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오늘은 참아야지
지금은 보통 혹은 조금 마른 체형이지만 고등학생 때와 20대 초반에는 누구에게나 최소 통통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특히 전성기(?)였던 고3 시절에는 170 초중반 키에 80kg를 훌쩍 넘기는, 확연히 제법 뚱뚱하다고 할 수 있는 신체를 가졌었다. 스무 살이 넘고 나서 75kg 정도로 빠지긴 했지만 여전히 좀 통통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 군대라는 것이 사람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입대하고 6개월 정도 지나서 첫 휴가를 나왔는데 보는 사람마다 왜 이렇게 살이 빠졌냐며 놀라워했다. 당연하지, 75kg가 58kg가 됐으니까. 당최 무슨 이유로 저렇게까지 말도 안 되는 감량이 이뤄졌는지는 아직까지도 정확히는 모른다. 추측하자면 여러 이유가 시너지를 이루지 않았나 싶다. 취사병으로 일하면서 밥보단 잠이 더 절실했고, 계속 불 앞에서 음식 냄새를 맡으니 식욕은 더 떨어졌고, 군인이 됐으니 사회에 있을 때보다 운동량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이 세 가지가 완벽하게 삼박자를 이루는 생활이 지속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살이 빠진 것 같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6개월 만에 20kg 가까이가 빠진 건지는 여전히 신기하다.
전역을 하고 원래의 생활 패턴으로 돌아오며 살이 좀 찌긴 했지만 고작 5~6kg 정도만 돌아오더라. 극단적으로 살을 빼면 체질 자체가 바뀔 수가 있다는 게 진짜였다니. 지금까지도 60대 중반 정도의 몸무게가 유지되고 있다. 그렇게 군대는 그 전의 인생에선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마른 사람’이라는 수식어를 내게 가져다주었다.
게다가, “남자는 군대 가서도 키 큰다”라는 그 속설을 실제로 경험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173.9cm였던 내 키는 훈련소에서 키를 쟀을 때도 정확히 같았다. 그런데 약 1년이 지나고 상병 건강검진 때 키를 쟀더니 176이 됐다. 군대에선 흔한 시스템 오류로 키가 잘못 나왔나 했는데 전역하고 병원에서 다시 쟀더니 그대로였다. 살은 미친 듯이 빠지고 키는 조금 컸더니 전역 직후에는 누가 봐도 깡마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재밌는 것은, 나는 여전히 먹는 것을 너무 좋아하고 식욕이 넘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이제 조금 나이가 들었으니 고등학생 때, 스무 살 때처럼 엄청 많이 먹지는 않지만 여전히 잘 먹고 많이 먹는다. 특히 밤에 라면이 땡기는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재수 없게 들릴 수 있겠지만 체질이 바뀌어 살이 잘 찌지 않다 보니, 오히려 예전보다 더 음식의 종류와 식사 시간을 신경을 안 쓰게 됐다. ‘살찔까 봐’라는 이유로 먹는 것을 피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런데도 절제해야 하는 다른 이유가 생겼다. 이제 건강 때문에, 경제적 이유 때문에 참는다.
아직 너무 어린 나이이긴 하지만 이제 학생도 아니고 슬슬 건강을 생각해야 한다. 당뇨, 소화 불량, 역류성 식도염 등 듣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질병들을 만나기가 싫다. 이제 피부도 예전 같지 않아서 한 번 얼굴에 뭐가 생기면 진짜 잘 안 없어진다. 그리고 돈 한 푼 벌지도 못하고 부모님 돈으로 사는데 온갖 먹고 싶은 걸 다 먹어제끼자니 이것 참 양심에 찔린다.
지금도 라면이 먹고 싶지만 참아야겠다. 계란 하나 깨뜨려 넣고 김치랑 같이 먹은 다음에 밥 말아먹고 싶다. 근데 참을 거다. 나는 라면을 진짜 잘 끓인다. 끓이는 방법도 있다. 먼저 200ml 정도만 물을 적게 냄비에 넣고 끓인 뒤 스프와 면을 넣고 면을 아주아주 짧게, 딱 풀어질 정도로만 익힌 다음에 빼서 그릇에 담는다. 그리곤 냄비에 물을 더 붓고 계란을 넣어 익힌 다음 계란이 다 익으면 아까 빼둔 면에 국물을 붓고 쪽파를 뿌리고 김치를 꺼낸다. 쪽파를 뿌리고 김치를 세팅하는 동안 바삭할 정도로 꼬들했던 면은 최적의 상태로 그릇 안에서 익어간다. 그리고 그걸 김치랑 같이 먹어주면 아주 끝장나는 맛이다. 밥을 안 말 수가 없다 먹고 나면 식욕 너무 돋아서. 근데 오늘은 진짜 안 먹고 잘 거다. 거짓말 절대 아니고 정말, 진짜로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