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맛. 언제부턴가 묘한 부정의 의미를 안고 탄생한 말이다. 신조어로 생겨나 이제는 일상 언어가 됐다. 밥은 갓 지어 놓기만 해도 반찬 없이 한 그릇을 비울 수 있을 만큼 생생하고 풍성한 기운의 맛을 안고 있어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음식이자, 쌀 한 톨 키워내느라 들어간 농민의 정성을 생각하면 밥 알 하나도 허투루 할 수 없는 귀한 음식이 밥인데, 돌연 그 밥이, 그 밥의 맛이 폄하되기 시작한 것이다.
가수 크러쉬가 ‘밥맛이야’라는 곡의 가사에 썼다. “넌 딱 밥맛이야. (중략) 재수 없으니까.”라고. 요즘 세대들의 ‘밥맛’은 그렇게 쉽게 한 마디로 풀이하자면 '재수 없다' 정도가 될 것이다.
그 옛날 하루 삼시 세끼 먹는 것조차 어렵던 시절 귀한 대접을 받던 밥은 이제 삼시 세끼 밥만으로는 지겨운 시대가 됐고, 동시에 밥은 만날 먹는 지겹고 시시한 것으로 치부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밥맛이 시시해지자 밥 뒤에 숨겨져 있던 노동과 주체까지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깟 밥하는 일로.
나는 학교 다닐 때부터도 밥을 꼭꼭 챙겨 먹는 아이는 아니었다. 아침은 늘 건너뛰었고, 간식거리와 군것질로 끼니를 대신한 적도 많았다. 사회생활을 하고부터는 저녁은 술과 안주가 대신했다. 그렇게 내가 밖에서 셀프로 끼니를 해결하는 중에도 집에는 언제 먹을지 모르는 식구들을 위한 밥과 국이 늘 전기밥솥과 냄비에 가득 차있었다. 하지만, 그 밥과 국이 어디서 어떻게 비롯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세상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질문조차 필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사이 엄마의 부엌 노동은 삭제되었다.
여자에게 ‘밥을 차리는 노동’은 정말 '밥맛'이다.
그렇게 삭제된 노동은 놀랍게도 나를 통해 다시 부활했다. 결혼을 하고, 밥상을 받는 입장에서 밥상을 차리는 입장으로 자리가 바뀌자 밥하는 일이 내 하루의 절반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몰랐다. 흔히 남자 어른들이 하는 말로, 밥은 밥솥이 하고, 청소는 청소기가 하고, 빨래는 세탁기가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밥솥이 돌아가는 20분, 청소기 돌리는 10분, 세탁기 돌아가는 50분으로 여성의 집안 노동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그때서야 온몸으로 경험했다.
문정희 시인의 말처럼, ‘1분만 눌러도 따끈한 밥이 되는 세상’에서 기계의 단편적인 편리함에 가려져, 여성의 부엌 노동은 역으로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매일 밥 먹자고 하는 일이지만, 돈 버는 유세는 있어도 밥하는 유세는 없고, 가장의 직장일은 고단함으로 위로와 공감을 얻지만, 매일 밥 해대느라 부르터진 손은 전업주부의 안락함으로 가볍게 치부된다. 그렇게 여성에게만 짐 지워지는 밥의 노동과 그 노동의 폄훼를 경험하고 깨달은 순간, 나에게 밥 하는 일은 정말로 ‘밥맛’이 되었다.
언어는 사고를 지배한다고 한다. 물론, 사고가 언어를 지배하기도 한다. 결국, 언어와 사고는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영역이란 말이다. 어느 날 ‘밥’이 ‘밥맛’이란 부정적인 의미로 재인식됐고, 온갖 싫고 터부시하고 시답잖은 일들을 ‘밥맛’으로 표현하면서 우리의 사고는 밥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와 밥과 연결되는 일련의 노동들을 무의식 중에 모두 하찮은 것들이란 인식으로 고착화해 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들이 한 밥, 딸이 놓은 수저와 밑반찬, 남편의 달걀프라이와 내가 끓인 김치찌개로 차려진 저녁밥상. 구성은 단출해도 네 식구가 재미있게 만들고 즐겁게 먹었다.
‘밥맛’이 ‘입맛’이 되는 일
코로나 19를 지나오면서 우리 집에서 부엌은 어느 정도 공동의 공간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밥은 중학교 1학년 아들이 하고, 설거지는 남편, 초등학교 5학년 딸은 막내 찬스로 수저 놓기와 식사 후 식탁 정리를 맡고, 밥을 제외한 음식 만들기는 남편과 내가 함께 했다. 한 사람이 재료를 손질하고 음식을 하면 다른 한 사람은 치우고 닦는 보조 역할로. 그리고 먹고 싶은 메뉴에 따라 그 주방장과 보조의 역할은 그때그때 바뀌었다. 이렇게 온 식구가 부엌을 드나들게 되자, 우선 식사 준비를 하고 정리하는 시간이 줄었고, 한 사람에게 편중되는 수고로 지치거나 짜증을 내는 일도 줄었다.
건강한 사회는 협동과 협력으로 돌아간다. 집안의 일도 마찬가지다. 누구 한 사람의 일방적인 희생이 당연시되는 가정과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다. ‘밥은 여자’로, ‘셰프는 남자’로 성립되는 사회, 음식을 해서 돈을 벌고 명예를 얻는 일은 남자의 일이지만, 가려진 노동은 철저히 여성의 것으로 수렴되는 사회는 건강을 장담할 수 없다.
밥은 평등하다. 누가 하든 공평하게 입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런 밥이 ‘밥맛’이 되지 않고 ‘입맛’이 되려면 밥이 있기까지의 수고를 알아차리는 일, 그 수고를 나누는 일도 공평해야 한다. 함께 먹는 밥이 맛있듯, 함께 짓는 밥이 더 의미 있고, 밥에 투입되는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고, 모두의 수고로 나눌 수 있는 밥상을 만드는 것, 그것이 밥상머리 평등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