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지 못한 시간에도 바다는 온다
여행은 자꾸만 뒤로 밀려났다. 여름 한가운데 떠날 예정이었으나, 피서철의 인파를 떠올리니 마음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예약창만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다가, 차라리 가을바다가 어울리겠다며 일정을 고쳐 적었다. 달력 위의 날짜는 바뀌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출발선에 머물러 있었다. 떠나고자 했던 이유가 설렘인지, 혹은 단순한 탈출 욕구였는지조차 희미해졌다.
예전의 여행은 훨씬 단순했다. 충동이 스치면 하루 전날에도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일 바다 갈래?”라는 짧은 문장 하나로 모든 것이 결정됐다. 준비물이라 해봤자 웃음과 수다였다. 차 안은 언제나 시끌벅적했다. 연애의 뒷얘기, 직장에서의 푸념, 말끝에 피어오르던 농담들이 서로를 더 가깝게 만들었다. 긴 운전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창밖 풍경이 서서히 바뀌고, 푸른 선이 시선 위로 번져 오를 때, 외침이 터졌다. “바다다.” 그 순간은 목적지에 도착한 증표이자, 우리 젊음의 환호였다.
세월이 흘러 여행의 얼굴은 달라졌다. 충동 대신 계획이 먼저이고, 단순한 설렘보다 변수의 계산이 앞선다. 혹시 모를 가족의 일, 날씨 예보에 나타나는 태풍, 불쑥 끼어드는 현실의 파편들. 다이어리 속 기록은 굵은 느낌표 대신 조심스러운 쉼표로 남는다. 반드시 간다는 확언보다, 갈 수도 있다는 여백이 더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여행은 어느새 확정된 약속이 아니라, 미루어둔 가능성의 형태가 되었다.
떠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망설임이 그 위를 덮을 뿐이다. 여행 준비물은 해마다 늘어나고, 마음은 그 무게만큼 움츠러든다. 예전에는 빈손이어도 괜찮았다. 바다 앞에 서는 순간 모든 게 해소되었으니까. 지금은 출발을 앞두고 오히려 귀찮음이 먼저 찾아온다. 설렘보다 무거운 짐 목록이 떠오르고, 가볍게 떠나던 용기는 점점 기억 속으로만 물러난다. 그렇게 권태라는 이름이 마음에 달라붙는다.
멈춰 선 자리에서 배운 것도 있다. 여행은 떠남에만 있지 않다. 기다림 속에서도 이미 시작된다. 바다를 그리며 창문 너머 하늘빛에 눈길을 주는 순간, 일상은 환기된다. 습관처럼 지나쳤던 풍경이 눈에 들어오고, 평범한 하루가 작은 여행처럼 빛나기 시작한다. 아직 떠나지 않았는데도 바다는 마음속에 찾아와 물결을 일으킨다. 떠나지 못한 시간도 결국 여행의 일부였음을.
가을에는 꼭 바다 앞에 서고 싶다. 오래 미뤄둔 약속을 마침내 지키듯, 파도와 마주 앉아 권태를 내려놓고 싶다. 벤치에 앉아 밀려왔다 사라지는 물결을 바라보다 보면, 돌아오는 길은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여행은 멀리 있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마음을 조금 움직였을 때 이미 시작되는 것. 미뤄진 끝에 만나는 바다는 그래서 더욱 따뜻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