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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에서는 빨간펜으로 배웠다.

by 권상민

삼성화재를 다닐 때는 보고서 쓰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일단 요약용 한 페이지를 써야 한다.

그 한 페이지 안에 지금 보고하는 사안의 기승전결이 다 써져 있어야 한다.

무엇이 문제이고, 영향도는 어떻고, 그래서 결론은 이렇다라고 작성하는 데 기본적으로 각각 한 문장으로 쓴다.

정확하게 말하면 한 줄 이었다.




30대 초반의 과장급일때,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신 부장님을 만났다.

‘이제 권책임이 보고서 써라’

한 1년 반 쯤 이었던 것 같다.

부장님께 늘 보고서를 먼저 출력해서 가져가면 빨간펜 선생님이 되어 주셨다.

A4용지의 반은 빨간펜이 그어진 듯 한 느낌.

그래도 한 6개월 해 보니, 점점 나아짐이 보이더라.

그리고 다면분석이라는 측면이 삼성에서는 참 중요했다.


‘훅 찌르면 푹 들어가면 안된다’


이런 말씀을 위의 분들이 많이 하셨는데, 어떤 발생가능한 사안에 대해서 앞에서만 보지 말고 측면에서도 뒤에서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어떤 보고를 하러 위에 가는데, 이런 다각도의 측면의 보고를 하지 못하면 바로 위의 분들이 푹 찌르고 그것을 가볍게 방어하지 못하면 안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삼성의 일하는 방식을 몸에 익히고 나서 스타트업을 창업했다.

스타트업 초반에는 다양한 제휴처를 발굴해야 해서 여러 보험회사들과도 일을 많이 했다.

어느 보험회사에서 내가 삼성에서 만들었던 상품을 개발하고 싶다고 의뢰를 주셨다.

일단, 나는 그 회사에서 현황을 알야 하기 때문에 엑셀에 내가 원하는 관점의 정보값들을 다 나열해서 드렸다.

“채워주세요”라고 하면서.


그런데 이게 왠 일!

내가 드린 목록이 100개쯤 되었다고 하면 절반도 안 채워서 답이 돌아왔다.

이런 관점의 데이터는 만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 때 알았다.


생각보다 많은 기업은 단순하게 일 처리를 한다.




어쨋든 치열함의 끝판왕 정도되는 삼성을 다녔던 경험은 이후에도 참 여러곳에서 유용하게 쓰였다.


가끔 내가 일하는 회사 직원들에게 어떤 사안을 조사시킬 때 내가 질문 목록을 준다.

그 사안에 대한 다면분석을 하기 위해서 대략 질문 50개 정도를 적어서 준다.

그럼 조사시간이 꽤 걸리고 직원들이 힘들어 하는 모습이 보인다.


사실, 이런 액션을 자주 하면 안된다고 느낀다.

솔직한 표현으로 하면,

우리 직원들이 삼성직원도 아닌데.

아니 더 솔직하게는 삼성급의 대우를 받는 직원들도 아닌데.

그런데 삼성같이 일 시키면 안되지. 이런 생각이 대표인 나부터 먼저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지금 이 글을 적으면서 이런 생각을 갖는 내가 과연 정상인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레포트를 요청하는 일은 그렇게 자주 있지는 않았다.




회사의 상황이 좀 바뀌어서 이제 새로운 파트너와 치열하게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는 때가 되었다.

오늘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이제 치열하게, 삼성에서 일했던 모습으로, 그리고 스타트업의 창의적으로 일했던 모습을 병합해서 사안을 분석하고 더 나은 대안을 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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