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그냥 나답게 살고 싶었어요
취업이 안되는 시점은 찾아오고.. 엄마는 친구분이 하시는 장애인활동보조인 일을 제안했다.
처음엔 그래, 한번 해보자 했지만…
나는 그 일을 하며 ‘멋진 사람’이 되기 보단,
매일 내 존재를 잊고 싶을 정도로 나 자신이 혐오스러워다.
어딘가에 소속된 사람도 아닌, 뭘 잘하는지도 모른 사람.
“~해줘요.”
“~사다줘요.”
그런 부탁을 들을 때마다, 나는 친구가 한 말 처럼 ‘장애인 가정부’가 된 기분이었다.
어느 날, 어떤 장애인의 학부모는 처음에는 자기딸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면서 이렇게 해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교회에 캠프에 가야하니 다음주부터 일해주시면 됩니다.” 라고 말했다. 난 그 말을 믿고, 매일같이 그 동네로 가는 버스를 탔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딸도, 어머니도.
나는 갔다가 돌아오는 시간들을 반복했다.
며칠 뒤, 그 장애인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딸이 시집을 가야하는데.. 요리를 알려주지 않은 선생님 밑에서 우리딸을 맡길수 없다. 그러니 다른 장애인을 찾아라.”
한마디로 어이가 없었다. 반박하려던 순간, 뚝 전화는 끊겼다.
그날 버스 안에서, 내 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분노, 억울함, 모멸감, 열등감 한꺼번에 덮쳐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배우처럼 연기했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바우처 카드를 일부로 ‘잃어버린 척’ 하고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출근하려는데… 바우처 카드를 잊어버렸어요.”
그 순간 나는 활동보조인이 아닌 연기자 권혜린이었다.
팀장이 당황해 묻는다 “어… 어쩌다가 잃어버리신 거예요?”
나는 짜릿했다.
그 일이 직업으로 느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건 내가 사라지고 싶어지는 시간들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나’라는 존재를 점점 잃어버리고 있었다.
결국 사직서를 쓰고, 나는 무계획으로 경춘선을 탔다.
(TMI이지만 나의 MBTI은 INFP다.)
흔히 경춘선 이라고 하면 청평, 가평, 춘천이 많이 떠오르는게 당연하다.
심지어 어르신들, 가족 단위로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노선이다.
난 그중 춘천을 택했다.
지하철에 몸을 실은 채, 창밖을 보면서 사진을 찰칵찰칵 찍으면서 김유정 문학관으로 향했다. .
김유정 작가는 중고등학교 시절 국어시간에 늘 나왔던 우리나라의 근대소설의 거장이면서, 그의 소설 속엔 그 시대의 질감, 삶의 고단함, 농촌의 정서가 스며들어 있고, 그런 글을 쓴 사람이 살았던 공간에 내가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마치.. 혼자서 관람하려던 나에게 문학관에서 일하고 계신 자원봉사자분이 다가왔다.
“혼자 오셨어요?”, “제가 여기서 설명해드려도 괜찮을까요?”
그 한마디에 난 진심으로 고마웠다
“네 부탁드립니다.”
그러면서 자원봉사자분은 김유정 작가님에 대한이야기들을 하시고.. 또한 나한테도 이러한 질문들을 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오시게 된거예요? 혹시 국어국문과 학생이세요?”
나는 웃으면서 이야기 했다. “아니요. 직장 퇴사하고 첫 여행으로 온거예요.” 라고 대답하였다. 자원봉사자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 그러셨구나..” 그리고 시계를 보시더니 “아.. 제가 점심시간이라.. 여기까지만 설명해드려도 될까요?” 라고 말하고 나는 아쉽지만 자원봉사자분을 보내드리고 다시 혼자서 감상하기 시작했다.
정말 보면서.. 아 김유정 작가들의 작품속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문학관으로 나와서, 다음으로 향한 곳은 제이드가든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식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집에서는 식물덕후가 한 분 계신다.
난 솔직히 식물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집에는 식물덕후가 살고 있다. 그분은 바로 아빠.
아빠방에 들어가보면 거의 아빠표 작은 식물원이 있고, 베란다에는 난초들이 엄청많이 있다.
이렇게 식물에 대한 관심없는 내가 제이드가든에 발을 디딘 순간에는..
여기는 나만 알고 싶은 조용한 섬 같은 존재였다.
걷고, 쉬고, 식물들을 바라보고, 혼자서 밥먹으면서
처음으로 진짜 버킷리스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내 삶에 대한 정의는 어떤 역할이 있어야하는줄 알았다.
학생, 취업준비생, 활동보조인…
하지만 지금 나는 아무것도 아닌 채, 그냥 나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이거 그 자체로 너무나도 소중한 일이자 감격스러운 일.
그래서 나의 버킷리스트는…?
나의 버킷리스트 첫번째는 한국어교사다.
갑자기 생각난게 아니다. 오히려 아주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틈틈히 피어오르던 몽글몽글한 꿈.
어릴 적, 내 방엔 지구본과 세계지도, 책장에 책이 있었다.
요즘 아이들 방들은 알록달록한 장난감들이 있었지만, 나는 그 둥글고 복잡한 지구본을 돌리면서 “저기는 어디일까?” 하는 상상을 하던 아이였기 때문이다.
책장 한편에는 서재처럼 책들이 있었고, 나는 나만의 작은 세계여행을 하던 꼬마 콜럼버스였다.
그러던 어느 어린이날때였다. 부모님 손잡고 세계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해서 갔었다.의상도 입어보고, 음식도 먹어보고, 각 나라의 전통놀이를 할 수있다는것에 대한 호기심. 그날의 기억이 성인이 되어서도 아직도 선명해. 지구본 속에서만 보던 나라들이 눈앞에 펼쳐지자, 그야말로 내겐 새로운 세상이 있는 기분이었어.
그뒤로 나는 KPOP를 좋아하게 되고 아이돌그룹들을 좋아하게 되면서 한국문화가 세계로 뻗어가는 엉뚱한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아시아 위주 특히 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 아이돌그룹, 배우들을 좋아했지만..언젠가 이러한 아이돌그룹, 배우들이 전 세계에서 사랑받고 인기를 얻게 될거야 라는 엉뚱한 혼자만의 귀여운 예언처럼 말하고 다녔다.
지금은 그 상상이 현실이 되면서 세계 곳곳에서 한국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제2외국어로 한국어 배우겠다는 국가들이 많이 생겨난게 신기했다.
그 마음이 점점 커지면서 나는 한국어교사가 되기 위해 양성과정을 들을까, 인터넷강의를 들을까 하다가 김포공항 근처에 양성과정 프로그램이 있다고 해서 열심히 공부했다.
힘들기도 했지만, 함께 공부하고 수업듣던 이모님들과 아저씨들이 챙겨주신 간식과 응원은 진짜 힘이 되고 보람이 되었어.. 나 혼자서 한게 아니 였으니까…
결과는..? 아쉽게 시험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이게 끝? 아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니깐..”
내가 가르치고 싶은 언어는 한국어인데.. 단순한 가나다라가 아닌.. 아이돌그룹들이 KPOP라는 장르를 외교하면.. 난 한글을 외교하는 외교관이 되고 싶었다.
한국어교사의 시험에 떨어졌다.
속상하지않으면 하면 그건 미친 사람이고.. 이대로 주저 앉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또다른 버킷리스트 중 하나를 꺼내본다.
바로 ‘유튜브 크리에이터.’
사실.. 크리에이터 역시도 유튜브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새로생긴
직업군인데.. 유튜브에 관련된 책들을 보다보니 그런것들이 있었다.
“유튜브만 하면 세상이 달라질것이다.”
평소에 나는 자존감이 없을뿐더러, 성격들을 바꾸기 위해 여러가지 시도 들을
해온 사람이다.
유튜브를 시작하면 자존감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이어 자연스럽게 여행사 직업훈련받을때 유튜브에서 나온 영상으로
또다른것들을 본것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창직과 나의 운명적인 만남이 아닐까 싶다.
“한국창직협회.”
“창직”
“한국창직협회 이정원 회장.”
대체 ‘창직’이 뭐지? 이정원 회장은 또 누구시지? 내가 아는 회장님은 이재용, 최태원 회장 이신데…
그때부터 난 창직과 창직협회장이신 이정원 회장님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그러던 어느날.. 한국창직협회 측에서 유튜브 원데이클래스를 연다고 공지를 보게 됐고, 바로 신청했다. 그렇게 첫 발을 내딛었다.
이어 소셜크리에이터 창업 & 창직 과정도 개설한다고 했을때 이거다 싶은 마음에, 라디오 사연 보내는 사람처럼 신나는 마음으로 적었던것 같다.
서류에 붙고, 면접이 있다는 메세지를 보고 말에 또 긴장한 나였다.
면접은 늘 ‘나’라는 사람을 무시하고 그랬었지만…
하지만 다행히도 아빠가 도와주셔서 마음이 조금 풀렸다.
면접 당일, 햇살이 쨍쨍했다.
왠지 날씨가 내 편인 것만 같았다.
면접 분위기도 무난했고, 무엇보다 나를 무시하는 면접관은 아무도 없었다.
이게 이렇게나 감동적일수가…
그러고 면접 발표날.. 집중도 안되고.. 불안과 초조감이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그당시에 온 번호로 문자를 보내볼까? 전화를 걸까? 온갖 생각들을 다 하는 나였다.
다행히도 그들이 퇴근하기전 문자를 보내왔다. “면접에 합격이 되었습니다. 교육에 관련된 자세한 사항은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라고 하는 순간 이 한줄에 눈물이 났다.
수업이 시작 전부터 설렘이 엄청났다. 마치 첫 데이트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수업당일, 필기구를 챙기고, 노트북을 챙기고, 집에 나오는데 그 날씨는 너무나도 햇살이 쨍쨍했다. 수업듣는 연령대는 부모님 연배의 이모, 삼촌들, 언니&오빠들, 동생들까지..
수업 내용은 말 그대로 선물세트마냥 유튜브와 더불어서, SNS 마케팅, 블로그 마케팅, 1인기업, 창업, 창직, 뉴스레터(카드뉴스) 제작, 카카오플러스친구 제작, 퍼스널브랜딩들을 배운다고 하니…
그저.. 나에게는 추석선물세트 같은 수업같은것들이 있었다.
벌써부터 기대감은 100%에서 300%로 치솟았다.
어느 날은 수업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해서 조교쌤과 간단한 아이스브레이킹들을 하면서 친해지고,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또한 점심메이트들도 생기고..더 나아가서 동생없는 나에게 여동생이 생김으로 너무나 좋았던 기억이 있었다. 이어 거기서 만난 아저씨들 중 한명은 내 사주도 봐주시고.. 정말 별별 일들이 있었다.
본격적인 수업이야기하면.. 유튜브 기획은 방송작가들이 프로그램들을 기획하기전 단계라고 알려주시고, 편집하는것 배우는것도 난생처음 프리미어 프로는 이름만 들어봤을뿐, 실제로 한 번도 다뤄본 적이 없는 프로그램. 한번은 편집하면서 샘플 동영상 주신 레몬에이드 영상이 내가 만지면 마녀가 만든 레몬에이드가 된 느낌.. 하지만 재미는 있었다.
창직 수업은 영상으로 접했던 내용보다 더 재밌었고, 마케팅은 내가 졸업한 학교에는 마케팅 수업도 없었으나 처음 배우는 내용인데도 재미 있었다.
창업은 좀 딱딱했고, 카드뉴스, 뉴스레터, 1인기업, 퍼스널 브랜딩 수업들은 재미있었다.
수업 중반쯤 되자 여동생 한명이 “언니 회장님이랑 면담하셨어요?”라고 묻는데 나는 “어? 면담 무슨면담? 나는 그런것 안받았는데?”라고 그동생한테 다시 묻자.. 여동생이 “돌아가면서 면담하는데요.. 언니 하셨나 해서요..” 갑자기 면담이라고 하니.. 갑자기 혼나는 것 마냥 무서웠다. 그러자 언니한명이 와서 “나는 했는데.. 혜린아 면담별것 아냐.. 우리 수업시간에 들었던 것 좋았던거, 싫었던거 이야기하면되..”라고 해줘서 좀 안심했다.
실제로 면담가질때 회장님은 나보고 “혜린씨는 성실해서 좋아요.” 라고 칭찬해줘서 마음속에 코끼리 한마리가 칼근무를 춘 기분이었다. 마지막 수업즈음이 되자 발표회를 한다고 해서 분위기는 거의 뭉크가 그린 절규표정이 되었다. 다행히 멘토로 오신 강사님과 공통점이 있어서 그나마 강사님과 티키타카를 했다.
비록 발표회에서 상은 못 받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난 너무나도 많은 걸 얻었다. ‘창직’ 으로 시작해서 퍼스널 브랜딩, 마케팅, 편집, 뉴스레터 제작, 사람들과의 새로운 관계 그 모든 것들이 나에게 새로운 길들을 안내했다.
그리고 이어 심화반까지 들으면서 프리미어 프로 심화학습, 아나운서 출신 강사님의 스피치 수업. 특히 스피치 수업은 내 말버릇, 떨림 같은 약점을 알게 되어 정말 놀라웠다.
이 모든 여정을 통해, 나는 아직 미완성이지만.. ‘내가 만들고 싶은 나’ 라는 사람에 한걸음 더 가까워졌다.
그게 지금까지 내가 얻은 가장 크고 값진 선물이다.
세상 유래 없는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했다.
마치 지구가 감기에 걸린 것처럼,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오프라인들은 하나둘 문을 닫거나 아니면 단축 영업을 했다.
그런 시기에도 나는 뭔가를 해야만 했었다.
서울시 의정모니터, 서울시 시민 인터넷감시단.
비대면이었지만, 내 삶은 멈추지 않았다.
또한 이어서 그 틈을 비집고, 또 다른 배움을 시작했다.
어도비 4대장 이라고 부르는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프리미어 프로’, ‘에프터 이펙트’ 화면 속에서 이미지를 보정 하고, 캐릭터를 만들고, 영상을 편집하고, 모션을 넣는 그 과정들이 내 꿈들을 더 구체적으로 이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마스크를 쓰고 수업을 듣는 건.. 생각보다 힘들었다.
아무래도 이 상황이 익숙하지 않아서겠지만..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감기겠지, 했던 몸살이 나아지지 않자.. 코로나 자가진단키트에 선명하게 두줄로 뜨자.. 진짜 겁이 났다.
뉴스에서는 코로나로 죽은 50대 A씨, 70대 B씨 라는 것이 나올때마다.. 나역시도 나중에 죽은 C씨로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다.
어릴때 다들 걸려본 수두, 눈병, 다래끼, 홍역 나는 단 하나도 안 걸리지않은 어린 시절들을 보냈는데.. 코로나 라는 전염병에서는 주저 앉고 말았다.
게다가 그때는 동계 올림픽 기간, 집에서 선수들을 응원은 커녕 목이 아파서 소리조차 못 내고.. 묵음으로 응원한 내 자신
자가격리를 2~3일도 아니고 일주일.. 너무나 외로웠고.. 힘들었다.
그래도 격리가 끝나자마자..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의정모니터 활동도, 시민 감시단 활동도 열심히 하게 되었다.
의정모니터는 서울시에 이러한것 하면 좋을텐데 라는 제안서를 제출하는 활동이다.
지정과제가 있긴 하지만, 가끔은 자유과제로 아이디어를 내는 기회가 있었다.
운이 좋게도 버스 승강장, 광화문 광장, 비대면 스포츠 등… 여러 아이디어를 제안했던 난 서울시의회에서 상을 받았다.
그날 받은 상장은 내게 ‘나를 더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 증명서’ 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서울시 시민 인터넷 감시단의 경우에는 생각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생생했다고 말하고 싶다. Social media, 유튜브, 포털사이트에 곳곳 숨겨진것들을 보고 얼마나 놀랬는지 모른다.
그래도 열심히 채증한 결과 상*하반기 우수활동가로 뽑혔으나.. 최우수활동가로는 선정이 되지 못했지만, 상하반기 우수 활동가로 선정되면서 나는 나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코로나가 있어도, 난 주저하지 않았다.”
서울시 시민인터넷 감시단 활동이 끝난 뒤, 우연히 비슷한 활동들을 찾아보았다. 그건 바로 여성가족부에서 해마다 운영하는 ‘청소년 유해매체 점검단.’ 익숙한 활동처럼 보여서 고민이 많았지만.. 이미 비슷한 경험이 있기도 했고, 이번엔 괜찮을까 싶은 마음도 들었으며, 그래도 한 번 해봤으니까”라는 이유로 서류를 제출했다.
이어 서류들은 통과가 되었으나, 문제는 면접이긴 한데 사전질문에 대한 준비.. 정말 일일히 질문과 답 동시에 외운다는것은 마치 내가 배우라도 되라는 그말같다.
면접연습들을 거듭할수록 감정은 롤러코스터를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한없이 추락하곤 했다.”이왕 이렇게 된 거, 해보자” 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연습들을 했다.
이어 면접날.. 재택직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영상으로 면접보는데 한명씩 준비하는것 듣는데.. 다들 정말 잘한다 라는 마음으로 들었던것 같다.
그리고 준비한것들을 다말하고 면접들을 끝마쳤다.
아빠는 잘했다, 수고했다고 토닥해주셨다. 그리고 나서 면접발표날 정말 아빠말대로 잘했는지 알았는데.. 오히려 불합격을 줬다.
왜.. 불합격.. 면접연습들을 얼마나 지겹도록 했는데.. 정말 상실감이 크게빠졌다. 이어 몇개월이 지나서야 다시 그센터쪽에서 전화..
퇴사자가 생겨서 대신 일해줄수 있냐고 해서 그냥 이렇게 된거 일이나 해보자 싶어서 했지만.. 막상 나와는 정말 맞지 않은것이 이미 거기에 맞는 규칙대로 해야하는것이 있고 늘 해마다 똑같은 일들을 해야하는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모르고 이 일에 대해서 블로그에 글썼다가 혼난적도..
그만큼.. 왜 내가 일을 하면서 평가받는것도 싫고, 블로그에 글적었다고 혼내야하는지 모른상태로 계속해서 했던것 같다. 일하면서 나는 늘 받아야하는 업무평가서도 싫고, 수습기간이라고 해서 날 평가하는 시스템도 더 싫었다.
결국.. 수습기간은 통과가 되었지만, 계속해서 일한다는게 너무나 괴로웠다.
이러한 와중에 스트레스가 온몸에 퍼질정도로 온몸이 아팠다. 오죽 그랬으면 한번은 일하다가 도저히 아파서 반차를 쓴적이 있었다.
참 웃긴것이 내가 아픈데 이렇게까지 보고해야하나? 싶은것이 그정도로 나는 이러한 회사시스템에 대해서 전혀 맞지않다는것. 그냥 아프면 쉬면 되는데 보고해서 또 그 승인이 떨어질때까지 기다림은 너무나 괴로웠다.
그정도로.. 나에게 있어서 회사 시스템들은 맞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 많은 현실이다.
그래도.. 좋은점들을 이야기는 해봐야지.. 싶은데.. 전혀 그런게 없으니.. 지금 세상하면 왜.. 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