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하시모토에서, 너와 함께.
일본은 반찬을 많이 먹지 않는 문화이다. 카레를 먹더라도 우리나라는 단무지나 김치 그리고 국을 곁들여서 먹는 반면, 일본은 '밥에 얹은 카레'만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식당에서 '정식' 같은 것을 시켜도 우리나라 간장종지 같은 그릇에 한 젓가락도 안 되는 반찬을 담아 내준다. 카레면 카레, 돈가스면 돈가스의 주 요리 맛을 즐겨야지 곁들이는 반찬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식이다. 우리나라 사람 입장에서 일본식 식사를 앞에 두고 보면 반찬 가짓수도 그렇지만 반찬 양이 너무나 적어 실망할 때가 많다.
내가 일본 온천 여관에서 하루 묵었을 때 일이다. 저녁 식사가 나오는 온천이었기 때문에 밥을 먹기 전에 온천욕을 하고 식당에 갔다. 일본식 정찬이 한 상 차려졌다. 일반 가정에서는 맛볼 수 없는 갖가지 다채로운 음식들을 먹는 것도 즐겁지만 음식의 색깔을 조화롭게 차려낸 솜씨를 보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었다. 우리나라 '절임 무' 같은 반찬이 내 입에 딱 맞아서 주 요리가 나오기도 전에 다 먹어버렸다. 조금 더 먹고 싶어서 종업원에게 반찬을 조금 더 갖다 달라고 부탁을 했다. 온천 여관에서 차려진 음식 외에 추가로 음식을 시키는 경우는 주 요리와 안주 정도인데, 나처럼 반찬만 시키는 경우가 없어서인지 종업원이 매우 당황스러운 얼굴로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없으면 괜찮다고 말을 했지만 그래도 종업원 입장에서는 손님 비위를 맞춰야 했을 테니 주방에 가서 물어보고 오겠다고 했다.
나는 종업원이 자리를 뜬 사이에 반찬 한 종류 조금 더 달라는 게 이상한 건가, 생각했다. 우리나라에서 김치를 추가로 달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본 반찬이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뒤에 종업원이 오더니 준비된 반찬이 없어서 똑같은 반찬은 더 드릴 수 없다는 말이 되돌아왔다. 종업원이 매우 송구스럽다고 머리를 숙였지만 나는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손님상 그릇에 담고 분명 남았을 만한 반찬이었는데 싶었기 때문이었다. 손님상에는 내놓기 어려운 반찬 쪼가리만 남아서였을까, 차려진 음식을 먹으면서 혹시 내가 실수를 한 건 아닌지 마음이 불편했다.
일본도「스키야(すき家)」나「마츠야(松屋)」같은 소고기 덮밥 가게에서는 '베니쇼가'(紅しょうが-초생강),「코코이치방」같은 카레 전문점에는 '후쿠진즈케(福神漬け-소금에 절인 무를 간장에 담은 장아찌)' 정도는 자유롭게 덜어서 먹을 수 있게 해 놨다. 물론 생선 초밥 집에서 초생강이나 락교(염교 절임) 같은 것은 마음대로 먹을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김밥천국」을 가더라도 최소 4, 5가지 밑반찬을 먹을 수 있는데(국까지 합쳐서 8가지 반찬을 덜어다 먹을 수 있는 곳도 보았다. 특히 계란 프라이를 내놓은 곳도 있었는데 일본에서는 계란 프라이라면 돈을 주고 사 먹어야 한다.) 밑반찬 문화에서는 일본이 한국을 따라오기 어렵지 않나 싶다.
한국사람 입장에서 일본 음식문화를 보면 감질나게 반찬이 나온다고 비판을 할지 모르고, 일본 사람 입장에서 한국 음식문화를 보면 남은 음식을 다 버릴 텐데 음식 낭비가 심하다고 비판할지 모르겠다. 알고 보면 일본도 상황과 자리에 따라 눈이 튀어나올 만큼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 나오는 음식도 있고, 한국도 식당에 따라 추가 반찬은 셀프서비스 거나 제공된 반찬을 남기면 벌금을 내야 하는 식당도 있다는 걸 안다면 서로 비판을 하기는 다소 어려울 듯하다.
나는 9살 때 엄마랑 헤어져 산 후, 밥상에서 반찬을 많이 올려놓고 먹은 기억이 별로 없다. 이상하게 9살 때부터 대략 13살 정도까지 매일 같이 무엇을 먹고살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침을 거의 먹지 못했고 아침 대신 학교에서 주는 우유를 먹은 기억이 있다. 점심은 도시락을 먹었는데 아버지가 싸준 도시락 사정이라는 게 좋을 리 없었기 때문에 배고픔을 달래는 것 외에 즐거웠던 기억이 있었을까 싶다. 저녁에는 아버지가 저녁을 차려주기도 했지만 바깥 식당에서 아버지는 소주 한 병을 시켜놓고 밥과 반찬을 안주 삼아, 나는 혼자 술을 마시는 아버지 앞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느라 정신이 없었던 적이 많았다.
엄마가 반찬을 만들어서 보내주기 시작한 것은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였다. 그 전에도 몇 번 엄마가 집에 와서 간단히 반찬을 만들어 놓고 가기도 했는데, 아버지가 집에 엄마가 오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고 심지어 엄마가 만들어놓은 반찬을 내 눈앞에서 다 버리기도 했었다. 나는 어린 마음에 그런 행동들이 무척 공포스러웠고 엄마에게 반찬 만들러 집에 오지 말라고 전화했던 기억이 있다.
3개월에서 6개월에 한 번 엄마가 살고 있는 의정부역에서 엄마와 정기적으로 만난 것은 중학교 때부터였고 아버지 눈에 띌까 항상 조마조마했다. 엄마는 김치와 마른반찬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밑반찬들을 커다란 봉투에 가득 담아 내 손에 들려줬다. 나는 무겁고 음식 냄새가 다소 나는 큰 봉투를 들고 지하철을 타고 1시간이 걸려 서울 집에 왔다. 지하철 안에서 김치 냄새가 난다고 사람들이 웅성거렸고 혼자서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 고개를 숙였던 기억은 지금까지 잊지 못한다. 엄마에게 다음부터 김치는 절대 싸주지 말라고 했다. 그 후로 엄마 나름대로의 전략을 짜서 냄새가 안 나는 반찬들로만 만들어 내 손에 들려줬고 지하철에서 창피를 당한 적은 없었다. 엄마는 내가 지하철을 타고 가는 1시간 동안 반찬이 상하지 않고 냄새를 풍기지 않으면서 가급적 무겁지 않도록 마음을 썼다. 아버지가 일 때문에 지방 생활을 시작하고 내가 친척집에서 1년 남짓 있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엄마는 끊임없이 내게 반찬을 만들어 보내주었다.
엄마랑 떨어져 산 지 33년이 흘렀다. 3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엄마와 내가 연결된 유일한 것은 어쩌면 반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반찬을 만들어 준다는 핑계로 자주 연락을 하지 않는 내게 연락을 해왔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흘러갔다. 주로 엄마가 이야기를 해서 엄마와 자주 만나는 이모들의 근황과 내 이종사촌들의 크고 작은 소식에 대해서 전해 들었다. 아버지와 엄마가 헤어진 후로, 나는 이모들을 비롯한 이종사촌과는 남 같은 사이가 되어버렸다. 엄마와 같이 살 때는 외갓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고 이모들 하고 놀이동산도 다니면서 무척 가깝게 지냈었다. 세월이 지나 내가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다시 만난 이모들은 아가씨가 아닌 아줌마들이 되어 있었다. 아기들이었던 이종 사촌동생들은 내가 기억하는 얼굴들이 아니었으며 사촌 남동생은 나보다도 키가 더 컸다. 아무리 핏줄이나 몇십 년 동안 소원했던 간극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은 이모와 이종 사촌동생들을 보고 깨달았다. 하지만 이모들은 내 어릴 적 모습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어서 이모들을 만날 때면, 엄마 포대기에 업혀 있는 것처럼 아기 때로 돌아가는 거 같아 나는 나름 행복했다.
9살 이후부터는 혼자서 뭐든 알아서 하려고 했고 그 덕분에 나는 독립심이 남다르게 됐다. 가끔 엄마와 통화할 때면 나는 엄마에게 언제나 잘 지내고 있다는 말 외에는 별로 길게 말을 하지 않았고 또 엄마가 내가 길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는 편이다. 엄마가 택배로 보낸 반찬을 받으면 나는 그 부피와 무게에 질리고, 집에 있는 반찬통을 죄다 꺼내도 엄마가 보낸 반찬이 다 들어가지가 않아 봉지째로 냉장고에 넣어놨다가 잊어버리고는 봉지째로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릴 때도 있었다. 아무리 맛있는 반찬이라도 같은 반찬을 매일 먹게 되면 물리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맛이 변하게 된다. 멸치볶음을 약간 상한 것도 모르고 먹었다가 식중독에 걸려 병원 신세를 진 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엄마를 원망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음식을 조심해서 먹지 못한 내 탓이었지만 아픈 배를 움켜잡고 병원에 있을 때는 짜증이 몰려왔던 것은 사실이었다.
엄마가 해준 반찬을 되도록 남기지 않고 버리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냉동해서 뒀다 먹어도 되는 음식들은 냉동을 했는데 해동을 하고 나면 맛이 없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해 준 반찬들을 나는 꾸역꾸역 먹을 때가 많았다. 음식을 버릴 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음식을 남기면 그 음식을 죽어서 지옥에 가 다 먹어야 한다는, 어려서부터 들어 귀에 딱지가 앉은 그 말, 아무런 근거도 없는 그런 말에 휘둘리며 반찬을 먹었다. 나는 엄마에게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는데, 엄마는 반찬으로 나를 죄인으로 만들 때가 많았고 그것이 33년이나 이어져왔다.
엄마가 카톡 전화가 국제전화도 무료라는 것을 알고는 내가 일본에 살고 있는데도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서 반찬을 보내주려고 했다. 그것도 김치를. 세상에…… 그 김치가 국제선을 타고 일본까지 오면 다 익어서 쉬어 터질 텐데 엄마는 내가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살고 있는 집 근처 어딘가에 있다고 착각을 하는 거 같았다. 국제전화를 아무 때나 할 수 있다는 것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많이 줄이는데 단단히 한 몫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해도 엄마는 기어코 우체국에 가서 손바닥보다 조금 큰 반찬통 하나를 보내는 요금을 확인했다. '6만 원'. 직원에게 6만 원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면 포기할 만도 한데, 엄마는 나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서 김치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나는 극구 사양하다 엄마가 미련을 못 버리자 나중에는 내가 화까지 냈다. 6만 원이면 일본에서 한국산 김치를 한 달 내내 배 터지게 먹고도 남을 만큼 사니까 절대 보내지 말라고, 주소 괜히 알려줬다고 나는 엄마한테 신경질을 냈다. 왜 그렇게 반찬을 보내려고 할까 싶다가, 엄마와 내가 공통적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먹는 이야기 외에 별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33년을 떨어져 살아 나는 엄마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색깔을 좋아하는지, 엄마가 가수 누구를 좋아하는지 모른다. 엄마도 내가 과일 중에 사과보다는 딸기와 포도 같은 걸 좋아하는지 모르고, 아기였을 때 사과와 배를 갈아서 내게 먹여주던 것만 생각해 지금도 내가 사과와 배를 좋아하는 줄 알고 있다. 내가 엄마 집에 가면 늘 사과 아니면 배가 나왔고, 껍질을 깎아 접시에 담아 내 앞에 내놓는 정성을 생각해 나는 아무 말 없이 주는 대로 먹었다. 나는 과일을 아주 좋아하지만 사과나 배처럼 깎아서 먹는 과일은 잘 안 사 먹는다. 날카로운 칼을 오래 쥐고 있는 것도 사실 나는 좀 무서워하는 편이다. 이건 왜 그런지 모르겠다. 날카로운 걸 보면 몸이 움츠러들고 겁이 난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그래서 껍질을 깎지 않아도 되는 과일을 주로 먹고 아니면 바나나처럼 껍질 까기가 매우 간편한 과일을 좋아한다. 수박도 좋아하는데 먹고 나서 음식물 쓰레기가 엄청나서 살 때 고민을 많이 한다.
일본은 수박 같은 경우 한 통을 그대로 파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절반에 절반을 잘라서 파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가격은 한국의 수박 한 통 가격보다 더 비쌀 때가 있다. 사기를 당하는 거 같은 기분 때문에 세일을 할 때가 아니면 나는 일본에서 수박을 사 먹지 않는다. 그보다 일본은 과일 자체가 매우 비싸다. 일본에 살다 보면 생필품이라든지 당장 먹을 음식 같은 경우 매우 가격이 싸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운이 좋으면 정상 가격에서 50% 할인된 도시락도 쉽게 발견된다. 그러나 과일은 그렇지 않다. 유통 시 여러 가지 부가가치세가 붙으니 비싸지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과일보다 두 배 내지 세 배 이상 비싸니 과일을 쉽게 먹을 수 없다. 일본에 왜 그렇게 과일 맛 주스가 엄청난 종류를 자랑할까 싶었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이기는 하나 과일이 너무 비싸서 사 먹지를 못하니 과일 주스로라도 먹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엄마가 반찬을 보낼 때마다 빠지지 않는 3가지가 있다.
1. 검은콩자반: 사실 나는 검은 콩자반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엄마가 반찬으로 보내줘서 먹는 거 외에 내가 콩자반을 따로 먹은 기억이 거의 없다. 어쩌다 식당 같은 데서 반찬으로 나와도 쳐다도 안 봤던 거 같다. 나뿐이겠는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콩자반을 반찬으로 싸온 날은 친구들 앞에서 도시락을 꺼내기 싫을 정도 아니었나. 엄마는 왜 그렇게 콩자반을 열심히 만들어서 때마다 보내주는지, 콩자반을 먹으면서 생각했다. 이걸 어떻게 만드는지 알고 싶지도 않지만, 만드는데 어쨌거나 품이 들어가지 않나. 씹어 삼키면서 몸에 좋다니까, 검은콩이니까 하면서 무슨 약을 먹는 것처럼 먹었다. 손목도 아픈 엄마가 일일이 이걸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을지 생각을 하면 콩자반 보내지 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사그라들 때가 많았다. 엄마는 잘 모르겠지만 콩자반을 보내면 십중팔구 절반도 못 먹고 거의 다 버리게 된다. 보내지 말라는 말을 못 하고 조금씩만 보내라는 말로 먹기 싫다는 말을 돌려서 말하는 나도 참 안타깝지만, 내 말을 잘 못 알아듣고 콩자반을 꼭 보내는 엄마의 마음도 있을 테니 나는 그냥 먹기로 했다.
2. 매실: 나는 매실장아찌를 무척 좋아한다. 몸이 차가운 편이라 매실이 나한테는 안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매실을 좋아하는 이유는 장아찌를 담갔을 때 매실 특유의 새콤달콤한 맛 때문이다. 고추장에 버무린 매실 장아찌도 좋지만 그보다는 매실과 설탕만 넣어서 만든 매실 절임을 더 좋아한다. 입맛 없을 때, 매실 장아찌 한 입이면 없던 입맛도 살아나고 먹고 나서 속도 편하기 때문에 나는 매해 매실이 판매되는 시기가 되면 은근히 엄마에게 독촉을 하곤 했다. 엄마는 김장 김치를 담그는 것처럼 매년 매실 장아찌를 담갔고 매실이 꼬들꼬들 씹는 맛이 가장 좋을 때 내게 보내곤 했다. 일본에서도 그 맛을 잊지 못하고 매실 장아찌를 찾았다. '우메보시(梅干し-일본 매실 장아찌)'가 일본에도 있지만, 이건 설탕이 아니라 소금으로 절인 거라 한국사람 입에 안 맞는다. 나도 '우메보시'를 처음 먹었을 때는 너무 짜서 도로 뱉어낸 기억도 있다. 지금은 '우메보시' 맛에 적응이 되어 잘 먹는 편이나, 역시 우리나라 매실 장아찌가 내 입에는 제일 맛이 난다.
3. 냉면 무김치: 내가 냉면을 좋아한다는 것은 엄마도 잘 알고 있고, 엄마와 만나서 나 어릴 때 이야기를 하다 보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이야기가 '냉면 이야기'이다. 엄마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 동네 어른들이 우리가 살고 있던 주인집에 모여 냉면을 해 먹었던 이야기. 그때, 내가 주인집 아들과 같은 학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체구가 작다는 이유로 국그릇도 아닌 밥그릇에 냉면 한 젓가락 정도 내 몫으로 배분되었던 이야기. 어찌 되었든 그 이유로 나는 냉면을 좋아하게 됐고, 엄마도 내게 냉면을 자주 만들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 늘 내게 미안해했다. 떨어져 살면서 냉면을 만들어 줄 수는 없으니 냉면 위에 얹어먹는 고명인 냉면 무김치를 담가 보내주었다. 남들이 모르는 엄마와 나만의 추억이 깃든 반찬이다. 나는 냉면 무김치를 냉면에 얹어먹기도 하지만 입맛이 없을 때는 밥반찬으로 먹을 때도 있다. 새콤달콤한 맛을 좋아하기도 하고 무의 아삭함을 즐기기 때문이다.
반찬을 보내주는 엄마의 정성을 생각하면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뿐이다. 나한테 반찬을 만들어 보내겠다고 엄마는 엄마가 자체적으로 만든 자연 조미료를 사용하거나 음식 재료도 가장 좋은 것을 고르고 골랐을 것이다.
반찬의 덕이 아니었다면 엄마와 나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엄마 입장에서 내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어려서는 엄마가 싸준 반찬을 갖고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 눈치 못 채도록 냉장고 깊숙이 넣어뒀던 때도 있었다. 아버지가 몰랐겠냐마는, 그럴 때마다 어린 가슴이 벌렁거리며 겁을 먹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부터는 아버지가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엄마가 해준 반찬을 가져다 먹었고, 그거라도 먹어야지 건강을 유지하고 식사다운 식사를 하게 되니 아버지도 아무 말 못 했다.
생각해보면 엄마는 어떤 순간에도 나에게 반찬을 보내려고 했고 또 실제로 보냈다. 세상에 내 편이 그리 많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마지막 순간에도 엄마는 내 편이 되어줄 거라는 생각을 하니 가슴 한쪽이 따뜻해질 때도 있다. 전화 너머 엄마 목소리에 일본까지 반찬을 보내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9살인 나를 두고 집을 나가야 했을 때, 엄마는 얼마나 울었을까. 내가 아버지와 엄마가 틀어진 결정적인 이유까지야 알지 못하지만, 9살 꼬마를 맡은 아버지나 9살 꼬마를 두고 집을 나간 엄마나 나에게 차마 못할 짓을 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렇게 화가 난 듯 한 얼굴로 일생을 살고 있고, 엄마는 42살이나 된 나를 아직까지 포대기에 감싸 안고 다니는 아기처럼 볼 때가 있는 것 같다.
내가 한국에 오면 먹일 매실들이 다 물러 터져 간다고 볼멘소리를 하는 엄마 목소리를 듣고 나는 모처럼 소리 내 웃었다.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고, 내게 먹일 음식을 잔뜩 만들어 놓는 사람이 있다는 건 기쁜 일이다. 정말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