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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이화 Feb 05. 2024

예술의 깊이와 삶의 거리

폴 세잔

폴 세잔


설태수

           

장미 그늘은 살얼음이었다.

그의 화폭에 붙들린 것은 유월에도 얼어버린다.

시간이 통째로 결빙된 생트빅투아르 산은

얼음왕국.

깨진 무지개 빛깔이 사과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은

그의 시선에서 얼음광선이 나왔던 것.

<존재>*로 얼어 있는 산천초목과 나,

살짝 건드려도 즙이 흥건하다.

잎이든 줄기든 나부끼는 대로 흔들리는 대로

붓질 따라 얼음 결 어리는 터치.

평생 식을 수 없는 마음결이었나.

태양광은 빛살마다 서늘히 작용하여

죽음도 그를 녹이지 못했다.

눈빛에 얼어버린 꽃은

영영 시들 수 없다.          

*“<존재>의 수면睡眠은 가없이 비어있거늘”(성찬경 「화형둔주곡」 참고)

-설태수 시집 『금빛 샌드위치』에서



 벚꽃이 한창이다. 딴 세상인 듯 변화를 펼쳐 보인다. 하지만 변화하고 반복하면서 변하지 않는 세계다. 그래서 “지금 이곳에서 다른 세계를, 다른 형상을 발견”(고봉준 해설)하는 예술에 끌린다. 예술은 하룻밤 사이에도 새로운 꽃을 발견한다. 그리고 시는 시답게 그림은 그림답게 발견한 꽃을 묘사한다.  

 시「폴 세잔」은 이러한 예술이 존재의 신비를 드러내고 삶 전반을 투사하는 중요한 모티브가 됨을 알 수 있다. “깨진 무지개 빛깔이 사과를 벗어날 수 없는” 정물화와 “살짝 건드려도 즙이 흥건”한 “생트빅투아르 산”에서 폴 세잔은 자신에게 매혹된 시인에게 모습을 나타낸다. 또한, 화가를 본 시인은 우리에게 전해준다. “잎이든 줄기든 나부끼는 대로” “붓질 따라” “서늘히 작용하여//죽음도” 그를 “녹이지 못”한다, 고. 생즙의 “시간이 통째로 결빙된” 저기에 혹 우리가 있었을까.

 폴 세잔은 엑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작가가 되고 싶어 했으나 화가가 되어 현대회화의 아버지가 되었고, 생트빅투아르산을 80여 점이나 그렸다. 스쳐 지나가는 빛과 색채의 풍경은 동일한 모습이 아니다. 매 순간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을 경험하고 충격을 받아 다시 오지 않을 그 순간을 붙잡는 작업에 몰두한다. 그리고 현상만으로 본질을 드러낼 수 없음을 깨닫고 원근법을 지우고 대상을 단순화시킨다. 빛의 예술로 출발해 대상의 본질을 기하학도형으로 파악하는 현대추상예술로 나아갔다. 

 시인은 “그의 시선에서 얼음광선”을 발견한다. “그의 화폭에 붙들린 것은 유월에도 얼어버린다.”며 화가의 눈빛에 주목했다. 평생 화폭에 매달려 색채와 형태와 구성을 탐구해온 견고하고 명료한 붓질에서 화자가 받은 인상이다. 장미가 빛을 비출 때도 색면이 주는 느낌은 명료해서 차갑게 와 닿는다. 수수께끼 같은 구조로 튀어나올 듯한 사과도 단단하고 냉정한 느낌을 준다. 특히 심장까지 꿰뚫리듯 통째로 얼어붙은 생트빅투아르산의 “산천초목과 나”의 시간들. 화자는 언다는 의미를 계속해서 던진다. 대상을 충분히 알 때까지 혹독한 부동성을 요구하며 그리기를 반복했던 세잔의 정신을 강조하고 있음이다. 이것이 이상적인 화가의 자세라고 한다면 시를 쓰는 일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연은 표면보다 내부에 있으니 완고하게 꿰뚫어 봐야한다. 세잔의 미학은 가시적인 것을 보는 게 아니라, 눈으로 본질을 포착하고 그 내부까지 관통하여 신체성에 다다르고자 하는 것이었다. 대상을 통해 정신으로 나가는 시적 미학과 다를 바 없다. 세잔의 “평생 식을 수 없는 마음결”을 “태양광은 빛살마다 서늘히 작용하여” 저토록 단단한 <존재>로 굳혔다. 시는 어떻게 시선과 형상을 실현해야 “살짝 건드려도 즙이 흥건”하게 살아있는 명시가 될까. 화자는 강렬하고도 순도 높은 그림의 깊이 앞에서 미적 감정의 계기를 넘어-완벽한 틀 같은 현실을 추동하며-예술세계와의 거리를 좁힌다. 

 설태수 시집 『금빛 샌드위치』에는 이처럼 「레이디 가가는」, 「朴古石」등 예술적 시편이 많이 등장한다. 감동적인 언어로 보편적인 삶의 슬픔과 기쁨과 불안과 두려움을 발견해내기도 하지만, 빛의 목소리를 따라 낯선 감각자로서 존재의 수면을 여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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