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공정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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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과 문명사회
“정글과 문명사회가 있다면 어느 곳이 더 공정한 세상일까?"
정글은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어떻게 보면 가장 공정한 사회는 정글이다. 타고난 신체적 조건만으로 생존 여부가 결정된다. 어떤 변명도, 합리화도 필요 없다. 오늘 사자보다 잘 달릴 수 있는 얼룩말은 오늘 하루의 생명을 얻게 된다. 사자에게도 이 냉정한 기준은 예외가 없다. 오늘 덫에 걸려 발목을 다쳤다면 이것으로 사자의 삶은 그만 끝나고 만다. 정글은 힘의 원리 앞에 획일적으로 공정한 사회이다.
우리가 사는 문명사회는 어떨까? 인간이 정글에서 살아남아 세상의 주인이 된 것은 문명이라는 탁월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코끼리만큼 크고 힘세지 않고, 맹수들처럼 빠르고 강하지 않지만, 어떤 동물도 갖지 못한 문명을 이룸으로 해서 지구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문명은 명백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복잡성을 가지고 있다. 문명의 가장 큰 특성은 공동체성이다. 서로를 배려하고 돌보는 특성. 하지만 공동체성이란 기준은 때에 따라 매우 복잡다단한 상황을 만들게 된다. 어느 문명은 왕 중심의 군주제도를 택하고, 다른 문명은 시민 중심의 사회가 형성되었다. 부계 중심의 사회가 있는가 하면, 모계 중심의 사회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다양한 사회 구성이 있음에도 공통된 하나의 특징은 문명의 중심세력은 권력을 독점하고, 권력에서 소외된 계층은 생존의 위협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문명사회는 다양한 구성 룰에 따라 정글보다 더 많은 불공정이 존재하게 된다.
평등이란 모두 같음 일까? - 공평이 아닌 공의
공정하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뭘까? 공정을 생각하면 모두가 평등한 하나의 인격 이란 정의를 떠올리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만민의 인격은 모두 평등하다는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경우다. 그런데 또 한 부류는 법 앞에 평등함을 생각하기도 한다.
인격적 평등을 이야기하는 부류는 100m 달리기 시합을 할 때 나이별, 성별 핸디캡을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체적, 사회적 결핍을 고려해서 대등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경주를 생각하는 거다. 권투에서 체급별 경기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법 앞에 절대적 평등을 주장하는 부류는, 모두가 같은 거리를 달려서 엄격히 기록만으로 순위를 정해야 된다는 입장이야. 법은 법이라는 생각이다. 어떻게 보면 가장 문명적인 방법인 합의에 의한 법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사회가 가장 정글을 닮아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나는, 우리가 기대하는 평등한 사회라는 보편적 그림은 인격적 평등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사회가 되는 거다. 돈이 좀 없어도, 배움이 좀 부족해도, 권력이 없어도 자신의 삶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고 최선의 경주를 하는 것만큼 행복할 수 있는 사회가 되는 것이 평등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영화나 문학작품에서 휴머니즘 충만한 감동 스토리를 만날 때 깊은 공감을 느끼고, 그런 작품들이 계속 만들어지는 것이 인간 본연의 갈망에 인격적 평등을 추구하는 유전자가 심어져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우리는 이런 개념을 평등을 넘어서 ”공의”라는 말로 표현한다. 단지 모두가 같은 평등함에 머무르지 않고 공의가 충만한 사회를 정의로운 사회로 규정한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에 나오는 에덴동산, 즉 서영 철학의 파라다이스는 공의가 충만히 이루어진 사회이다. 하지만 현실 인간사회 어디에도 파라다이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출발점 - 인정
질병의 치유는 정확한 진단과 인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질병, 공의가 무너진 원인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있어야 극복의 단서를 잡을 수 있다. 내가 아무리 ”나는 건강해 “ 를 외친다고 해서 내 병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간혹 플라세보 효과(위약효과-약을 먹었다는 심리적 효과 실제 통증 완화로 나타나는 현상)에 의해 잠시 고통이 줄어들 수는 있겠지만, 자유 치유능력의 한계를 넘어선 몸은 서서히 죽음을 향해 살 수밖에 없다. 치유를 위해서는 무시가 아니라 인정이 필요하다. 내가 이만큼 아프구나. 그래서 치료가 필요하구나를 인식하는 과정이 필요하구나! 인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세상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 인류 역사에 공정한 문명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시도가 있어 왔지만, 21세기를 사는 현재도 여전히 절대적인 평등을 이룬 문명은 없다. 자본주의는 재물(돈) 앞에 평등할 수 없고, 공산주의는 공산당(절대권력) 앞에 평등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군중으로 의해 정의가 왜곡되고, 사회주의는 인간 본성인 자기 중심성의 현실을 망각함으로 사상누각을 짓는데 머물렀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공정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내가 아니라고 눈을 감아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세상은 공정하지 않다 “는 변할 수 없는 세상 이치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첫걸음이다.
공정한 세상을 향한 행동지침 - 두 개의 잣대를 하나로
공정하지 못함은 나로 인해 더 증폭되는 속성이 있다. 나를 재는 잣대와 상대를 재는 잣대의 눈금이 다른 것이다. 누군가의 탈세에는 불같이 화를 내지만, 나는 절세를 한 것이라고 정당화하는 생각들. 세금을 줄이기 위해 고가의 차량을 회사자금으로 구입하고, 엄연한 개인 용도의 차량 구매비용을 회사의 운영비로 상계함으로 세금을 줄이는 게 탈세일까? 절세일까? 이건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흔히 이용하는 방법이지만,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도 이런 두 개의 서로 다른 잣대로 세상을 대하는 부분이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회사에서 근무시간 이외에 일을 시킨다고 투덜대면서, 업무 시간에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잠깐씩 또는 노골적으로 몇 시간씩 업무를 방관하는 것, 아침 출근 시간 지각한 직원에게 회사 규율을 지키지 않는다고 꾸짖는 상사가 금요일 퇴근 직전 업무 지시를 하면서 월요일 아침에 결과 보고를 요청하는 것, 이런 것들이 모두 우리가 무의식 중에 행하는 두 개의 잣대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 속에 있는 이런 작은 틈새를 그대로 방치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 삶 속에 커다란 크레바스가 되어 어느 틈엔가 상대방에 갑질을 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그런 관계가 얽히고설키면 우리 주변의 공의는 점점 무너져 문명 속에 있는 정글이 되어 가는 것이다.
공정한 세상을 향한 행동지침 제안한다. ”자신 안에 있는 두 개의 잣대를 하나의 눈금으로 조정하라 “
공정한 세상을 향한 두 개의 미션
세상은 공정하지 않다. 이건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공정하지 못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이 공정하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누구에게나 두 개의 미션이 주어져 있다. 하나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 너의 삶을 살아라!
우선,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는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전개된다. 그래서 어떤 삶을 살아야 된다고는 누구도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다. (누군가 그런 걸 우리에게 주장한다면 그건 분명 사기꾼이던지 사이비 교주다). 하지만, 어떤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던지 추구하는 삶은 긍정적이고, 조금씩 나아지는 삶을 향해 살아가야 한다. 삶의 어두운 면을 부각하고, 염세주의적인 삶을 산다고 해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우리의 우울한 삶을 끝 가지 공감해 주는 일은 없다. 첫 번째 미션에 "너의 삶을 살아라!"에 대한 나의 제안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힘을 쓸 것“
또 하나, 공의를 이루라.
함께 산다는 것은, 나의 삶만큼, 이웃의 삶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불공정한 제도, 불공정한 권력, 불공정한 관습이 너무 팽배해 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주변의 이웃에게 공정한 자세를 취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사는 소비자가 되었다면, 고객으로서의 나의 권리만큼 판매자의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가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상품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지, 상대방의 인격을 구매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내가 편의점 사장이라면, 아르바이트 직원의 시간을 사는 거고, 아르바이트 직원의 입장에서는 내 시간을 제공하고 사장으로부터 급여를 받는 것이 현실상황이다. 사회제도가 불공평하다고 생각된다면 제도가 보증하는 권리보다 조금 낮은 권리를 먼저 주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제도는 이 세상이 만든 최소한의 기준이다. 그 기준을 맞추는 것은 법을 지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야기했듯이 어떤 법도 공정한 법은 없다. 모두가 법이 보장하는 최대의 범위로 나의 권리를 주장하면 항상 테두리에서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누군가 먼저 법적 테두리 안쪽에서 경계선을 긋는 다면, 서로의 경계선에서 사이에서 여유공간(안전지대)이 생긴다. 이 여유공간이 이 사회가 조금 더 더 공의로운 세상을 향해 갈 수 있는 단초(시드머니)가 될 수 있다.
공정한 사회로 가기 위한 제안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에서부터 관습, 제도의 테두리보다 조금 낮은 기준의 내 권리를 주장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