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한 세상에 남겨둔 농담
만화를 본다는 건 나이를 잊는 일이다.
어릴 땐 교과서 밑에 숨겨놓고 읽던 비밀병기였는데,
지금은 스마트폰 속에 있지만 어엿한 취미로서 당당하다.
책장을 넘기던 흑백의 시대가 끝났다.
손끝에 종이 대신 화면이 놓였고,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기던 긴장감은
스크롤 한 번에 풀려버리는 경쾌함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한 칸, 한 칸 내려갈수록 내 생각들이 요동친다는 점에서.
만화 속 세계는 조금 과장되고 황당하다.
주인공은 맞아도 멀쩡하고,
옆집 소년은 매일 우연히 마주친다.
현실에선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
만화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굴러간다.
그 비현실성 덕분에 오히려 현실이 숨을 돌린다.
“저 상황이라면 보험 처리부터 먼저 해야지.”
“저 대사를 내 동료가 했다면 분위기 싸늘해졌을 텐데.”
주인공이 원치 않을 이런 조언과 참견은 넣어두어야 하니까.
어른이 된다는 건 상상력을 줄여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프로젝트, 대출, 검진 결과 같은 단어들이 머릿속을 차지하고,
잡념은 ‘비생산적’이라는 이름으로 밀려났다.
하루 종일 판단과 계산에 매달리다 보면
엉뚱한 상상이 끼어들 틈은 거의 없다.
만화는 그 빈자리를 채워준다.
컷과 컷 사이에서, 내가 접어둔 말풍선이 다시 고개를 든다.
오래 방치된 물건에 불이 들어오듯,
저 멀리 상상이 활짝 불을 켜고 깜빡인다.
그 순간만큼은, 불필요해 보이던 생각들이
나를 가장 인간답게 만든다.
만화는 여전히 감동을 준다.
어릴 때 받았던 단순한 해방감에서
지금은 조금 다른 방식이다.
만화를 읽다 보면, 세상이 아주 진지하게만 굴러가진 않는다는 걸.
삶에도 여백이 있다는 걸.
시시껄렁하게 알려준다.
여전히 만화를 펼친다.
손끝이 종이에서 화면으로 달라졌을 뿐.
생각이 머물 곳이 필요할 때,
나는 언제나 만화 속으로 숨어든다.
상상력의 본사는 아직 폐업하지 않았고,
그 본점은 여전히 만화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