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기다림이란 끝난 뒤에야 그것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기다림은 끝나기 전에는, 그 자체로는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뭐 긴 기다림이 인내심을 길러줄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사람 나름일 테고. 누구는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더 성격을 버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기다림이 끝나고 기다렸던 그것이 왔는가 혹은 오지 않았는가, 왔다면 어떤 형태로 왔는가 등등을 따져봐야만 그 기다림이 어떤 가치가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늘 마음에 들 수 있을까?
항상 기다리는 쪽이었다. 지금 너를 찾으면 너에겐 부담이 되는 일이겠지, 지금은 나를 볼 정신이 없겠지, 지금은 안되겠지. 기다리고 기다려도 오지 않아서 찾아가면, 열 번 중에 여덟 번 정도는 역시 안되는 일이었다. 지금은 나에게 허락되지 않을 것이라며 늘 다음을 기약했지만 다음 따위는 오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지금만이 반복될 뿐이고, 다음은 죽어도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놈의 '다음'을 기다려왔다.
여러 사정이 있었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그저 내가 너의 사정이 되지 못한 것이다. 그 수많은 사정이 없을 때만 나를 찾은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사정도 없는 아주 짧은 순간. 무료함만이 가득한 그런 순간에만 말이다. 내게는 그 정도만 허락해 준 사람들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기다림의 미학’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좋지 않은 결과가 주는 실망감이 보통 그것을 뒤덮어버리는 것, 그것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