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하시모토에서, 너와 함께.
일본에 살면서 주변 지인들에게 개인 신상에 관한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다. 일본인뿐만 아니라, 내가 만나본 일본에 오래 살고 있는 한국인들도 일본인들과 비슷하게 개인 신상 관련 민감한 질문은 거의 하지 않았다. 이건 우리나라와 다른 일본이라는 나라의 독특한 분위기가 아닌가 싶다. 일본인들은 가까운 지인인데도 불구하고 서로의 집에 초대하는 일이 매우 드문 편이고, 전화번호 정도는 교환할 만한 친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화번호도 모르는 경우도 있으며, 라인(LINE-우리나라에서 카카오톡을 사용하는 것처럼 일본에서는 라인을 주로 사용한다.)으로 주로 연락을 하며, 통상은 이메일로 연락을 하는 게 주를 이루는 거 같다. 이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내가 만난 많은 일본인들이 그랬다.
내가 일본인 지인들에게 전화번호를 교환하자고 하면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라인으로 연락을 하는 게 편하지 않겠냐고 되물었다.(물론 흔쾌히 전화번호를 서로 교환한 적도 있지만, 이는 드문 편이다.) 오히려 가까이 지내자는 의미로 내가 일본인 지인들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본 것이 매우 실례가 된 거 같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무안해서 나 혼자 얼굴을 붉히고는 했다. 전화 한 통이면 간단히 해결될 일도 많은데 굳이 문자 메시지로만 연락을 하려고 하는 이유가 뭘까 싶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심리적인 거리가 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직접 목소리를 듣는 전화 통화보다 문자 메시지는 목소리를 통해 순간순간 변하는 미묘한 감정이 전달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고, 곤란한 질문을 했을 때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 있기도 하며, 상대방 질문에 바로바로 대답을 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나도 문자 메시지가 편할 때가 많다. 그래서 그런지, 요새 전화로 직접 사람과 목소리를 들으면서 통화를 하는 경우가 확실히 줄어들었고 개인적인 일 외에 업무적인 전화는 무료 통화나 무료 문자 메시지가 가능한 라인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었다.
그래서 문득 어느 날 내가 일본인 지인 전화번호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내 휴대폰을 검색해 봤는데, 라인은 등록이 되어있고 비교적 자주 연락을 하는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전화번호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일상의 사소한 일이나 세상 돌아가는 일, 업무에 관한 일에서는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지만 정작 개인 신상에 관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개인정보보호 등이 엄격해지고, 개인정보 유출로 인해 생각지도 못한 피해를 당하는 경우가 많아 전화번호나 주소 같은 것을 매우 친한 사람 이외에는 가르쳐 주지 않는 사회로 변화하는 거 같다. 일본의 이런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서 나도 전화번호를 바로 가르쳐주는 경우가 없어졌다. 개인 신상을 아무에게나 밝히는 것을 꺼리는 것이야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비교적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끼리도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는 일본 사회를 보면서 ‘개인주의’가 우리나라보다 뿌리 깊게 존재한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때가 많았다. 그것이 반드시 좋다고는 할 수 없으나 혼자서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혼자서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거나, 혼자서 술집에서 ‘혼술’을 해도 그다지 이상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모습이 일반적이 일본 사회를 보면서 한편으로 혼자 살기는 편안한 나라구나 싶었다.
한국에 살 때는 어쩌다 갈비나 삼겹살이 먹고 싶어도 혼자서 식당에 들어가 갈비나 삼겹살을 시켜놓고 먹을 자신이 없었고, 카페에 가서 1인용 좌석이 있으면 모르겠지만 4인용 좌석에 혼자 앉아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눈치가 보였으며, 막걸릿집이나 술집에서 파전 같은 걸 혼자 시켜서 술 마시고 있으면 주위에서 ‘사연 있는 사람이구나.’, ‘참 불쌍하구나.’ 하는 시선을 느꼈기 때문에 편하게 앉아 있다 나온 적이 없다.
한국에서도 요새는 코로나 확산과 일본처럼 개인주의가 일반화되고 있어 예전보다야 훨씬 나아졌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혼자서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거나, 차를 마시는 건 눈치가 보이는 게 사실이긴 하다. 일본에서는 들어본 적이 없으나 한국에서 살 때 그다지 친분이 없거나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나는 많이 들었다.
“결혼하셨어요?”
“결혼 왜 안 하세요?”
“몇 살이세요?”
“무슨 일 하세요?”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난감한 질문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결혼’에 관한 질문이었다. 일본에 살기 전에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그러려니 하고 대충 대답을 하거나 얼버무리거나, 굳이 대답을 회피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있는 사실 그대로 대답을 했다. 정말로 내가 결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가 궁금해서 질문을 했다기보다는 딱히 할 질문이 없어서 질문을 한 경우가 많고, 그에 따른 관련 질문을 하지 않고 내 대답이 어떻게 되느냐에 별로 관심이 없으면서 지극히 사적인 내 영역에 아무렇지 않게 들어오려는 경우를 많이 경험했다. 그것이 나쁘다는 생각도 없었고 당연히 결혼을 했을 나이이니 으레 물어보는 것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생각해 봤는가?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난감해하는 상대방 입장에 대해서 말이다.
한국에 있을 때 허리 통증 때문에 치료를 받으러 다니던 병원이 있었다. 허리가 아프니 진료실 침대에 누워서 허리 부위를 원장님에게 보여야 했다. 원장님은 허리에 차가운 젤을 바르고 롤로 내 허리 부위를 이리저리 문지르면서 초음파 화면에 나타나는 부위를 보며 내가 아프다고 하는 곳에 통증 완화 주사를 놓아주기도 했다. 원장님이 남자였는데 나를 두 번 정도 진료한 뒤에 대뜸 이렇게 물었다. 주사기가 허리 통증 부위를 뚫고 들어가 주사액이 주입되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나는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이를 악 물고 참고 있는 와중이었다.
“결혼하셨어요?”
“아니요…… 아, 너무…… 아파요, 아, 윽…….”
“아니, 왜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원장님, 너무 아픈 데요…….”
내가 아프다고 하는 소리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주사 바늘로 허리를 쑤시는 건지 정말 진저리 날 정도로 저릿저릿해서 발가락까지 힘이 뻗치며 얼굴에 피가 몰리는 걸 느끼고 있었다. 원장님은 전혀 개의치 않았고 질문을 계속 이어갔다.
“아니, 사지육신 멀쩡한데 왜 아직 결혼을 안 했어요? 눈이 엄청 높으시구나.”
“네에? 눈이……, 눈이 높은 거 아닌 데요…….”
그리고, 며칠 뒤에 원장님에게 내 휴대폰으로 직접 전화가 왔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내 휴대폰 번호를 원장님에게 개인적으로 알려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있었으니, 내 이름 석 자만 컴퓨터에 입력하면 환자 정보가 나올 테니 내 전화번호를 아는 것이야 일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병원 원장님이 환자에게 전화를 할 일이라면 검사 결과에 대한 통보 정도가 될 텐데, 나는 허리 통증 병원에서 피검사 같은 걸 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장님이 내게 전화할 일이 없었고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내 몸에 무슨 병이라도 있는 건가 잔뜩 겁을 먹고 순식간에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런데, 원장님 입에서 나온 말은 나를 더욱 아연실색하게 했다.
“권 선생님께 딱 맞는 분이 계신데, 소개를 해드리고 싶어서요. 결혼하셔야지요?”
그러면서 원장님 혼자서 껄껄 웃는데, 나는 웃음은커녕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러니까, 나를 두어 번 치료한 병원 원장님이 내가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환자 기록에 나와 있는 내 휴대폰 번호로 전화를 해서 결혼할 사람을 소개해주고 싶은데 괜찮겠냐는 말이었다.
어쩌면, 정말 감사한 일인지도 몰랐다. 결혼 적령기에 있는 사람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주겠다는데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결혼을 하겠다고 결혼정보회사에 몇 백 만원씩 내고도 좋은 사람을 못 만나서 헤매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내게 딱 맞을 거 같은 사람을 알고 있으니 한번 만나보라고 병원 원장님이 직접 전화를 해왔으니 감사한 것이 맞는 것이었다. 감사한 마음이 있는 한편으로, 나는 불편한 마음도 감출 수 없었다.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다고 나와 딱 맞는 사람이 있다는 말도 거슬렸지만, 병원 원장이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환자의 개인정보를 취득하고, 사적으로 연락을 해서 결혼 상대를 소개해주겠다는 것은 이른바 ‘지나친 오지랖’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원장님의 눈에, 나는 아픈 허리 통증을 고쳐야 할 환자라기보다는 하나라도 빨리 치워(?)야 하는 미혼자, 어쩌면 보기도 딱한 ‘노총각’으로 동정을 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동정받고 싶지 않다. 내가 동정을 원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내 힘껏 잘 살려고 갖은 노력을 하며 살고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기는커녕 남을 도와주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서고 있는 나를 왜 함부로 동정하는 것인지, 나는 마음이 상했다. 그렇다고 한국인의 유별난(?) 정이라는 것을 내가 모를 리도 없고, 인연을 만들어주고 싶어 하는 원장님에게 매정하게 이런 전화를 왜 하느냐고 따질 수도 없었다. 나이도 나보다 10살은 더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원장님 생각과 마음을 어쨌든 존중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실은 가까운 시일에 결혼할 사람이 있다고 대답하고, 생각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하며 서둘러 전화를 끊고 그 병원에 다시 가지 않았다.
이런 비슷한 경우를 나는 다른 병원에서도 경험했었다. 이번에는 접수처에서 접수를 받는 분이 직접 전화를 해서 ‘우리 병원 수간호사분이 권 선생님께 어울릴 거 같은 분이 있다면서 소개해드리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내가 그때 한국에서 고등학교 교사라는 신분이기도 했고, 딱 결혼 적령기의 나이였기 때문이었으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병원에서 주로 이런 일을 겪고 나서, 사는 곳과 직장 정보가 고스란히 나오는 환자 정보를 보는 병원 근로자 분들을 약간 경계하게 됐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하지만 그런 일을 겪는 사람은 결코 좋게 만은 생각이 안 되는 것은 내 정보를 사적으로 이용했다는 불쾌함이고, 내가 괜찮다고 말을 해도 나이가 찼으니 결혼을 해야 한다며 가족도 친척도 그렇다고 지인도 아닌 사람들이 강요를 하는 것이다.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에게 맞는 사람이 있다니, 그 말이 가슴에 와닿지도 않았다. 가족이나 친척, 지인이 그런 소리를 해도 상황에 따라서는 상당히 황당하고 불쾌한 일이 될 수도 있는데 말이다.
얼마 전에 유튜브를 통해 희극인 김숙 씨가 사람들 앞에서 강연하는 것을 5분 남짓 본 적이 있다. 몇 년 전에 희극인 윤정수 씨와 가상 결혼 커플로 나와 큰 웃음을 주었고 그때 무척 재미있게 시청한 기억이 있다. 그로 인해 윤정수 씨와 김숙 씨는 내가 좋아하는 희극인이 됐다. 그래서 김숙 씨가 어떤 강연을 했는지 궁금했는데, 이런 말을 했었다. 결혼한 친구들이 김숙 씨에게 왜 결혼을 안 하냐고 물어볼 때가 많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김숙 씨는 이렇게 대답한다고 한다.
“너처럼 안 살려고.”
아주 통쾌하고 기가 막히게 멋진 대답이 아닌가. 어떻게 보면 난감한 상황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김숙 씨는 순발력 있고 재치 있게 그리고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면서 타인이 함부로 자신의 사적 공간을 침범한 무례함을 경계하고, 그런 상대방에게 일침을 날리는 명쾌한 대답을 하면서 내 속이 다 시원했다. 나도 지금까지 숱하게 ‘결혼 왜 안 하냐?’라는 질문을 받았지만, 김숙 씨처럼 대답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그리고 기회가 오면, 김숙 씨처럼 대답을 해야지 하는데 이제는 결혼 적령기가 훨씬 넘어버려서 더 이상 그런 질문 자체를 주변에서 내게 하지 않게 됐으니, 김숙 씨처럼 멋진 대답을 할 기회가 없다.
한국의 내 지인들은 내가 결혼을 안 하면 세상이 둘로 쪼개지는 것처럼 걱정을 할 때가 있었다. 자신들도 결혼해서 지지고 볶고 살면서, 아이 낳고 애들이 속을 썩여 죽을 둥 살 둥 살고 있으면서,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 ‘앗, 뜨거! 앗, 뜨거!’ 하며 뜨거운 맛을 보고 있으면서, 나에게 그런 걸 똑같이 겪어봐야 된다는 것처럼, 내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우리도 이렇게 결혼을 해서 고생을 하고 있는데, 네가 뭐라고 결혼을 안 하고 버티고 있느냐는 얄궂은 심보 같은 마음 말이다. 네가 혼자서 자유롭게 사는 것을 우리는 결코 두고 볼 수가 없다, 너도 결혼해서 아내와 자식들 위해 너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면서 일 하는 기계로, 죽을 고생을 해봐야 한다는 그런 심보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리고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정작 자기들 먹고살기 바쁘고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만으로도 정신없는 사람들이, 무엇보다 내 인생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들도 없으면서 말이다.
나에게 결혼을 하라고 하는 사람들의 결혼 생활을 가만히 들어보면 부부끼리 행복하지 못한 결혼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고, 별거를 하거나 이혼을 한 사람들도 많다. 그러면서도 결혼을 권유하는 것은 무엇일까. 왜 그럴까, 나는 정말 묻고 싶다. 자신이 불행하게 살았으니, 너도 한번 불행하게 살아봐야 한다는 걸까? 나는 불행하게 살았지만, 너는 결혼해서 남들처럼 행복하게 살아보라는 마음일까? 아니면 그 두 마음이 복잡하게 뒤얽혀서 이도 저도 아닌 마음일까? 사람의 심리는 우물처럼 깊고 깊어 그 깊이를 알면 알수록 경이로울 뿐이다.
결혼을 하고 안 하고는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이다. 그건 누가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혼할 나이가 되면 다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것도 지나친 고정관념이고 편견이다. 설혹 인간은 태어나면 반드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자신의 DNA를 후세에 남겨야 한다고 확언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그건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생각일 뿐인 것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라면, 인간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다. 결혼을 하지 않을 선택,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산다고 해도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동거만을 하는 선택,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선택, 낳지 않을 선택, 결혼은 하지 않고 인공수정 등을 통해 아이만 낳아 기를 선택, 미혼모가 되거나 미혼부가 되어 살아갈 선택, 그 모든 것은 본인의 선택이다. 희극인 신동엽 씨가 어느 프로그램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 그저 자신이 선택한 것에 책임을 지고 묵묵히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또한 지지한다. 인생에 정답이 어디 있는가? 그 정답을 아는 사람이 없어서, 정답을 알고 있는 신에게 그토록 의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도 내 인생에 정답을 모른다. 내가 선택한 길에, 책임을 지고 묵묵히 하루하루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살뿐이다. 그것이 잘하는 것인지, 잘못하는 것인지 잘은 모른다.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아니라면 내가 선택한 길을 주저 없이 가고 싶은 것이 내 바람이고 꿈이며 목표이다. 우리는 왜 그렇게 오지랖이 넓어서 다른 사람 인생에 자꾸 참견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아직 20살이 안 된 미성년자에게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지만, 20세가 넘은 성인에게 결혼을 해야 한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야 한다, 인생을 이렇게 저렇게 살아가야 한다, 이런 선택을 해야 한다, 조언이야 할 수 있지만 조언을 위장한 강요를 하는 것은 무례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흔히들 말한다. 친하니까, 우리는 허물없는 사이니까, 그런 말을 주고받아도 될 만큼 가까운 사이이니까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친한 사이일수록 그런 말을 더욱 조심하고 삼가야 한다. 왜냐하면 친하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받는 상처보다 더 큰 상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친하고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 편이라고 생각해서 의지하며 지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듣는 강요나 참견은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되면서 때로는 너무나 큰 흉기가 되어 가슴을 찔러오기 때문이다. 친한 사람들은 전혀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그건 비겁한 변명이다. 상대방이 불편해하는 표정이나 말투를 보고 그만둬야 할 때 멈출 수 있어야 하고 멈춰야 한다. 하지만 대게, 가속 페달을 밟으면 밟을수록 조금 더 속력을 내고 싶은 심리처럼 멈추지 않는다. 조금 더 들어가서 네 마음을 휘저어보겠다는 심리를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두꺼운 심리학 책을 여러 권 읽으면 알 수 있을까? 글쎄, 모르겠다. 심리학 책을 읽을수록 사람 심리를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닌지, 책에 나와 있는 것보다 더 복잡하고 미묘하고 섬세하게 얽히고설켜 있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책보다는 상대방의 입장을 깊이 있게 생각해 보고, 따뜻한 시선으로 응시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냥 가만 바라봐 주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닌가 싶다. 네가 선택한 길을 존중하고, 네가 선택한 삶을 응원한다고, 비록 나와는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지만, 내가 아끼는 네가 걷는 길, 가는 인생, 네가 좋다고 선택한 사람들, 모두를 나는 존중하고 잘 되기만을 바란다고, 그렇게 이야기해주는 것이 어려운 것일까?
관심을 받는 것은 관심을 못 받는 것보다 훨씬 좋은 것이다. 무관심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나친 것은 뭐든 좋지 못하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 코로나로 인해 우리는 ‘사회적 거리’라는 말이 일상화됐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에도 어느 정도의 거리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무관심하라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갖고 따뜻하게 바라보되 상대가 선택한 삶을 마음으로나마 응원하는 것, 그건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드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런 마음가짐 하나면 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외롭다고 했다. 결혼을 했다고 해서 외로움이 없어지는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알콩달콩 사는 것도 물론 훌륭한 인생이다. 더할 나위 없이 부러운 삶이다. 더구나 요새같이 아이를 안 낳는 시대에, 결혼하고 아이까지 많이 낳는다면 그건 정말 국가차원에서 상이라도 줘야 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 상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반대의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 상을 받지는 못할지라도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사정은 정말 당사자가 되어보지 않고는 함부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혼은 정말 하고 싶은데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내가 아는 지인 중에는 결혼하자마자 불행한 일로 인해 배우자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더 이상 결혼은 생각하기도 싫다고 하며 재혼은 생각 안 하고 전보다 더 자유롭게 사는 이도 존재한다.
나는 한번 해보지도 못한 결혼이나 이혼을 벌써 한 두 차례씩 겪고도 다시 결혼하고 이혼하는 삶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고, 그것도 비난할 수 없다. 그건 그 사람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나를 흔들어놓는 사랑하는 사람이 인생에 딱 한 명만 나타나는 사람도 있지만, 결혼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느닷없이 나타나서 생각하지도 못한 인생의 길로 접어드는 사람들도 내 주위에는 있다. 나이 50이 넘어서도 절대 결혼 같은 건 안 한다고 잘난 체를 하며 공공연하게 말을 한 내가 아는 어느 교수는, 52세가 되는 해에 세상에 둘도 없이 멋진 사람을 만나 지금 20 · 30대는 저리 가라라고 깨소금을 볶으며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인생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60세가 넘어서 결혼 생활 30년 넘게 이어온 부부가 지금까지 참고 살았으니 남은 인생도 그럭저럭 참고 지내며 대충 살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참지 않고 이혼을 선택해서 남은 인생만큼은 ‘나’로 살아보자는 사람들도 넘쳐난다. 인생에 ‘절대’라는 것과 ‘반드시’라는 것만 빼면 얼마나 살기 편안해 질까 싶다.
나는 한 공간에 2,000명 정도 있는 직장에서도 나 혼자 있는 것 같은 고독감을 느낀 적이 셀 수도 없이 많다.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어도 그 속에서 혼자인 거 같아 무참한 날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인 것보다는 둘이 낫고, 둘보다는 여럿이 낫다는 말도 있으니 함께 해야 할 때는 또 어울려서 함께하고, 혼자 있어야 할 때는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홀로 땅을 밟고 서 있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따로 또 같이, 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누구의 삶에 함부로 끼어들어 강요하지 말자. 세상을 좀 더 많이 살았다고, 나이가 많다고, 경험이 많다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얕잡아 보고 주제넘은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의 심연(深淵) 어딘가에 누구도 감히 생각하지도 못한 말 못 할 ‘상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처’를 결코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이제 누군가 나에게 ‘결혼 왜 안 하세요?’라고 묻는다면, 나도 희극인 김숙 씨처럼 당당하게 말할 것이다.
“너처럼 안 살려고.” ■
사진제공: H. 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