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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지현 Mar 03. 2020

하찮아 보여도 차별입니다

먼지 차별

'먼지'이야기를 하면 걱정부터 되죠?
눈에 딱히 보이진 않지만,
왠지 목도 아프고 눈도 따갑고
우리를 불편하고 아프게 하기 때문인데요,

그 미세먼지만큼이나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게 있습니다.
'먼지 차별'이라 불리는 건데요,
먼지처럼 눈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생활 속에서 흔히 자주 일어나는
다양한 차별들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성별과 나이, 신체조건 등에 대해
무심코 던지는 차별적인 발언 같은 건데요,
그동안 너무 당연하다 생각해서 모르고 지나쳤던 것들,  
그렇게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곳곳에 쌓여 있는 것들이
그냥 방치해 두면 언젠가는 우리를 아프게 하는
먼지 같은 존재라는 뜻에서 '먼지 차별'이라고 한대요.

올해 인권위에 올라온 첫 진정도
바로 이 먼지 차별에 관한 것이었다고 하는데요,
유아용품을 판매하면서 성별로 색깔을 미리 정해 못 박은 것,
그러니까, 생활부터 스포츠 용품까지 모든 걸
여자아이는 분홍색, 남자아이는 파란색으로 정해 놓는 건,
유아에 대한 인권 침해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낸 거죠.

사실, 이런 먼지 같은 차별은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흔히 결정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킬 때 쓰는
'결정 장애'라는 말도 '장애'라는 단어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져올 수 있고요,

남자는 바지, 여자는 치마,
남자는 외향적, 여자는 내향적이고,
지방 출신은 무조건 사투리를 쓴다,
나이를 물으면서 학번을 묻는 것,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고정관념 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간과하고 있는 건데요,

물론, 그런 일상적으로 하는 말과 행동에
'차별'의 의도가 있어서 그런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혹 내가 말해 놓고도 찜찜하고,
누군가의 말이 왠지 모르게 불편하고 무례하게 느껴질 때,
혹시 우리가 누군가에게 그러한 먼지 차별을 한 건 아닌지,
혹은 그런 차별을 당한 건 아닌지,
한 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런 의식적 사고와 행동을
예민하다 유난하다 터부시 하지 않고,
다시금 생각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세대와 인종, 지역과 학벌, 성별 등으로 인한 갈등이 없는
좀 더 건강하고, 모두가 편하고 즐거운
사회로 가는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즈음에서 자기반성을 해 본다.


어머, 남자 간호사분이 계셨네요.

몇 해 전, 위경련과 장염으로 응급실에 방문했을 때, 진통제와 진정제를 주사하겠다며 다가온 남자간호사에게 무심코 던진 말이었는데, 그 간호사 입장에서는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모를 말이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서울말 잘 쓰시네요.

말에는 서울말만 있는 것이 아닌데... 하는 일이 방송인지라, 출연하는 게스트들이 웬일로 말투가 매끄럽거나 사투리를 크게 구사하지 않을 때 칭찬이랍시고 한 말이 참... 부끄럽다.


몇 학번이세요?

나는 빠른 년생이다. 그래서 사회적 나이와 주민등록등본상 나이가 다르다. 사회적 나이가 한 살이 많다는 뜻이다. 그래서 편의상 상대방의 나이를 물을 때 학번으로 묻곤 했는데, 그게 '대학'이라는 고정된 인식의 틀을 깔고 있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집에 애기들이 좋아하겠어요. 

라는 말에 "어, 저희가 아직 아이는 없는데..."라는 대답이 돌아와 당황했던 적이 있다. 무심코 건넨 말에 결혼을 했으니 당연히 아이가 있을 거라는 고정관념이 깔려 있었던 거다. 결혼했지만 아이가 없을 수도 있고, 나이가 있어도 결혼이란 걸 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내뱉은 말들 가운데도, 초미세먼지만큼이나 해로운 말들이 참 많았구나 싶다. 이제 알았으니 앞으로 안 하면 되지,라고 하고 말기엔 이 '차별'이라는 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조심하고 조심해도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도 그러한 차별적인 행동과 말을 피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쓴 김지혜 교수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다양한 층위의 차별을 자행하고 또 당하고 살아가며, 우리가 차별하지 않을 가능성은, 사실 없다고 말한다. 상황에 따라 때로는 차별의 가해자가 됐다가 또 때로는 차별의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하다면 해결방법은 서로가 조심하는 것 밖에는 없다. 사실, 사람 사이에 기본은 존중이다. 높을 '존', 귀중할 '중'.  서로가 높이어 매우 중요하게 대한다면 크고 작은 갈등이 일어날 일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차별과 혐오가 나 보다 못하다는 생각, 내가 위라는 착각, 나와는 다르다는 편견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내 주변에는 별다르게 느낄 사람도 없고 그러니 그냥 편하게 좋은 게 좋은 거다 하면서 살면 되지 않냐고. 하지만 가만히 따져보면 평생을 살면서 나와 같은 부류 즉, 같은 성별과 같은 나이, 같은 계층의 사람만을 만나면서 살아갈 확률은 제로에 가깝고, 그렇다는 건 '좋은 게 좋은 것'인 상황에서 내가 되든 상대방이 되든 어느 쪽은 사소하게라도 참아야 하는 입장이 전제돼야 한다는 말이 된다.  


뭔가를 늘 따지고 생각하고, 고려하는 일은 참 피곤하다. 내가 생각해도 피곤하고, 힘이 든다. 하지만, 그런 피곤이 결국엔 나에게 돌아올 차별과 혐오를 줄이는 일이라 생각하면 좀 피곤해도 되지 않을까. 물론 나의 나의 생각과 행동이 온 지구를 바꾸어 놓을 순 없겠지만, 적어도 내가 살아가는 나의 세상은 바꾸어 놓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조심스럽게 해 본다.


"무의식적이었고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억압에 기여한 행동, 행위, 태도에 대해

사람들과 제도는 책임질 수 있고 책임을 져야 한다.”

여기서 ‘책임’이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했던 행동을

성찰하고 습관과 태도를 바꾸어야 할” 책임을 말한다.


-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중에서


# [매일 씁니다]는 매일 쓰는 방송 원고에 미처 못 다한 이야기를 조금 더 붙여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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