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용사처럼
형용사처럼
박남희
내 옆을 두리번거렸다
어쩌면 나는 모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구름처럼 웃었다
외투는 계절이 따로 있는 것이라고
꽃보다 먼저 깊이 우거진 그늘을 생각했다
어떤 날은
뿌리를 감싸고 있는 흙처럼
마음이 외따로이 푸석해져
모르게 혼자 달아올랐다
북극성에게 북두칠성이 형용사가 아니듯
모든 건 나침반의 문제가 아니었다
허전한 옆이 문제였다
-박남희 시집 『어쩌다 시간 여행』중
시인은 어쩌다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그가 지향하는 곳은 아토포스다.
아토포스의 정의를 보면 ‘장소 없음’이다. “소크라테스를 사랑하는 자들이/소크라테스에게 붙여준 이름「어쩌다 시간 여행」”이다. 롤랑 바르트는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을” 그렇게 인지한다. 예측할 수 없는, 끊임없는 독창성으로 인해 분류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하며, 장소에 고정되지 않고, 고정되지 않으므로 정체성을 파악할 수 없다는 고봉준 평론가의 해설이다.
시 「형용사처럼」의 그는 아토포스의 주체인지 시를 따라가 본다. 옆을 두리번거렸으나 허전함을 목격하게 된다. 형용사처럼 묘사한다. 형용사란 사물의 성질이나 상태를 나타내는 품사로써 명사를 표현하고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대상에게 활기를 주기도 하지만 꼭 그렇지만 않다. “어쩌면 나는 모자”일지 몰라 구름처럼 웃을 때 모자는 밖을 꾸며준다. 또한, 외투가 겉을 감싸준다면 꽃이나 나무뿌리를 품어주는 그늘과 흙은 안에서 받쳐준다. 하지만 직접 대상을 드러내거나 감싸는 것과 달리 옆이란 위치는 근원적인 것을 지시한다. 구름이나 푸석하다는 표현을 보듯 허전함을 전제한다. “북극성에게 북두칠성이 형용사가 아니듯” 옆에 있는 두 성좌를 각각의 세계로 볼 때, 형용사가 아닌 명사로서 오로지 “혼자”인 본질적이면서도 중요한 것을 가리킨다. 그는 애초에 받쳐줄 옆이 없는 허전한 세계였다. 나침판이 가리키는 위를 향해 앞만 보고 가는 존재자인 것이다.
존재자로서 허전함이 문제인 사랑은 신기루와 같다. 어디서 어떻게 출현할지 모르며 다가가도 알 수 없는 아토포스, 시인에게는 시가 아토포스가 된다. 그들은 주체보다 먼 곳에 있으며 “내가 너에게 가기까지, 네가 내게 오기까지「어쩌다 시간 여행」" 가야 하는 시간 여행이다. 눈은 가능성의 미지에서, 발은 장소 있는 이곳에서 한 쌍이 되어 혼자 가는 것처럼 옆과의 관계 맺기도 이와 다르지 않다. 너와 나의 모자가 낯선 기표처럼 형용사처럼 신비감을 더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