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하시모토에서, 너와 함께.
『하우스 텐보스』(Huis Ten Bosch)는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県) 사세보시(佐世保市)에 있는 유럽풍 테마파크이다. 내가 이곳을 찾게 된 것은 2013년, 원폭 피해 관련 소설 취재를 위해 히로시마(広島)에 방문한 것이 계기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두 곳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이에 관련된 역사 자료관을 방문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반나절 예정이었던「히로시마 원폭 자료관(정식 명칭은 ‘히로시마 평화 기념 자료관’)」을 방문했을 때 예상보다 너무 오래 지체하게 되어 일정상 나가사키에 갈 수 없게 되었다. 주목적은「히로시마 원폭 자료관」을 방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나가사키는 다음을 기약했다. 그렇게 잊고 있다가 2016년에 규슈(九州)에 갈 일이 생겨 늦었지만「나가사키 원폭 자료관」에 가볼 수 있었고, 나가사키까지 온 김에 나가사키의 대표적인 테마파크인『하우스 텐보스』를 찾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학교 소풍 등으로 놀이동산에 갈 기회가 있었고, 갈 때마다 나는 재미있다는 생각보다는 놀이기구를 타느라고 너무 오래 기다리는 것과 드넓은 곳을 걷고 뛰느라 체력을 소진해 진이 빠져버렸기 때문에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하우스 텐보스』도 가지 않으려고 했으나 나가사키까지 갔으면 당연히『하우스 텐보스』에 가야 하고「원폭 자료관」같은 곳만 가지 말고 기분 전환도 할 겸『하우스 텐보스』에 꼭 가보라고 강권하는 일본인 친구의 이야기가 마음을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히로시마 원폭 자료관」에 비해「나가사키 원폭 자료관」은 규모가 작고「히로시마 원폭 자료관」의 축소판 정도 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둘러보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하우스 텐보스』입장표를 인터넷으로 미리 구입해 두기도 했고 시간도 넉넉해 나는 여유를 갖고 출발할 수 있었다.『하우스 텐보스』안에서 하는 불꽃축제를 꼭 봐야 한다고 해서, 입장권이 아닌 여러 가지 시설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패스포트'(일종의 자유이용권) 표를 인터넷 사이트에서 약간 할인된 가격으로 구입해뒀었다.
아무 기대를 하지 않고 갔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여름이었기 때문에 무척 더워서 그랬는지 나는『하우스 텐보스』에 도착해서 정문 입장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다는 생각에 약간 짜증이 났었다. 기차 안에서『하우스 텐보스』관련 안내서를 읽었는데『하우스 텐보스』라는 의미 자체가 네덜란드어로 '숲 속의 집'이라는 이름이기 때문에, 뭔가 타고 즐기는 놀이기구보다는 아름다운 꽃과 나무가 가득하며 연중 다양하게 열리는 축제가 중심인 곳이라고 했다. 하루에 다 볼 수 없다고 했고, 불꽃축제 및 저녁에만 볼 수 있는 전광 장식(일루미네이션)을 봐야 했기 때문에『하우스 텐보스』출입구와 연결되어 있는 호텔에 하루 숙박 예약을 했다. 호텔 체크인까지만 했는데도 숨이 턱 막히는 더위에 이미 온몸에 힘이 빠져서 헉헉거리다가 시원한 호텔 안에 들어오니 밖으로 나가기 싫어지는 마음이 생겼다. 시원한 물을 한 잔 마시고 객실 창문 커튼을 활짝 열어보았다. 그 순간,『하우스 텐보스』광장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유럽 어느 궁에라도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잘 가꾸어진 정원을 보고는 아무리 더워도 잠깐이라도 나가서 돌아다녀야 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5,000엔(한화 약 52,000원 정도)이나 주고 산 푯값도 생각 안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점심에 먹으려고 산 삼각 김밥을 먹고 샤워를 한 뒤에 옷을 갈아입고『하우스 텐보스』에 입장했다.
아름다웠다. 어디를 걷고 있어도 꽃이었고 무엇을 보아도 고풍스러운 궁이었으며 숨을 쉬는 곳마다 숲 향기가 마음까지 안정시켰다. 놀이기구를 타는 것보다는 산책을 하고 궁처럼 생긴 건물에 들어가 맛있는 식사를 하고 곳곳에 있는 전시관과 미술관에 들어가 훌륭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구조였다. 뜨거운 여름이 아니라 봄이나 가을에 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거기서 끝났다면 나는『하우스 텐보스』를 아름다운 유럽풍 궁과 꽃의 동산이라고만 기억을 하고 잊어버렸을 거 같다. 지금까지 내가 힘들 때마다『하우스 텐보스』를 되새기는 것은 궁과 꽃 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그럴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불꽃축제나 전광 장식을 감상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남은 오후 3시 전이었다고 기억한다. 하루에는 다 볼 수도 없는 드넓은 곳이기도 했고 더위 때문에 지쳤고, 오래 보다 보니 거기가 거기인 듯한 지루함도 있었기 때문에 호텔로 돌아와 잠시 쉬어야겠다고 생각한 바로 그 시점이었다.
서커스 공연장 같은 크고 빨간 천막이 쳐있는 곳에 내 발걸음이 멈췄다. 무슨 공연을 하는 거 같았는데 사람들이 모두 입장을 한 상황이었고 시간이 촉박한 듯, 공연장 앞에서 안내를 하는 사람이 곧 입장을 마감한다고도 해서 나는 무슨 공연인가 들여다봤다.〈하우스 텐보스 가극단〉공연이었다. 일본에는《다카라즈카 가극단-宝塚歌劇団》- 배우 모두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가극단으로, 오페라와 뮤지컬 같은 공연과 수준 높은 작품으로 정평이 나 있으며 유명 배우를 다수 배출해내고 있다. -이라고 하는 유명한 가극이 있다. 거기에서 분리되어 나왔을 거라고 생각되는〈하우스 텐보스 가극단〉은『하우스 텐보스』안에서만 공연을 하는 특별한 무대였다. 나는 ‘패스포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무료입장이 가능할 거라 생각했는데 추가로 500엔(한화 5,200원)을 더 내야 했다.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다카라즈카 가극단》은 아니나, 거기서 분리되어 나온 ‘가극’을 단 돈 500엔에 볼 수 있는 건 공짜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나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표를 사고 입장했다. 어쨌거나 여기까지 왔으니 본전을 뽑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시원한 곳에 앉아 공연을 보면 더위도 물러갈 거라는 생각도 있었다. 공연장은 실내 농구장 절반 정도 되는 공간이었고 배우들이 나와 공연을 하는 무대가 있었다. 무대 양 옆 벽에는 공연에 등장하는 주연 및 조연 배우들의 사진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관객석에는 사람들이 꽉 들어차서 발 디딜 틈도 없었지만, 나는 운 좋게 제법 앞자리에 딱 하나 비어있는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운명이라는 것은, 가끔 요술 같아서 앞에 앉을 수 있는 아무런 가능성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빈자리에, 그것도 앞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공연이 시작되고 귀청을 울리는 음악과 짙은 화장에 화려한 의상을 입은 배우들이 등장했다.《다카라즈카 가극단》공연은 가끔 특별방송으로 텔레비전에서 녹화한 것을 방송해주기도 하지만 제대로 보려면 대극장에 가서 봐야 한다. 객석에 따라 가격이 모두 다르지만 배우 얼굴이라도 좀 보려면 A석(5,500엔-한화 약 58,000원) 이상 S석(9,500엔-한화 약 10만 원) 정도는 앉아야 하고, 제일 좋은 자리인 SS석(12,500엔-한화 약 13만 원)은 매우 비쌌기 때문에 선뜻 갈 생각을 못했다. 일본에 살면서 일본 전통극인《가부키》나 가극인《다카라즈카 가극단》같은 것을 경험 삼아 보러 공연장에 갈 수도 있었지만, 내 주변 일본인 지인들에게 기회가 되면 같이 가보자고 권유를 해도 하나같이 너무 비싸서 갈 수가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DVD를 구해서 보면 되는데 큰돈을 내고 갈 필요가 있겠냐는 것이다. 볼 가치가 충분히 있는 예술 공연은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는 게 당연하지만, 나 역시 반드시 일본 전통극이나 가극을 봐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고 팬도 아니었기 때문에 마음만 있었지 직접 가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내 눈으로 직접《다카라즈카 가극단》에서 파생된〈하우스 텐보스 가극단〉공연을 본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공연 내용은 잘 알아듣지 못했다. 오페라와 뮤지컬을 합쳐놓은 듯한 노래와 대사처리였기 때문이기도 했고, 고전적인 일본어를 사용하기도 해서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노래와 대사를 모른다고 해도 대강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이야기였다. 어려서 갖은 고생을 한 고귀한 신분의 왕자가 여러 사람들의 모함과 모해에도 불구하고 예쁜 공주를 만나 그 공주의 도움과 스스로의 지략과 능력으로 자신이 있어야 할 왕좌를 얻어낸다는, 뻔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내가 이〈하우스 텐보스 가극단〉에 완전히 매료된 것은 다른 데 있었다.
바로 주연 배우의 연기와 춤이었다.「가극」(歌劇)이기 때문에 ‘노래’와 ‘춤’이 기본이지만, 바로 눈앞 무대에서 배우의 생생한 호흡이 느껴지는 공연을 본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주연 배우가 매우 두껍게 화장을 했기 때문에 표정 변화를 느끼기 어렵겠다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주연배우는 시시각각 바뀌는 미묘한 표정 변화를 섬세하고 감성적으로 표현해냈다. 손 끝선에서부터 팔선까지 이어지는 '선'과 몸 전체의 '균형'을 조화롭게 표현해내려는 노력이 돋보였고, 배경음악과 더불어 배우의 노래와 춤이 배우의 동작 하나하나와 맞물려 극과 완전히 일체를 이룬 모습이었다. 공연을 하는 내내 주연배우는 마치 극 인물에 빙의가 된 듯 완벽한 ‘왕자’의 모습으로 분해 열연을 보여주었다.
마지막 장면이 압권이었다. 주연배우가 몸동작을 크게 하면서 웅장함과 용맹을 보여야 하는 장면이었는데, 양팔을 크게 앞뒤로 양옆으로 펼치고 휘두르는 장면에서는 배우의 손끝의 떨림이 객석에 앉아 있는 내 살갗 어딘가에 닿아 전기가 오르는 거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주연배우가 춤을 추면서도 노래를 불러야 했기 때문에 호흡을 위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생기는 볼살의 팽창과 수축까지도 내 눈에는 전체 극에 이미 계산되어 있는 동작처럼 느껴져서 하나의 환상 공연을 보는 거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심지어 그 무대에 내가 서 있는 거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극이 막바지로 가면서 주연배우는 물론 등장하는 모든 배우들의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번들거렸지만, 화려한 의상에서 반짝이는 반짝이 보다 더 값지고 빛나는 구슬땀 속에서 한 치의 실수 없이 완벽하게 공연을 마무리 짓는 모습을 보고 나는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공연이 끝나고도 한동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저토록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는 배우, 50분 남짓한 짧은 공연에도, 어떻게 보면『하우스 텐보스』에서만 공연이 되는 본래《다카라즈카 가극단》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내가 본 그 어떤《다카라즈카 가극단》보다 훌륭하고 멋있었다. 예술가의 혼이 느껴지는 예술품은 신비롭고 경이로우며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영광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혼신을 다해 연기하고 노래하며 춤을 추는 배우의 모습은 그 자체로 이미 예술이며 아름다움의 결정체라는 걸 깨달았다. 정식 무대라기보다는 서커스 공연장 같은 천막을 치고 하는 다소 협소한 곳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대극장에서《다카라즈카 가극단》정식 공연을 보는 것 같은 웅장하고 장대한 극 연출을 해낸 모든 배우들과 연출자 · 스텝들까지 존경스러워 보였다. 주어진 자리가 어디든 간에 공연을 봐주는 관객들이 있다면 배우들은 행복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저런 순간이 있었을까, 저토록 무엇인가에 혼신을 다해 '내가 너인지, 네가 나인지' 모르게 무엇인가에 몰입한 적이 있었던가, 몰입의 경지에 오르면 바로 저런 연기가 나오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훌륭한 배우들의 소름 끼치는 연기를 볼 때 느끼는 감동을, 생생한 현장에서 내 온몸으로 흠뻑 느꼈으니 나는 그 황홀감에서 한동안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바로 저것이다. 바로 저 '혼신'과 '몰입'이다. 무엇을 하든 저런 혼신의 노력과 몰입이 없고서는 예술가라고 하기 어려운 것이다. 비단 예술가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에 혼신을 다 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 몸에서 자신도 모르는 아우라와 빛이 뿜어져 나와 세상을 환하게 밝힐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나는 오래 생각했다.
사실 나는『하우스 텐보스』를 찾던 그 시기, 무척 힘든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소설가의 길에 들어섰으나 그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고 아무도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될지, 작품을 쓰면 어떻게 발표를 해야 할지, 아무것도 붙잡을 것이 없는데 무엇이라도 붙잡으려고 발버둥 쳤던 시기였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자책을 심하게 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고 마음이 힘드니 몸도 많이 아팠던 시기였다. 그래서 그 아름다운『하우스 텐보스』에 가서도 호텔 안에서 쉴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 뭔가를 봐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았던 때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하우스 텐보스 가극단〉을 만났던 것이다.
공연을 한 주·조연 및 출연 배우 모두 그런 고민들이 없었겠는가? 오디션 경쟁프로처럼 저 좁은 무대에 서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경쟁을 거치고 거쳐 배우의 자리에 왔겠는가, 또 배우가 되었다고 해서 유혹이나 갈등 · 고민이 없었겠는가? 불안정한 수입에 따른 불안정한 생활, 이름과 인기를 얻지 못하면 배우이면서도 배우가 아닌 듯한 삶을 살아야 하는 초조함과 마음 졸임, 그래서 조급해지기만 하는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하는 날들이 없었겠는가? 그런 불안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한 번에 잊게 해주는 것이 바로 관객들 앞에서 배우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공연이 아닌가 했다. 분야는 다르나 예술가라는 공통점으로 본다면 소설을 쓰는 나에게 큰 용기와 위안을 준 공연이기도 했다.
그런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공연장을 나오니 또 다른 놀라운 광경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 있기에 뭔가 하고 나도 고개를 내밀었다. 그 중심에는 길거리에서 묘기를 보이는〈젊은 퍼포먼스 예술가〉가 커다란 상자 위에 올라가서, 분유통 같은 원형 통을 뉘어놓고 그 위에 널판을 올리고 중심을 잡고 서 있는 것이었다. 거기까지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묘기였다. 처음에는 그 위에서 중심을 잡으며 손에 쥐고 있는 세 개의 칼을 번갈아 던지며 묘기를 보여주나 싶었는데, 그런 게 아니었다. 지금 상태에서 세 개의 칼을 번갈아가며 돌려 잡는 것도 대단했지만, 그 널판 위에 또 다른 원형 통을 올린 뒤 널판을 올리고 그 위에〈젊은 퍼포먼스 예술가〉가 올라서는 것이 아닌가? 보는 사람들 모두가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니까, 한 개의 움직이는 원형 통 위에 널판을 올리고 올라가서 균형을 잡는 것도 힘든데, 거기에 하나를 더 한 상황이니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통을 겹쳐 올리면서 높이는 더 높아졌기 때문에 딛고 있는 원형 통과 널판이 와르르 무너질 거 같아 조마조마했다.〈젊은 퍼포먼스 예술가〉는 햇볕에 그을려 옷 밖으로 드러난 살이 모두 빨갛게 익어있었고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으나, 입가는 계속 미소를 띠고 다음과 같은 말했다.
"자, 여러분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넘어져도 어쩔 수 없지만,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리려고 정말 열심히 연습했거든요. 제가 성공할 수 있기를 바라 주세요."
나 같으며 미소는커녕 겁이 나서 찍 소리도 안 나왔을 거 같은데, 긴장의 순간에도 여유를 보여주며 관객들을 안심시키면서도〈젊은 퍼포먼스 예술가〉는 이것이 끝이 아니라고 했다. 계속 움직이는 원형 통 두 개를 겹친 널판 위에 올라가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놀라울 만한데 여기서 끝이 아니라니, 설마 허리에 차고 있는 칼을 꺼내 돌리겠다는 건가? 바로 그것이었다. 두 개가 겹쳐 있는 흔들리는 널판 위에서 손으로는 세 개의 칼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칼이 진짜 칼은 아니겠지만 꽤 날카로워 보였기 때문에 더욱 아슬아슬했다.
어떻게 저런 것이 가능한 건가? 발 딛고 있는 널판 위에 서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균형을 잡기 어려울 것이 자명한 것인데 세 개의 칼을 번갈아 돌리며 몸을 움직인다니, 저 묘기를 연습하고 완성하기까지〈젊은 퍼포먼스 예술가〉는 남모르는 곳에서 얼마나 땀을 흘렸을 것이며, 수많은 실패를 거듭해서 지금 저 자리에 서서 당당히 묘기를 보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제대로 된 무대도 아니고 그냥 맨 땅바닥이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열정적으로 묘기를 보여주니 길 가던 사람들까지 죄다 모여 와 상당히 북적였고 박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저절로 지갑이 열렸으며 여기저기서 동전이며 지폐를〈젊은 퍼포먼스 예술가〉가 놓아둔 모자 위에 가져다 놓았다. 내가 또 놀랐던 것은 동전이나 돈을 던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거였다. 거기 있던 사람들 모두, 나름대로〈젊은 퍼포먼스 예술가〉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은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나도 500엔(한화 약 5,200원) 짜리 동전을 놓여있는 모자에 조심히 놓고〈젊은 퍼포먼스 예술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끔 만들어 보이는 용기를 보여주셔서 감사하다고, 불가능하기만 해 보이는 일들에 나도 도전해 보겠다고, 혹 안 될 때마다 오늘의 당신을 생각하면서 용기를 내보겠다고. "넘어져도 어쩔 수 없지만,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리려고 정말 열심히 연습했거든요." 언어에는 온도가 있다고 했으니, 그때 내가〈젊은 퍼포먼스 예술가〉에게 느낀 것은 진심의 온도였다
마지막으로 불꽃축제였다. 해가 기울자 여기저기 화려한 전광 장식이 불을 밝혔다. 어둑한 곳에 한 순간에 불이 들어오니 그것 또한 장관이었다. 얼마나 많은 전구를 달았을까가 생각나기도 했지만, 그 작고 다양한 전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갖가지 빛깔이 아름답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했다. 마치 '어두운 네 인생을 내가 앞으로 밝혀주마.' 하는 거 같은 어떤 뭉클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네가 걸어가는 순간순간, 발걸음 발걸음마다 빛을 비쳐줄 것이다.'라는 어떤 먹먹한 감동 같은 것 말이다. 온갖 아름다운 전구가 환하게 켜진 넓은 길을 걷다 보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세상 모든 순간이 나를 위해 빛을 비춰주는 것 같은 착각을 느낄 정도였다. 입에서는 계속 '우와!, 우와!'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바로 그 순간『하우스 텐보스』어디를 걸어도 그런 멋진 광경을 만날 수 있으니 가족끼리, 연인끼리, 친구끼리 온 모든 사람들 얼굴에 미소가 한가득인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삶이라는 깊고 깊은 우물 같은 곳에서 미소는커녕 찡그리고만 있어 미간에 주름이 잡힌 내게, 내 주변에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화를 내고 있는 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로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와중에, 살기 싫은 걸 억지로 산다며 넋두리만 하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 많은데, 저토록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 속에 내가 있다니. 모두들 나를 보며 미소 짓는 것이 아닌데 나를 보며 미소 지어주는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여기저기 행복해 보이는 사람뿐이었다. 곳곳에 마련된 쓰레기통, 쓰레기가 발생하면 바로바로 치우는 직원들, 어디를 가도 무엇을 사도 친절한 사람들. 일본 사람들이 친절하다고 하지만 나는 그 친절이 진짜 친절이 아닌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너무 친절한 것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나『하우스 텐보스』안은 일본 땅이지만 일본이 아닌 다른 새로운 나라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사람들의 얼굴이 달라 보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너무 흥분을 했기 때문에 들뜬 마음에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당시에 내가 계속 웃고 있는 걸 깨닫고 스스로 놀랐었다. 걸으면서 내가 웃다니, 흔하디 흔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내가 깔깔거리다니, 이게 얼마만인가, 이게 도대체 얼마만인가 하면서 스스로 되묻고 되물었었다.
그리고 대망의 불꽃축제가 시작되었다. 불꽃놀이는『하우스 텐보스』안에 선착장 바로 앞에서 펼쳐졌는데 아름다운 전광 장식과 달빛에 비친 강, 그리고 어두워지면서 선선해지는 바람까지 모두 어떤 절정을 기다리는 순간처럼 공기마저 달라진 느낌이었다. 안내자의 방송과 함께『하우스 텐보스』밤하늘에 불꽃축제가 펼쳐졌다. 일본은 불꽃축제의 나라이다. 여름 축제 기간이면 여기저기에서 불꽃축제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나는 가까이에서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하우스 텐보스』에서 펼쳐지는 불꽃축제는 바로 내 눈앞에서 쏘아 올려져서, 높은 하늘 위에서 번쩍번쩍 빛나다가 별똥별이 한꺼번에 떨어지는 것처럼 내 머리 위로 반짝반짝 그야말로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별똥별이 떨어져 내리면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빌어야 한다는 말이 문득 생각났다. 별똥별은 아니나 정말 별똥별 수 만개를 하늘에 흩뿌려놓은 거 같은 빛들이 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니 나는 소원을 빌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짧은 순간 수많은 소원을 빌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많은 소원을 마음속에 담고 있었나 싶게 나와 우리를 위한 소원들을 빌고 또 빌었다.
그러다 보니 생이 감사해졌다. 살아있다는 것이 고마워졌다. 남들이 뭐라든 나는 내 힘껏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다고, 그래서 지금 내가『하우스 텐보스』까지 와서 오늘 열정적인〈하우스 텐보스 가극단〉을 만날 수 있었고, 땀에 흠뻑 젖은 채로 구경꾼들을 즐겁게 해 준〈젊은 퍼포먼스 예술가〉를 만났고,〈불꽃축제〉를 만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런 날도 만날 수 있다는 놀라움에 몸이 뜨거워졌다. 사람에 상처 받아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어 어떻게 갈피를 잡지 못할 때,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 그 실망감으로 스스로가 원망스러울 때, 나와 같은 마음일 거라 생각을 하고 진심으로 대한 사람들에게 말한 내 고민들이 약점으로 돌아와 나를 허탈하게 했을 때, 최선을 다한 일들이 물거품처럼 허사가 되었을 때, 그 모든 힘든 일들이 불꽃축제와 함께 일제히 떠올랐다가 번쩍이며 불꽃축제처럼 사라져 갔다.
나는 그날, 호텔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하우스 텐보스 가극단〉배우의 열정적인 호흡과〈젊은 퍼포먼스 예술가〉의 묘기가, 눈을 뜨면 창밖으로 보이는 전광 장식이〈불꽃축제〉로 변해 내 눈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불현듯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희망 같은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오늘도 비지땀을 흘리면서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에 자신의 혼과 열정을 쏟아부으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반드시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며 그 보람으로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사는 용기를 얻는다는 것, 내가『하우스 텐보스』에서 깨달은 귀한 배움이자 위로였다.
무대의 배우들과 퍼포먼스 예술가와 불꽃축제 모두, 내가 아닌 관객들, 바로 '너'를 위로하고 있었다. 동시에 '너'를 위로하는 것은 공연을 하는 배우와 퍼포먼스 예술가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불꽃축제의 불꽃들이 자신을 태워 빛을 내 사람들을 즐겁게 할 때에 가치가 있는 것처럼 자신을 불꽃처럼 태워 무언가를 하고 그런 자신의 노력과 정성을 누군가 보아 주고 알아준다면, 그것은 생에 큰 위로이자 위안이 되며 삶의 용기가 된다는 것도 깊이 느끼고 깨달았다.
너를 위로하는 것이 곧 나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
사진제공: H. 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