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

16. 하시모토에서, 너와 함께.

by 권상혁

나는 10살 때 맹장수술을 받았다. 하교 후부터 오른쪽 아랫배가 심하게 아팠다. 학교에서는 말짱하다가 아무도 없는 집에 와서 배가 아프니 아버지가 올 때까지 참는 수밖에 없었다. 저녁도 먹지 못하고 해가 저물 때까지 나는 방에서 끙끙 앓았다. 저녁 7시면 집에 오던 아버지가 그날따라 늦었고,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건 옆집에 가서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휴대폰이 있던 시절이 아니었고 아버지 직장 전화로는 연결이 되지 않았다. 다행히 옆집 아저씨는 퇴근해서 가족들하고 저녁을 먹는 중이었고, 나는 배가 너무 아프다고 도와달라고 말을 했다. 처음에 옆집 아저씨와 아줌마는 단순한 배앓이 정도로만 생각해서 우선은 나를 안으로 들이고 집에 있는 배탈 약을 내게 먹였다. 나 때문에 옆집 사람들이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다들 안절부절못했다. 아저씨는 어떻게든 아버지에게 연락을 하려고 이리저리 전화를 했으나 연결이 되지 않았다. 약을 먹고도 별로 나아지는 것 없이 통증이 더 심해져서 내가 거의 방바닥에 쓰러져있으니, 보리차를 뜨겁게 끓여서 먹여도 보고 설탕물을 먹여도 보면서 아줌마가 애를 많이 썼다. 내가 1시간쯤 지나도 차도를 보이지 않으니 옆집 아저씨가 구급차를 불렀다.

옆집 아저씨와 아줌마가 1시간을 망설였던 것은 아이들이 흔하게 앓는 배앓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있었을 테고, 그 사이 아버지가 올 거라는 믿음도 있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보호자는 아버지였으니, 무엇을 결정하더라도 아버지의 허락이 있어야 할 거 같다는 생각에 발을 동동 굴렀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오지 않았고, 아저씨는 나를 살리고 봐야 하니 구급차를 불렀다. 아저씨가 나와 함께 구급차를 같이 타고 병원으로 이동했다. 아줌마는 옆집 애들을 돌봐야 하니 따라오지 못했고 구급차에 실리는 내 모습을 보며 눈물을 쏟을 것처럼 안타까워했다.

내가 태어나서 그렇게 아팠던 적이 또 있었을까? 참을성 많은 나도, 더 이상 어떻게 견딜 수 없는 통증에 다다르자 악을 쓰다가, 나중에는 소리를 낼 수도 없이 아파서 탈진 상태까지 갔다. 그때 내가 살던 동네에 대학병원이 있었는데,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는 남는 침대가 없어서 다른 병원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소리를 듣고 아저씨가 애가 다 죽게 생겼는데 다른 병원으로 가라니 말이 되느냐, 하고 화를 냈다. 하지만 대학병원 응급실에는 끝내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후의 기억이 없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의식을 잃었다.

눈을 뜨기 전에 웅웅 거리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실눈이 떠졌을 때 눈이 부셔서 다시 눈을 감았다. 사람들이 왔다 갔다 거리고 무슨 말을 주고받는 소리가 뭉쳐서 났다. 눈꺼풀이 너무 무겁고 입이 바짝 말라있어 목이 심하게 탔다. 흠뻑 젖은 솜뭉치가 나를 꾹 누르고 있는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오른쪽 배가 아프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다시 힘을 내서 눈을 떠 보았다. 아까보다는 좀 더 크게 떴지만 그래도 겨우 사물이 보일 정도였을 것이다. 내가 제대로 눈을 뜨고 처음 본 것은 ‘고모’였다.

정신을 차린 내 얼굴에 고모가 바짝 얼굴을 들이댔다. 내가 의식을 회복한 걸 알아차린 고모가 링거가 꼽히지 않은 내 왼쪽 손을 부서져라 붙잡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내 이름을 부르면서 고모가 정말 엉엉 울었다. 고모가 숨이 넘어가게 우니까 나는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나서 눈을 더 크게 떴다. 고모 뒤로는 아버지가 수염이 검게 자란 황망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급성 맹장이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맹장이 터져서 복막염이 됐을 거고 그랬으면 훨씬 위험한 상황이 됐을 거라고 했다. 긴급 수술을 해서 맹장을 제거했고, 당시 아이들이 지하수를 먹고 맹장에 걸린 경우가 꽤 있어서 같은 경우일 거라 들었다. 생각해보니까 목이 말라 학교 수돗가에서 물을 많이 마셨었다.

아버지는 일이 끝나고 회식 자리가 있었던 듯했다. 아버지를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때는 휴대폰이 없는 시절이었고, 아버지가 퇴근 후 동료들과 술 한 잔 할 수도 있는 거였으니 말이다. 나는 워낙 혼자서도 잘 지냈기 때문에 아버지가 어린 나를 믿거니 했던 것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어렸던 그때의 아버지를 생각해보면, 그 힘든 시절 혼자서 나를 맡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막막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집에 오면 먹여야 하고 입혀야 하는 10살짜리 아이가 쑥쑥 크고 있으니 불쑥불쑥 겁도 났을 테고, 아버지 역할에 대해서 누가 제대로 가르쳐주지도 않았을 것이며 아버지도 ‘아버지’라는 입장에 처음 서 봤을 테니 모르는 것이 많았을 것이다.

고모가 코끝이 새빨개지도록 소리 내 운 것은, 내가 아버지를 향해 하지 못한 여러 가지 복잡한 마음을 대신해주기 위한 것 같았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10살짜리 아이를 밤늦게까지 방치한 것, 일이 끝나 늦을 거 같으면 집이든 옆집이든 연락해서 자신의 위치를 알려야 했다는 것, 학교 수돗물을 비롯해서 비위행적인 음식을 먹지 않도록 평소 교육하고 관리를 하지 못한 것, 이유를 갖다 붙이면 수십 가지 있겠지만 고모는 오빠인 아버지를 원망하는 대신 크게 소리 내 우는 것으로 아버지를 꾸짖고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오열하는 고모 뒤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옆집 아저씨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가 ‘수술이 잘 됐다고 하니 이제 안심이다, 다행이다, 잘 견뎌줬다.’라고 했다. 나는 고모가 우는 소리에 내 오른쪽에 아저씨가 서 있는 줄도 몰랐다. 아버지도 있고 고모도 있으니 아저씨는 이제 그만 간다고 하면서 아저씨가 내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주었다. 내가 아저씨에게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했나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아저씨 배웅을 하러 아버지가 따라 나가고, 고모는 양 볼로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을 훔칠 생각도 하지 않고 아프지 않으냐고, 미안하다고, 계속 내게 사과를 했다.


고모가 내게 미안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고모는 내게 계속 미안하다고만 했다. 고모가 미리 챙겼어야 했는데, 어린애들(내 사촌 동생들)하고 먹고 살려다 보니 큰 조카를 챙기지를 못했다고 했다. 나는 집안에서 내 항렬로는 나이가 제일 많았다. 고모도 지방 소읍에서 어렵고 힘들게 살았다. 정확히 언제 고모가 고모부와 헤어졌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고모부가 고모와 사촌 동생들을 놔두고 집을 나간 것만은 알고 있다. 고모는 여자 몸으로 붙잡을 곳이 아무 데도 없는 길을 헤쳐 나가며 사촌 동생 둘을 먹이고 입히며 키웠다. 그런 고모가 조카인 나까지 신경을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내가 맹장 수술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지방에서 서울까지 한달음에 달려와 내 앞에서 정신없이 울고 있는 고모에게 나는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이었다. 고모에게 내가 그만 우시라고, 저 괜찮다고 말을 했지만, 고모는 울음이 잦아들기는 했으나 그치지 않았다.

내가 입원을 하고 있는 동안 고모가 정확히 언제까지 내 곁에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으나, 병원 식사가 부실한 것을 보고 영양이 될 만한 음식들을 밖에서 사 와 내게 먹인 기억이 난다. 나보다 어린 사촌 동생들이 둘이나 고모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고모가 내 곁에 오래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고모가 내 기억 속에 등장하는 것은 초등학교 졸업식이다. 아버지가 일 때문에 지방에 있어 내 초등학교 졸업식에 올 수 없었다. 대신 고모가 지방 소읍에서 사촌 남동생을 데리고 꽃다발을 사서 서울까지 왔다. 고모는, 졸업식 날 아버지도 엄마도 곁에 없는 나를 생각하니 차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고모는 그런 분이다.

나는 엄마에게 졸업식에 참석해 달라고 했지만 일 때문에 어렵다고 해서 아무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다. 엄마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는지 졸업식 끝날 즈음 부랴부랴 나를 보러 왔고, 이미 남남이 된 고모와 엄마가 만났다. 고모는 엄마에게 할 말이 많았겠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나를 봐서 참았을 것이다. 엄마는 옛 시누이인 고모와의 자리가 어색했는지 식사도 먹는 둥 마는 둥 금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우리 집으로 걸어오면서 고모가 한 손에는 내 손을 꼭 잡고 다른 손으로는 사촌 남동생 손을 꼭 잡았다. 고모가 다소 결연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네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너는 서울에서 살지도 못했어. 할아버지가 첫 손자라고 물고 빨고 하면서 네 아버지 밑에 너를 두지도 않았을 거야. 할아버지한테 네 아버지, 그러니까 우리 작은 오빠는 영웅이었어. 자랑이었다고. 상혁아, 고모 말이 무슨 말인지 알지?”

고모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나는 알아챘다. 기죽지 말라는 소리였다. 고모가 맥락 없이 그런 소리를 길가에서 나한테 하는 이유를 나는 어렴풋이 짐작했고 또 고모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 것처럼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어쩌면 무척 외로웠을 내 초등학교 졸업식을 나는 따뜻하게 기억하고 있고, 그래서 잊을 수도 없다.

그리고 또 세월이 한참 지났다. 내가 대학원에 다니던 어느 날이었다. 고모의 아들이자, 내 사촌 남동생이 내게 불쑥 전화를 걸어왔었다. 대학원 석사 때였고 논문을 쓰고 교원 임용을 준비하던 시기여서 나는 공부를 하느라 분초를 다투고 있었다. 사촌 남동생이, 교통사고를 당해 다쳐서 병원에 입원을 했으니 돈을 좀 보내달라고 했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도서관 밖으로 뛰어나와 수화기 너머 보이지도 않는 사촌 남동생을 끌어안으려는 듯이 발을 굴렀다. 어디를 얼마나 다쳤고, 괜찮은지, 어느 병원인지, 지금 형이 바로 내려간다고 폭풍처럼 말을 쏟아놓았다. 사촌 남동생은, 형 올 필요 없고 형 오면 엄마가 걱정하고 난리가 나니까 그냥 아무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금방 치료받고 오늘 중으로 퇴원을 한다고 했다. 정말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병원비가 없다고 했기 때문에 바로 돈을 보내주었다. 사실 사촌 남동생에게 돈을 보내주고 나면 나도 생활비가 바닥이 났지만, 지금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며칠 뒤에 고모에게서 전화가 왔고 전화를 받자마자 불같이 화를 내는 고모 목소리를 듣고 내가 더 놀라서 말문이 막혔다. 고모가 소리소리를 지르면서, 네가 사촌 남동생에게 돈을 보내준 게 맞느냐고, 네 사촌 남동생이 이제는 아주 고모 조카 사이도 끊어 놓을 셈이라고, 사촌 남동생에게 막 욕을 퍼부어댔다. 고모와 전화를 끊고 앞뒤 상황을 정리해보니, 사촌 남동생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사귀던 여자 친구 선물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돈이 필요해서 사촌 남동생이 나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사실 나는 그쯤은 애교로 봐줄 수 있고, 사촌 남동생이 친가 쪽으로 가장 막냇동생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게 귀엽기까지 했다. 물론 놀라고 괘씸한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는데, 핏줄이라는 것이 그런 건지 나는 별로 상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고모가 너무나 화를 내서, 고모가 쓰러질까 봐 걱정이 돼 내가 다시 전화를 했고 사촌 남동생을 용서해달라고 사정을 해야 했다. 아마 고모하고 내가 통화를 한 후, 사촌 남동생은 고모에게 크게 혼이 났을 것이다. 고모는 그랬다. 조카인 내게 조금도 폐를 끼치고 싶어 하지 않는, 그런 분이었다.

내가 교사로 발령받고 세 해째 되던 해였다. 고모의 딸이자, 내 사촌 여동생의 결혼식이었다. 부주계에 내가 앉아 축의금을 받았다. 그때, 나는 사촌 여동생의 결혼식에 낡은 잠바 하나를 걸치고 온 고모부를 알아보았다. 내가 10살 이후로는 본 적이 없었으니 20년이 훨씬 지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고모부를 첫눈에 알아보았다. 고모부는 흰 봉투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식권을 건네주면서 식당은 어디라고 안내했다. 고모부가 도장을 찍듯 내 얼굴을 아주 짧지만 강렬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나를 기억하고 눈에 새기기라도 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순간, 나는 고모부가 나를 알아봤다는 것을 알아챘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를 하려는 바로 그때 고모부가 차갑게 돌아섰다. 고모부는 사촌 여동생이 결혼식 하는 식장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식당으로 향했다. 고모부의 뒷모습을 따라 내 시선이 이동을 하다, 다른 손님들이 축의금을 내밀고 나는 그걸 받아 장부에 기록해야 했으므로 고모부에게 향한 시선을 거두고 정신을 차려야 했다.

고모부가 내민 흰 봉투에는 5만 원이 들어있었다. 나는 그 돈을 장부에 적으면서, 그냥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흔한 만 원짜리 지폐였지만 구겨지거나 낡아있고, 지폐 끝부분이 접혀 너덜거리는 5만 원을 세고 있자니 고모부의 지난 삶들이 보지 않고도 이해가 될 듯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당신의 딸자식 결혼식에 축의금을 내는 처지의 고모부가 당시에는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내 마음이 이럴진대, 결혼식을 치르는 사촌 여동생 마음은 어떨 것이며, 식장에 앉아 있는 고모의 마음은 어떨 것인지 감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 사촌 여동생에게 지나는 말로 네 결혼식 때 오빠가 고모부를 뵌 것 같아,라고 슬쩍 말했다. 사촌 여동생 낯빛이 굳으며 아주 잠깐 엷게 슬픈 기운이 드리워졌다. 나를 향해, 알고 있었다고 대답하고는 사촌 여동생은 재빨리 어두운 기색을 지웠다.

결혼식이 끝나고 결혼식 축의금으로 들어온 돈을 결혼식장에서 현금 세는 기계로 돈을 세고, 식장 비용과 하객들 식사비용 등 결제를 하면서 고모가 내 앞으로 현금영수증을 끊으라고 직원에게 말했다. 고모에게, 그럴 필요 없다고 매제나 사촌 여동생 앞으로 해야 하지 않겠냐고 그랬더니 고모가 그렇게 하는 게 고모 마음이 편안할 거 같다고 해서 나는 그렇게 했다. 내가 서울로 올라가려고 고모에게 인사를 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고모가 내 손에 10만 원을 쥐어주었다. 나는 그 돈을 받을 수가 없어 아니라고, 현금영수증 제 앞으로 해 준 것만으로도 저는 연말정산 때 크게 이익이 될 텐데 됐다고 극구 사양을 하니 고모가 나에게 처음으로 언성을 높이며 화를 냈다.

“돈이 적어서 안 받으려고 하는 거냐? 그럼 고모 정말 서운하다.”

나는 그런 뜻이 아니라고 황급히 고모 두 손을 잡고 죄송하다 말씀드리고 10만 원을 얼른 받아 양복 호주머니에 넣었다. 잠깐이었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고모를 동정하고 있었다. 어려운 형편에 사촌 여동생 결혼식을 준비하느라고 고모는 또 얼마나 없는 돈을 쥐어짜서 마련을 했을까 걱정했다. 그리고 부주계에서 만난 고모부의 주름 가득한 얼굴과 겹쳐져 잠시나마, 최선을 다해 살아오며 사촌 여동생을 결혼까지 시킨 고모를 조카인 내가 안쓰럽게 생각한 것이었다. 고모는 그것이 불쾌했을 것이다. 고모가 늘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한 큰 조카에게, 큰 조카가 서울에서 애들 가르치며 선생으로 제 몫을 다 하고 있다 해도, 고모 눈에 여전히 나는 그 옛날 맹장 수술을 받고 병상에서 마취가 깨어 떨고 있던 꼬마인 모습으로 각인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고모에게 내가 무례했다. 나는 고모가 서운하지 않도록 몇 번 더 사과를 드리니, 고모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내 등을 쓸어내리며 학교 일 때문에 서둘러 올라가야 하는 나를 보고 서울에서 오느라 고생했는데, 하룻밤도 못 자고 가서 어쩌느냐고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고모를 생각했다. 화장을 곱게 하고, 올림머리에 한복을 입은 고모는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우리 고모가 이렇게 고우셨나, 나는 새삼 생각했다. 그토록 고모를 아끼고 사랑했던 할아버지(고모에게는 아버지)가 고모 어려서 돌아가시면서 갖은 고생을 하며 살지만 않았으면 오늘처럼 곱게만 살아오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나는 기차 안에서 자꾸 마음이 아파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눈가에 고이는 눈물을 훔쳐냈다.

고모는 이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손주가 두 명이나 있다. 생의 희망인 아이들이 쑥쑥 자라는 것을 바라만 봐도 행복하신 듯하다.

내가 일본에 살기 시작하면서 때마다 먼저 연락을 하는 건 내가 아니라 고모다. 나는 고모 생일을 챙기지도 못했는데, 내 생일이면 꼭 문자메시지로 축하한다는 연락을 한다. 나도 고모 생신을 기억해뒀다가 연락을 드려야지 하지만 번번이 잊어버리고, 고모 생신은 고사하고 평소에도 연락 한번 제대로 드린 적이 없다. 한 번도 내가 먼저 고모의 안부를 물은 적이 없다. 그러니 나는 고모의 마음 씀씀이를 따라갈 수가 없다. 고모와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고 나면 나는 한동안 휴대폰 속에 고모가 있는 것처럼 액정 화면을 들여다본다. 화면이 점점 어두워지고 이윽고 액정화면에 내 얼굴이 비치면 내 눈빛이 슬퍼 보여 나는 얼른 휴대폰을 닫았다.

일본어는 우리나라보다 친족어가 다양하지 않다. 한국어는 고모와 이모를 구분하지만, 일본어에서는 오바상(おばさん-아주머니)으로 구분하지 않고 부른다. 뿐만 아니라 큰어머니 · 작은 어머니 · 외숙모 모두 '오바상'이다. 한자의 차이는 있으나 발음은 똑같다. 남자 쪽도 한국어는 삼촌과 외삼촌을 구분하지만, 일본어는 오지상(おじさん-아저씨)으로 통일해서 부른다. 큰아버지나 작은 아버지 · 당숙 등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오지상'이다.

언어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한국어는 친족관계에서 유대감이나 소속감을 느끼고 친척을 넓은 의미의 가족이나 식구로 생각하는데 비해, 일본어는 친척들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아닌 가까운 '남'이며 때에 따라서는 '남'하고 하나 다를 바 없는 관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상황이나 집안 내력에 따라 다르겠지만, 확실히 한국에서는 밖으로 관계를 넓히는 의미에서 친척들끼리 돈독한 관계를 중시하고, 일본에서는 안으로 가장 가까운 가족 관계를 수렴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인 지인에게 내 고모에 관한 이야기를 했더니, 그런 친척이 있다는 것을 상당히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한국은 확실히 정(情)이 두터운 나라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우리나라 기차역 중에 '고모역'이 있다는 걸 이번 기회에 처음 알았다. 지금은 운영이 되지 않고 기차가 배치되지 않는 간이역이 되어 사실상 폐역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나는 가보지도 못한 '고모역(顧母驛)'을 인터넷에서 처음 보고 무척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고모역’의 한자와 아버지의 여자 형제를 부르는 ‘고모(姑母)’의 한자는 다르지만, ‘고모역’의 한자를 살펴보면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나 그중에서 '어머니를 대신해 보살핀다.'라는 의미가 있다. 사실 '고모역'의 한자를 보고 문득 내 고모가 생각나, 이 긴 글을 적게 되었다. 이미 사라져 버린 역명에서, 한자도 다른 글자를 보며 '고모역'의 '고모(顧母)'라는 뜻이 남달리 내 가슴에 와닿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고모가 나를 보살피고 도움을 주었듯이, 어려서 맹장수술을 했을 때 옆집 아저씨와 아줌마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더 큰 일을 당했을 것이다. 생의 순간순간, 감사한 사람들이 이토록 많다. 그때는 너무 어리기도 했고, 철이 없던 지라 옆집 아저씨와 아줌마에게 감사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지금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지만 그때 정말 감사했다고, 당신들이 아니었다면 10살의 꼬마가 더 많이 아팠을 거라고, 잊지 않고 있다고 꼭 이 말만큼은 전해드리고 싶다.

내 고모는, 분명 내 어린 시절 엄마를 대신해서 나를 보살핀 적이 있다. 그것도 가장 엄마의 손길이 필요했던 순간순간, 엄마의 빈자리를 고모가 메꿔주었다. 내게 고모가 없었다면, 나는 더욱 외롭고 고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내게 고모는 '고모(姑母-아버지의 여자 형제)'가 아닌 '고모(顧母-어머니 대신 보살피다)'로 내 가슴 한 자리에 언제나 존재한다. ■

사진출처: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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