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8년 6개월 간의 CJ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제주의 공기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겉으로 보기엔 더 안정적인 궤도에 진입한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여전히 목이 말랐다. 안정된 시스템이 내 마음의 공허함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경력직을 채용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직급을 낮추어 신입으로 입사했다. 경력을 다 인정받지 못한 탓에 받아 든 첫 월급은 예상보다 더 초라했다. 하지만 내게는 월급보다 더 귀한 것이 생겼다. 바로 9시 출근, 6시 퇴근이 보장되는 ‘저녁이 있는 삶’이었다. 지출을 줄이며 안정적인 삶에 적응해가는 동안 내 마음속엔 새로운 갈증이 피어올랐다.
사람 마음이란 얼마나 간사한지 안정적인 삶은 금방 무료함으로 전환되었다. 일은 열심히 했지만 뭔가 삶의 보람이 없었다. 예전 직장에서는 바쁘고 스트레스를 받아서 나를 돌아볼 시간이 부족했다. 그런데 퇴근 후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니까 내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뭔가 삶에 변화를 주고 싶다는 생각에 방법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소모임에서 ‘자기계발 소모임’을 알게 되었다. 그 모임에 가입해서 독서하는 습관을 들였다. 챌린지에 참여하여 하루에 10~20페이지라도 꾸준하게 읽다보니 한 권씩 다 읽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좀 더 생산적인 것을 하고 싶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더라. 하루 하루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그러던 중 인터넷을 하다가 우연히 ‘파랑글방’이라는 이름의 소설쓰기 모임을 알게 되었다. 소설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글쓰기에 대해 조금 더 연습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신청을 했다. 파랑글방 모임은 한달에 두 번씩 격주로 만났다. <소설쓰기의 모든 것>이라는 책을 돌아가며 읽고 2챕터씩 요약해와서 공부하고 문학상 수상집을 분석하여 의견을 나누고 각자 써온 소설을 합평하는 시간을 가졌다. 평생 처음으로 1년 동안의 과정을 꾸준하게 참여했다. 그만큼 글쓰기는 나에게 힐링하는 시간이자 평소 떠올리던 생각들을 표현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2025년에는 일상에 변화를 주고 싶어서 경영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 수업중 재무관리 과목이 있었는데 나이가 지긋하신 교수님께서 첫수업의 과제로 ‘나의 인생로드맵 세우기’를 내주었다. 그 과제를 하면서 내가 정말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돌아보게 되었다. 현재 내 나이를 적고 내가 죽고 싶은 나이 95세를 적었다. 그 위에 내가 경험했던 것과 앞으로 하고 싶은 것들을 적기 시작했다. 나는 먼저 작가로 데뷔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알게 되었는데 내가 쓴 글을 나혼자만 보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재미를 느끼거나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면 기분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형태는 에세이가 되어도 좋고 소설이 되어도 좋았다. 에세이는 나의 솔직한 생각들을 공유할 수 있고 소설은 내가 상상했던 아이디어들을 표현할 수 있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여름부터는 새롭게 글쓰기 모임을 알게 되었다. 나를 찾는 글쓰기, 시화전 등 다양한 프로젝트들에 참여하며 글쓰기를 했다.
덕분에 내가 글쓰기를 정말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과 서로 쓴 글을 읽어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참 즐거웠다. 이곳에는 이미 책을 내서 작가로 데뷔한 사람도 있고 나처럼 작가를 지망하는 사람도 있다. 떠돌이 생활을 끝내고 온 제주에서 이런 동지들을 만나게 될 줄이야. 9 to 6의 평온함 뒤에 찾아온 공허함을 채워주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글쓰기’ 였다. 컴퓨터 코드 대신 내 마음을 문장으로 적어가고, 남이 정해준 목표 대신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쫓는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체스판 위를 무기력하게 움직이는 말이 아니다. 글을 쓰며 내 감정의 밑바닥을 마주하고 기록하는 이 순간, 나는 비로소 내 인생의 조종키를 쥔 진짜 주인이 된다. 궤도를 이탈하는 것은 여전히 두렵지만 나답게 살아가는 기쁨이 그 공포를 이겨내는 힘이 된다. 방치형 RPG의 시대는 끝났다. 나만의 궤도를 스스로 그려나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