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새들은 왔던 곳으로 날아간다
송영희 시인
어쩌지 못한 마음이 왜 점점 새 한 마리로 날아가게 되었는지, 어쩌다 서녘 구름을 타고 훨훨 우주 바깥으로 날아가길 원했었는지, 어둡고 흐릿한 그곳만, 그곳만 바라보며 종일 노래하게 되었는지, 흰 꽃나무에서만 울고 잎 붉은 다른 나무엔 왜 도무지 옮겨 앉지 못하는지,
배롱나무가 붉게 타오르는 동안
한 나무에 닿고 싶었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서쪽은 아무나 볼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고
그 속에 경계가 있어 우리가 그렇게 적막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그래서 낮과 밤이 있는 것이라고
-송영희 시집 『당신은 여전히 당신』에서
햇살 한 기둥을 적막의 추로 떠받치며 날아가는 새, 날아가는 곳은 어디일까? 그 새를 바라보는 시인, 시인이 동경하는 것은 그곳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관념의 세계는 정신의 구성물로써 그것을 인식할 때만 존재한다. 시인이 지향하는 곳도 결국 당신이라는 장소가 된다.
송영희 시인은 시집의 표제작에서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라고 선언한다. 본질 없는 것이 인간의 본질임을 떠올릴 때 당당하게 당신을 선언하는 것은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삶이라는 십자가를 진 까닭이다. 우리는 자유를 선물 받았다. 아니 선고받은 운명으로 살아간다. 스스로 자화상을 그리고 대답해야 한다. 그러므로 시 <저녁에 새들은 왔던 곳으로 날아간다>에서 보여주듯이 시인으로서 저녁이라는 애틋한 마음의 종점에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쩌지 못하고 나아감을 가진 시적 주체다. 그곳이 어딘지, 무엇이 있는지 저녁에 다다른 후에야 적막한 곳임을 알게 된다. 모든 사물이 희미하게 지워지는 저녁이란 어둡고도 적막하다. 막연함이며 숭고함이기도 하다. 그러나 개와 늑대의 시간처럼 사물을 식별하거나 분간하기 어렵다. 어쩌면 생명이 탄생하는 신비한 곳으로 “그곳만 바라보며 종일 노래”하는 곧 실현될 가까운 장소 같지만, 반대로 시간을 초월한 무한공간일 수도 있다. 화자는 낮과 밤, 붉은 꽃과 흰 꽃의 대비처럼 그 경계에서 돌아와 불을 밝힌다. 사물이 일제히 색과 모양을 드러낸다. 내일이면 또 반복되는, “배롱나무가 붉게 타오르는” 이곳에서 그렇게 종일 노래하며 생이라는 흰 꽃나무를 태우는 것이다.
시인은 자기 세계로 날아가는 새다. 우리가 눈에 부실수록 내 안의 시적 장소는 더 절실해진다. 프로스트가 “가지 않은 길”을 반추하듯이 하루를 돌아봄은 가야 할 세계에 대해 내다봄과 같다. 닿고 싶은 “한 나무”는 어떤 모습일까? 자유롭고 초월적인 장소, 여전히 당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