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하시모토에서, 너와 함께.
내가 18살인 고3 때, 친한 친구가 저 세상으로 떠났다. 3월이었고, 그래서 3월만 되면 사방에 꽃이 피기 시작하는데도 나는 잘 웃지 않았다. 매해 친구가 떠난 바로 그날이 되면 아침부터 몸이 무거워서 일어나기가 어려웠고, 일부러라도 일을 만들어서 바쁘게 지내려고 했다. 당시에는 고3 생활이 막 시작했기도 했고 첫 모의고사를 직전에 두고 있던 터라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하고 두렵기까지 한 시기였다. 성격이 활발한 동기들은 더욱더 활발한 척하며, 소심한 동기들은 더욱더 자기 안으로 들어가는 척하며 갑자기 쏟아지는 고3의 중압감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던 바로 그 시기였다. 하늘나라로 떠나버린 친구는 중학교 때 처음 만났고 집이 같은 방향이라 등하굣길에 자주 같이 다녔다. 중학교가 마을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거리에 있었는데 늘 만원 버스였다. 나는 왜소하고 약골이어서 만원 버스를 타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학교에 가기도 전에 온몸에 진이 다 빠졌었다. 친구는 등치는 크지 않았지만 나보다는 살이 좀 있었고 중학교 때까지는 나보다 키도 컸기 때문에 늘 만원 버스 안에서 내가 조금이라도 숨을 잘 쉴 수 있게 온몸으로 다른 사람들을 막아주었다. 고등학교에 와서는 제2외국어 선택과목이 서로 달라 같은 반이 된 적이 없었지만, 집이 같은 방향이었으므로 등교는 몰라도 하교는 같이 할 때가 많았다. 무엇보다 야간 자율학습이 밤 10시에 끝났기 때문에 사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바람의 온도를 같이 느꼈고 밤하늘을 같이 올려다보았다.
친구와의 마지막 날을 기억한다. 석식을 먹고 야간 자율학습 2교시가 시작되기 직전이라 매우 시끄럽고 분주한 때였다. 내 자리는 창가 맨 끝 자리여서 친구와는 꽤 떨어져 있었는데 친구가 내 자리까지 와서 머리를 긁적이며 매우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할 일이 없었으므로 나는 의아했고 양치질을 하고 온 뒤라 입안이 상쾌하기도 해서 왜 그러냐고 밝게 이야기했던 거 같다. 친구가 우물쭈물했기 때문에 나는 약간 짜증이 나기 시작했고 2분 뒤면 감독관 교사가 입실하기 때문에 마음이 급해지기도 했다. 빨리빨리 용건만 말하고 가라는 것이 내 표정에 역력하게 드러난 것을 보고 망설이던 친구도 마음을 굳힌 듯 입을 떼었다.
“상혁아, 저기, 있잖아. 혹시…… 5,000원 정도 빌릴 수 있을까? 좀 급하게 쓸 데가 있어서. 없으면 괜찮고, 혹시 있으면…….”
솔직히 나는 화가 났었다. 그때 내게 5,000원은 무척 큰돈이었고 돈을 빌려달라는 거 자체가 싫기도 했거니와 하필 무슨 판단을 내리기에 매우 어수선한 때에 그런 말을 했다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나는 단번에 표정이 굳어졌을 것이고, 착하기만 한 친구는 그런 내 표정을 금방 읽었을 것이다.
“아, 미안해. …… 됐다, 괜히 이야기했다. 다른 애들한테 빌려볼게. 신경 쓰지 마. 미안.”
나는 더 화가 났다. 신경을 쓰지 말라니, 온통 신경을 쓰이게 해 놓고서 그런 말을 하는 이 바보 같은 친구 때문에 야간 자율학습 내내 친구 얼굴이 떠오를 거 같아 나는 서둘러 말했다.
“뭐가 미안해? 그리고 5,000원은 없고 3,000원 있어. 이거라도 가져가려면 가져 가.”
나는 지갑에 있던 3,000원을 꺼내 친구에게 내밀었다. 친구는 양손으로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괜찮다고 미안하다고 하며 서둘러 등을 돌려 제자리로 돌아갔고, 감독관 교사가 입실해서 더 이상 말을 붙일 수도 없어 나는 자리에 앉아야 했다. 차마 하기 어려웠던 말을 억지로 한 듯 빨갛게 변한 친구 얼굴이, 역시나 자율학습 시간 내내 생각났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우리가 친구로서 나눈 대화는. 그날을 끝으로 친구는 가출을 했고, 일주일 뒤 바다에 빠져 자살했다. 모의고사가 치러졌고, 선생님들은 친구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며, 동기들도 코앞에 닥친 입시로 모두 제 나름의 심각한 고민들이 있었으므로 친구의 자리는 빠르게 지워져 갔다.
그때 나는 충분히 슬퍼하지 못했고, 뭔가가 쑤욱 내 가슴 어딘가에 들어와 구멍을 낸 것은 분명한데 그 구멍이 정신없는 고3 생활의 나날들로 인해 슬쩍 가려졌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학교에 갔고, 수업을 듣고 밥을 먹고,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집에 들어와 자는 생활을 반복하다 대학입시를 치렀다. 다음 해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3월에 대학생이 되었고, 친구는 19살 고3에 멈춰있었다, 변함없이.
군대에서 제대를 하고 학교에 복학을 했을 때였다. 대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했고 여름이었다. 다른 날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한 날이었고 나는 과제 제출을 위해 리포트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발끝에서부터 열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아주 빠른 속도로 전신으로 열이 퍼져나갔다. 그렇게 더운 날도 아니었는데 나는 옷을 훌러덩 벗었다. 온몸이 너무 뜨거웠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자취를 한다고 해도 속옷 차림으로 집에 있을 때가 없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내가 러닝셔츠도 벗고 팬티 한 장만 걸친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던 것은 나로서도 매우 낯선 모습이었다.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온몸에 끼얹으며 샤워를 했다. 그런데도 몸에서 열이 가시지 않았다. 감기 기운도 아니었고 몸살 기운도 아닌데 나는 숨을 자꾸 헐떡이고 가슴이 무척 답답해 맨주먹으로 가슴을 두들겨댔다. ‘왜 이러지, 왜 이러지.’ 계속 그 말만 하다가 침대에 누웠다가 일어났다가, 창문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하면서 안절부절못했다. 어지럽고 토할 거 같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옷을 주워 입고 휘청휘청 걸어 택시를 타고 근처 대학병원 응급실로 갔다. 내가 땀을 줄줄 흘리면서 숨 쉬기가 곤란해 고통스러워하는 데도 응급실 접수처 직원들은 그런 모습을 너무나 많이 봐 와서인지 전혀 놀라워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접수처 직원은 지금 응급실에 남는 침대가 없으니 접수하고 응급실 밖 대기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다. 나는 직원하고 싸울 힘도 없었고 그럴 정신도 아니었기 때문에 사촌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사촌동생이 아르바이트를 하다 말고 달려왔다. 사촌동생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그때까지 간신히 버티고 있던 어떤 긴장의 끈 하나를 놓았고,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응급실 의자에 거의 눕다시피 있는 나를 보고 사촌동생이 하얗게 질려서 접수처 직원들에게 환자가 왜 여기에 이렇게 있냐고 따지고 실랑이를 하는 것까지는 기억이 났지만, 다음에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나는 응급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몽롱한 정신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으니 피를 뽑아가고, 혈압을 재고, 심전도를 하는 등 여러 가지 검사를 했고, 사촌동생의 부축을 받으며 엑스레이 사진을 찍으러 가기도 했고, 소변검사를 위해 소변을 검사용 컵에 담으면서 정신을 차려갔다. 사촌동생이 아무래도 불안했는지 아버지에게 연락했고 아버지도 일 하다 말고 먼 곳에서 달려왔다. 사촌동생이 놀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내 곁에 앉아 있었고, 아버지는 앉지도 못하고 서서 퀭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는데 나는 왜 눈물이 나는지도 모르고 계속 울고 있었다. 사촌동생이 왜 우냐고, 많이 아프냐고 물었지만 나는 대답할 힘이 없이 눈물만 죽죽 흘렸다. 울다 보니 먼저 가버린 친구가 떠올랐다.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 시신이 안치되었다는 병원에 달려갔을 때도 친구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정말 친구가 죽은 것인지 믿기지 않았다. 누군가 아주 큰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만 생각을 했었다. 친구 부모님도, 친구 누나들도 모두 나에게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말이다. 당시 친구 담임교사였는지 학생부(지금의 생활지도부) 교사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학교에서 교사가 소식을 듣고 영안실에 와 있었다. 그 교사가 멍하니 서 있는 내 양어깨를 꽉 붙잡더니, 그만 울고 정신 차리고 집에 가라고만 했다. 교사의 눈은 빨갛다 못해 실핏줄이 터진 것처럼 새빨개져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빨간 눈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은 그 교사가 말을 해줬기 때문에 알았다.
"아니, 아니요, 친구 보고요. 친구 보고, 친구를 보고 가도 가야 할 거 아니에요? 네? 왜요? 왜 죽었는데요? 선생님, 얘 왜 죽은 거예요? 얘가 왜 저기 냉동실에 들어가 있냐고요? 네? 말씀 좀 해보세요?"
나는 뭐라고 뭐라고 계속 중얼거렸고, 그때 아버지가 소식을 듣고 영안실로 급히 와서 나를 안다시피 해 강제로 끌고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친구가 왜 자살을 했는지,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알려고 시도했지만 성적비관 자살일지도 모른다는 뚜렷하지 않은 소리만 들었을 뿐, 정확한 사인은 여전히 모른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고 알만한 사람들에게 물어도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세상이 다 원망스러웠고, 나도 따라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지만 내가 죽어서 친구가 살아난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내가 죽어 나로 인해 지금의 나처럼 고통스러워할 사람들을 생각하니 그럴 수도 없었고, 그럴 용기도 없었다.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아버지의 퀭한 눈을 보자 그때가 도도록이 되살아나며 닭살이 돋아났다. 내가 몸을 웅크리자 사촌동생이 모포를 덮어주려고 했지만, 몸에 열이 있으니 모포 덮으면 안 된다며 간호사가 주의를 줬기 때문에 사촌 동생이 손에 쥔 모포를 놓았다.
'그때, 5,000원을 빌려줬어야 했어. 3,000원이라도 손에 쥐어줬어야 했다고. 그 돈이라도 있었으면 뭐라도 사 먹었을 거 아냐. 그 바보 같은 게, 3월이면 바다가 얼마나 차갑냐고…… 돈을 줬어야 했어, 그래야 했는데, 나는 정말 친구라고 할 수도 없고, 나는 정말…….'
나는 계속 중얼거렸는데 아버지와 사촌동생이 못 알아듣겠는지 뭐라고 하는 거냐고 되물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끙끙거리는 신음소리 정도로 들렸을 거라 생각한다. 내가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하는 거라고 생각이 들었는지 아버지와 사촌동생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응급실 여기저기에서는 피 칠갑을 한 사람들이 있었고 고통에 못 이겨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있었으며, 그날 대형 화재가 일어나 화상 환자가 많았기 때문에 아버지와 사촌동생은 정신이 없었을 거고, 내가 나만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알아들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
2시간쯤 지나자 기초 검사가 결과가 나왔다. 결론은 나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거였다. 체온도 본인은 열이 난다고 하지만 약간의 미열이 있을 뿐 혈압이며 심전도 · 피검사 · 엑스레이 사진 모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나는 아픈데, 이토록 아파서 말조차 제대로 안 나오는데, 응급의는 이상이 없으니 그만 퇴원해서 나가 달라고 했다. 나보다 더 급한, 정말 생과사가 분초 사이에 결정되는 사람들이 밀려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수면제를 처방해달라고 했다. 이런 고통 속에서 내 자의대로 잠들 수 없다는 본능적인 자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고 나면, 한숨 푹 자고 나면 괜찮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강했다. 나를 담당한 응급의는 스트레스성 상세불명의 호흡곤란 및 통증일 가능성이 높아, 그런 이유로 수면제를 처방해주되 딱 5일 치만 줄 거고, 절대 한꺼번에 다 먹으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하지만, 나는 집에 와서 5일 치 수면제를 입에 다 털어 넣고 겨우 잠자리에 들었다. 약기운으로 잠에 빠져들기 직전, 내가 어떻게 될까 봐 내 방 밖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고 있던 사촌동생이 살짝 내 방문을 열었고, 아버지도 고개를 들이미는 것이 느껴졌다.
"작은 아빠, 오빠 이제 괜찮은가 봐요. 이제 잠드나 봐요. 오빠 괜찮겠지요?"
"응, 자게 두자. 괜찮을 거야. 좀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야."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아주 미안해졌다. 이게 무슨 난리이며 아무리 아버지고 사촌동생이지만, 이런 민폐를 끼치다니, 이건 아주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점점 아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굴을 묻은 베개가 축축해져 있어 그때까지 계속 울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내가 20년 전의 이 일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몸은 뜨겁고 호흡하기는 힘들고 아픈데 아무 이상이 없다는 불가사의한 일이 그때도 처음이었고 지금까지도 없었기 때문이다. 무병에 걸리면 아무 이유 없이 아프다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생 때 나는 너무 마르고 기운이 없어 보여 엄마가 걱정을 많이 했었고 없는 형편에 무리해서 녹용을 많이 넣은 한약을 지어 보낸 적이 있었다. 한약을 먹고 일주일쯤 지난 뒤에 위와 같은 일련의 일들이 벌어진 것이었으니 그 한약을 먹고 부작용이 일어나 몸에 이상 반응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어찌 되었든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잊었다고 생각한 뚜렷한 사실을 하나를 기억해냈고, 고3 때 내 가슴에 뭔가 쑥 들어와 구멍이 난 공간을 진지하게 응시하게 됐다. 당시에 충분히 제대로 슬퍼하지 못한 마음의 괴로움도 어느 정도 쏟아낼 수 있었다.
얼마 전 지인의 장모님께서 골수이식을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백혈병으로 너무나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지인은 내게 화장터에서 하루에 매일 40구의 시신이 화장된다고, 생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인생이 허무하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나는 그 메시지를 보고 지인의 장모님을 화장한 화장터에서만 하루 40구면, 전국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루에 죽는지, 그 숫자를 가늠해보니 점점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뭐라고 뚜렷하게 설명이 안 되는 먹먹함에 가슴이 아팠다. 그렇다면 한 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며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유족이 되는지 그 숫자를 셀 수도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2019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한 해 사망자는 295,110명이고, 일일 사망자는 808명, 암 사망자는 81,203명, 자살자는 13,799명, 교통사고로는 4,221명이 세상을 떠난다고 한다. 1년에, 단 1년 만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고, 지금 이 순간에도 808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죽어 간다. 한 해 자살자가 13,799명이라는 것이 믿기는가? 방금까지 살아있었던 사람들이 느닷없이 교통사고로 4,221명이나 죽는 것을 알고 있었던가? 암의 고통에 무려 81,203명이나 목숨을 잃는다는 것을, 그에 딸린 가족을 2명씩만 단순 계산해도 그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가 된다. 그 안에는 내 가족 · 내 친구 · 내 지인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고, 다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주변을 가만 살펴보면 그렇게 세상을 덧없이 떠난 사람들 가까이에 있던 주변인들이 바로 나이고 우리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유족들이다. 자살자 가족이거나 지인, 각종 질병과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들이 나와 우리 주위에 당연히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모두 크고 작은 슬픔을 가슴속에 감추고 산다. 사람에 따라 슬픔이 드러나는 방식이 다를 뿐, 술을 마시거나, 뭔가에 중독이 되거나, 생각지 못한 곳으로 삶의 반경을 틀어버리거나, 스스로를 자해하거나, 그래서 현실에 발을 담그지 못하고 그만 정신을 놓아버리는 사람들도 무수히 많다. 우리는 모두, 슬픔 속에 있다. 그 깊은 슬픔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고무공처럼 튀어나와 우리의 삶을 비틀어놓을지 모를 일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떠난 사람은 떠난 사람이고, 남은 사람은 살아야 되지 않겠냐고, 맞다. 살아야 한다. 어떤 이유에서건 나와 우리 곁을 떠난 소중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것을, 끊임없이 말하고 전해야 한다. 하늘나라로 먼저 간 이들과 함께한 기억과 추억이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라고, 지금도 여전히 나와 우리 곁에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기억과 추억이 있어 오늘의 내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 주어진 삶에 감사하고 고마워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중학교 때 만원 버스 안에서 사람들에 눌려있었을 때, 먼저 하늘나라로 간 친구가 없었다면 나는 너무나 힘든 중학교 생활을 보냈을 것이다. 고등학교 내내 가난하고 불행한 환경 탓으로 늘 괴롭기만 했던 내게, 대학에 들어가서 지금 힘든 상황을 웃으면서 이야기하자고 말해준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민감하던 시절 고비고비마다 넘길 수 있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는 나에게 '너는 반드시 글 쓰는 사람이 되어 사람들이 하고자 하나, 하지 못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결코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먼저 간 친구를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이 아프고 나이가 들수록 눈물샘이 헐거워졌는지, 툭하면 운다. 그래도 훗날 내가 하늘나라에 가서 친구를 만나게 되면, 나는 생의 순간순간 너를 기억하고 있었다고, 나는 너를 잊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말을 할 수 있을 거 같다. 그 희망으로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살 것이다.
살다 보면 정말 앞이 칠흑같이 어둡고 길어 언제 끝날지 모를 터널을 통과하는 것 같은 때가 있다. 나도 그만 이 세상 떠나버릴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고, 그럴 때마다 수첩에 메모해 둔 다음과 같은 글귀를 읽고 또 읽으며 버텨냈다. 저자의 책 내용 중 '자살을 왜 하는가'라는 편지글 내용이다. 사실 전문을 옮기고 싶었으나 그러면 글이 너무 길어질 듯 해, 가장 내 가슴에 와닿았던 문장만 옮겨본다.
-‘막다른 골목’이라는 한계의식은 매우 주관적인 것이다. 우울할 때, 절망할 때 그 한계는 매우 좁아 보인다. 모든 것이 어둡고 앞이 보이지 않고 다 끝났다는 생각뿐이다. 그러나 날이 개면 안 보이던 수평선과 아름다운 섬과 들이 보이듯이, 우울한 감정이 걷히면 내가 왜 그렇게 모든 것을 절망적인 시선으로 보았던가 놀라게 될 것이다. 앞이 캄캄할 때는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다. 섣불리 잘못된 기분에 따라 판단하고 결정하여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목숨을 버리면 이승에서 아무 일도 바꾸어 보지 못한다. -
『정신건강 이야기, 이부영 의학박사, 집문당, 2014. 11. 20』
친구와 같이 느꼈던 바람도, 같이 올려다봤던 별도 여전히 아무 말이 없다. 그때와 다를 바 없는 바람이 불고, 별이 떠오르는데, 내 친구는 내 곁에 없다. 가만 친구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너는 나에게 이토록 생생한데,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는 것이 그저 아프고 쓰릴뿐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일본 하시모토에서 마음이 스산해질 때마다 하늘을 본다.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한국의 하늘과 일본의 하늘 모두, 푸르고 드넓은 것은 같기 때문에 하늘 아래 모든 것이 결국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여유 있는 생각도 든다. 친구와 함께 하지 못한 세상, 나는 저 세상으로 간 친구의 못다 한 삶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볼 생각이다. 그것은 아마 내 삶을 충실히 살다가 어느 순간 하늘에서 나를 부르면 가벼운 마음으로 그 부름에 응할 수 있다는, 어떤 용기와 믿음일지도 모르겠다.
이부영 박사의 말대로 목숨을 버리면 이승에서 아무 일도 바꾸어 보지 못한다. 그리고 이승에서 내가 바꿀 수 있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삶의 이런저런 괴로움으로 좁고 어두운 막다른 골목에 있는 누군가에게 내가 전할 수 있는 글을 통해 손을 내미는 것, 내가 내민 손을 잡지 않는다면 내가 먼저 가서 주춤거리는 그 손을 덥석 잡아 붙들어 둘 수 있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살아야 하고 글을 써야 한다고 믿는다. 푸르고 푸른 하늘 사이로 구름이 있고 그 구름 사이로 내 친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아, 친구가 자신의 몫까지 내게 열심히 살아달라고 말을 걸어주는 것 같아, 또 그 구름에 내가 포근히 안겨있는 거 같아 나는 오늘도 힘을 내서 글을 쓴다.
그래서, 나는 너를 잊을 수 없다. ■
사진제공: H. 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