독립할 수 있겠니.
처음에는 심리 상담으로 해결해보려 했단다. 우울감이나 외로움 따위는 내 강한 의지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거든. 나는 강한 아빠가 되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몇 번의 상담을 받아도 마음속 깊은 곳의 그림자는 쉽게 사라지지 않더구나. 의지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내 뇌 속 어딘가가 고장 난 느낌이었지.
그래서 아빠는 긴 고민 끝에 병리적인 해결책을 선택했단다. 정신과를 찾아가 약을 먹기 시작했지. 처음에는 거부감이 엄청났어. '내가 정신과 약을 먹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인가?', '나는 겉보기엔 멀쩡하고 행복한데, 약까지 먹어가며 버티는 건 너무 과한 처사가 아닐까?' 하는 걱정과 의심이 끊이지 않았지.
약을 먹는다는 것 자체도 썩 즐거운 경험은 아니었어. 처음에는 속이 메스껍고, 잠이 오거나 멍해지는 부작용 때문에 회사 생활에 지장을 받기도 했단다. '이러다 내가 더 이상해지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약을 끊어버리고 싶은 순간도 많았지. 하지만 아들아, 그건 정신 질환과 약물 치료에 대한 나의 낡은 편견이었을 뿐이야.
꾸준히 약을 먹고 나서, 아빠의 삶은 정말 거짓말처럼 달라지기 시작했어. 늘 나를 짓누르던 무거운 공기가 걷히고, 업무에 대한 집중력도 놀라울 정도로 올라갔지. 무엇보다 감정 기복이 줄어들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훨씬 긍정적으로 바뀌었어.
지금도 아빠는 여전히 약을 먹고 있단다. 오히려 '왜 이렇게 늦게 시작했을까', '조금 더 일찍 용기를 냈더라면, 어릴 적부터 나를 괴롭히던 번뇌와 고통에서 훨씬 빨리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야.
아들아, 네가 어른이 되었을 때는 정신 질환에 대한 인식이 지금보다는 훨씬 좋아졌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네 마음속에 스스로의 의지로 해결되지 않는 앙금이나 그림자가 있다면, 절대 망설이지 말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너 자신을 사랑하고 지키는 가장 용기 있는 행동이란다.
두 번째 삶을 준비하며
정서적 독립을 위한 두 번째 단계로, 아빠는 10년 후의 내 모습을 그려보기 시작했어. '과연 10년 뒤 나는 어떤 모습으로 네 앞에 서 있을까?', '여전히 회사에 목을 매는 월급쟁이로 남아 있을까, 아니면 나만의 꿈을 좇으며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일까?' 아빠는 너에게 단순히 생계를 책임지는 아빠가 아니라, 끊임없이 도전하고 성장하는 '두 번째 삶'을 보여주고 싶었어. 그래서 조금씩 은퇴 이후의 미래를 준비하기 시작했지. 아빠가 선택한 미래의 키워드는 바로 '식량'이란다.
요즘 마트에 가면 신선한 야채와 과일 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걸 볼 수 있지? 기후 위기와 식량 부족 문제는 앞으로 더욱 심각해질 거야. 반면, 아직은 진짜 고기보다 비싼 '대체육'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어. 아빠는 몇 년 뒤에는 대체육 가격이 훨씬 저렴해지고, 오히려 진짜 고기와 신선한 야채가 부유층의 전유물이 되는 시대가 올 거라고 예측했단다.
이런 생각들을 네 엄마와 함께 상의해보니, 엄마도 아빠의 비전에 깊이 공감해주었어. 어느 정도 확신이 든 아빠는 그 길로 나아가기 위해 관련된 진로와 교육, 자격증 등을 알아보기 시작했지. 비록 지금 당장은 돈도 많이 들고 준비할 것도 많아서 현재진행형이지만,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면서 아빠는 잊고 살았던 '설렘'을 다시 느끼게 되었어. 책을 읽고 자료를 조사하며 너에게 "아빠도 이렇게 열심히 공부한다"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리고 또 하나, 아빠는 요즘 AI(인공지능)나 코딩 같은 새로운 기술을 공부하고 있단다. 세상은 내가 살아온 지난 세월보다 앞으로 훨씬 더 빠르고 극적으로 변할 거야. 네가 살아갈 그 급변하는 세상에서, 네가 어떤 질문을 던졌을 때 아빠가 낡은 지식에 갇혀 "라떼는 말이야"만 외치는 꼰대가 되고 싶지는 않았거든.
아빠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네가 미래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을 때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줄 수 있는 '동시대의 지성'을 갖추는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아빠는 10년 뒤에 인생의 레이스에서 한발 물러나 널 구경하는 관찰자가 아니라, 너와 함께 숨 가쁘게 뛰며 가슴 벅찬 도전을 즐기는 '러닝메이트'로 살아가고 싶었단다.
물론 거창한 미래 계획만 세우는 건 아니야. 지금 당장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할 수 있는 소소한 취미들도 배우고 있단다. 건강을 위한 러닝, 콤플렉스였던 악필을 교정하는 연습처럼 큰돈 들이지 않고 꾸준함만 있으면 나를 개선할 수 있는 것들에 도전하고 있지.
솔직히 '지금도 꾸준히 하고 있냐'고 묻는다면, 매일 빼먹지 않고 하는 건 아니야. 하하. 하지만 작심삼일도 열 번 반복하면 한 달이 되듯이, 아빠는 생각날 때마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도하고 있단다. 중요한 건 완벽함이 아니라,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지려는 '태도'니까.
마지막으로 아빠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아빠는 지금 이 글들에서 세상 둘도 없는 좋은 아빠처럼 멋진 말들을 늘어놓았지만, 솔직히 너도 알다시피 아빠가 그렇게 인격적으로 완성된 사람은 아니란다. 화도 잘 내고, 짜증도 많고, 고집은 또 얼마나 센지. 그래서 아빠는 널 심하게 혼내거나, 별일 아닌데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화를 냈을 때, 뒤돌아서서 얼마나 깊은 자책과 반성을 했는지 모른다. 오은영 박사님이 나오는 육아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화면 속 문제 부모들의 모습에서 아빠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가슴을 치곤 했어.
하지만 아들아, 아빠는 이제 그런 부족한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모든 사람에게는 장점과 단점이 있고,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법이지. 어떻게 좋은 면만 부각하며 완벽한 아빠 연기를 하며 살 수 있겠니? 아빠는 '좋은 아빠 콤플렉스'를 내려놓기로 했어. 대신 아빠는 솔직해지기로 했단다. 너에게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라 서툴러"라고 고백하고, 화내지 말아야 했을 때 감정적으로 행동했다면 "아빠가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숨기지 않고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모습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요즘 부쩍 아빠의 사과가 많아졌을 거야.
"아까 네가 잘못한 건 맞지만, 아빠가 너무 감정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과하게 혼낸 것 같구나. 그 부분은 아빠가 정말 미안하다."
"아까 아빠가 짜증 낸 건 네 탓이 아니라, 아빠가 회사 일로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랬어. 아빠의 잘못된 행동이었어. 사과할게."
혼내야 할 행동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훈육하되, 나의 잘못된 태도와 감정 표현에 대해서는 정중하게 사과하는 것. 그것이 너와 나 사이의 신뢰를 회복하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가장 건강한 방식이라고 믿는다.
아들아, 아빠는 앞으로도 완벽한 부모는 되지 못할 거야. 하지만 너에게서 건강하게 독립하고, 내 안의 그림자와 마주하며 약물 치료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도전하는 열정,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아는 정직함을 보여주고 싶단다.
좀 더 나답게, 나를 사랑하며, 나 자신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아빠의 뒷모습이, 너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장 좋은 '반면교사'이자 '나침반'이 되어주길 기대한다. 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지만, 동시에 너와는 다른 독립된 한 인간으로서 내 삶을 멋지게 살아낼 테니, 너도 네 삶의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