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기쁨, 때로는 아픔
만남
어떤 사람은 “가족”이라는 단어만 생각해도 눈물이 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가족’이라는 단어가 고통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가족’이라는 단어에서 아련한 흙냄새를 느끼기도 한다. 그만큼 가족은 모든 사람에게 정말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운명적인 존재다,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가족을 주제로 한 영화로 유명하다. 그의 영화 중 “어느 가족”은 내 인생 영화 중 한편이 됐다, 서로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만들고 살아가는 이야기인데 가족의 필수 조건이 혈연인지, 서로의 필요에 대한 배려인지를 고민하게 한 영화다.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일반적 상황에서 가족은 혈연관계를 대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는 세 번의 중요한 만남이 있다고 한다, 첫 번째 가족과의 만남, 두 번째 배우자와의 만남, 세 번째 인생 멘토와의 만남이다. 그중에서 어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만남이 세상에 ‘나’라는 존재를 있게 한 가족과 만남이다. 비록 부모의 얼굴조차 모르고 자란 천애 고아라 하더라도 그 생명의 근원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고 그 관계가 바로 가족이다.
가족-가장 가까운 이웃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의도적으로 가족을 이웃이라는 분류에 넣었다. 좀 예민한 성향의 독자라면 이 대목에서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가족을 왜 이웃으로 분류하는 거지? ‘나’과 ‘너’는 한 공동체이다. 성경에 나온 표현에 따르면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가족은 협력 공동체이다. 벼농사를 지을 때 파종을 하고 모종이 어느 정도 자생력이 생기기까지는 처음 심어진 환경을 유지해 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자란 후 쌀을 수확하기 위해서는 모내기를 통해 자신만의 의 자리에 다시 심어져야 하는 것과 같다.
‘나’라는 존재는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통해 자생력이 생기기까지 보호를 받는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자신의 자리를 찾아 떠나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하나의 이웃이 되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웃은 아주 특별한 이웃이다. 어떤 이해관계나 논리적인 관계로 규명 지을 수 없는 관계. 가족은 생명의 토양이고, 지금의 내 모습은 내 가족을 양분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좋은 가족과 만남 - 축복
가족을 생각하면 어떤 감정이 느껴지나? 그 감정이 긍정의 감정이라면 정말 큰 축복을 받은 것이다. 불행하게도 세상에는 아픈 가족이 참 많다.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가족도 그 안으로 조금 들어가 보면 저마다의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엄마와 아빠의 관계에 어려움이 있거나, 형제 관계에 벽이 있거나, 경제적인 궁핍함으로 힘겹거나, 가족 중에 육체적 또는 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는 경우, 또 돈이 너무 많아서 갈등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세상의 사람들은 무수히 많은 갈등 속에 가족을 이루어 살아가고 있다.
가족은 하나의 토양 이다. 누구 하나라도 결핍이 생기면 모두가 흔들리는 속성이 있다. 그런데 가족을 생각할 때 긍정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이게 얼마나 큰 행운인가. 나는 이런 가족을 좋은 가족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좋은 가족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우리 가족은 좋은 가족이야’라고 말할 수 있다면 우선 당신은 부모님의 분투와 지혜에 감사를 드려야 한다. 좋은 가족의 출발점을 좋은 부부관계에 그 시작점이 있기 때문이다. 부부간 서로에 대한 배려와 신뢰, 그리고 일관성 있는 태도, 서로에 대한 긍정적 경쟁을 통한 멈추지 않는 성장과 끊임없는 살핌이 좋은 부부관계를 만들고, 좋은 부부관계 안에서 좋은 가족은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그리고 너의 형제들의 배려를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잘해서가 아니고 가족들이 잘 배려해 줘서 지금의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리고 당신도 가족을 향한 배려심을 끝까지 유지해야 한다.
독립 - 좋은 가족 만들기
당신은 이제 어엿한 성인이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또 다른 가정을 세워 가야 한다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부모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하라고 권하고 싶다. 완전한 독립이라는 것은 경제적 독립과 생활공간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 많은 부모는 자식을 옆에 두고 싶어 한다.
부모의 눈에는 자식은 언제나 돌봐야 할 대상이다. 80살 먹은 노모가 50살 먹은 아들이 현관을 나설 때 길 조심하라고 걱정을 하는 게 부모의 마음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유로 같이 살아야 할 핑곗거리를 찾는다. 가장 설득력이 있는 제안은 경제적 유익이다. 밖에 나가서 살려면 방값, 공공요금, 식비 등 모든 비용이 더 많이 발생하니까 그것을 모으기 위해 같이 살기를 제안한다. 하지만 생활공간을 같이 하는 한 당신은 여전히 부모에게 의존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밀린 설거지, 밀린 빨래를 누군가 해 줄 때 당신은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고 누군가의 노고를 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자신의 삶을 가족을 위해 헌신해야 된다. 물론 그 헌신 자체가 행복일 수도 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회의감이 불현듯 다가오면, 가족을 위해 기꺼이 감내했던 희생의 삶이 의미를 잃고 무너질 수 있다. 그때 가족들은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한 사람의 묵묵한 희생으로 어제까지 아무 문제가 없었던 가정이 어느 순간 무너져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제안한다. 30대가 되기 전 당신의 삶을 온전히 독립하기를. 그리고, 부모님은 또 다른 삶을 시작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 지기를 제안한다.
(참고로 30세라는 기준은 우리나라에서 독립 세대주가 될 수 있는 법적 기준이다.)
너의 부모님 세대, 곧 나는 사회생활의 첫 번째 구간(평생직장의 정년)을 마무리할 때쯤이면 인생도 거의 마무리 단계가 될 그것으로 생각했던 세대이다. 하지만 막상 은퇴를 바라보는 시기가 되니 세상이 많이 변했고, 은퇴가 인생의 황혼이라는 생각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다. 평균 연령 80을 넘는 이 시대는 인생을 젊음, 노년의 두 개의 단계로 정의하면 안 된다. 30~50대의 시기가 생활을 위해 삶을 소모하는 시기라면 60~70은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를 위해 살아갈 수 있는 시기이다. 그리고 그 후 몸도 마음도 잔잔한 삶을 누리는 진정한 노년기가 오는 거다. 이제 좋은 가정에서 자라왔음을 감사하며 부모님의 삶을 위해 독립을 선언해 보는 건 어떨까. 20대 후반의 자녀를 둔 나도 이런 주장에 대해 주저하게 되는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앞으로의 시대를 생각해 본다면 이 제안은 꽤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한다. 독립은 덤으로 경제적인 유용성도 있다. 당장 생활비가 더 들어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경제적 삶을 스스로 계획하고 운영하는 법을 일찍 배우고 실천하는 것은 현재의 작은 실리를 얻는 것보다 확실히 더 유익하다.
축복, 나눔
좋은 가족을 가진 당신의 삶에 대해 제안을 한다면. 축복을 세상에 나누는 일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기독교 초기 공동체가 온갖 박해와 어려움 속에서도 폭발적인 생명력을 지닐 수 있었던 이유는 이웃을 생각하고, 한 명 한 명의 인격을 존중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삶을 방식 때문이다. 그런 생활방식이 당시 로마와 주변 사회의 눈에 경이로워 보였던 것이다. 노예를 하나의 인간으로 인정해 주고, 여자와 아이를 한 인격체로 인정하며,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초대 기독교인들의 생활양식은 현재의 기준으로 봐도 고귀한 것인데, 아직 군주국가의 형태를 가지고 있던 2000년 전 로마 시대의 눈으로 본다면 혁신적이 일이었다.
아픈 만남 - 상처 입은 가족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인생이 TV 채널과 같다면 어떨까?"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암담한 현실이 이어질 때, 리모컨을 눌러 채널을 돌리듯이 암담한 드라마가 예능프로로 인생의 장면을 바꿀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이다.
어린 시절에 아픈 기억이 있다. 나는 삼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고 위로 4살 터울의 형이 있었다. 형은 ‘간질’이라는 희소 질환을 앓고 있었다, 간질은 일종의 뇌 질환이다. 아토피가 외부 자극에 과민반응을 하는 피부질환인 것처럼, ‘간질’이라는 질환은 뇌신경이 어떠한 조건에 과민반응을 해서 발작 증상을 일으킨다. 멀쩡히 길을 가다가, 밥을 먹다가, 공부하다가 갑자기 발작이 오면 거품을 품으며 사지 경련을 하며 쓰러진다. 하지만 진짜 나를 힘들게 한 건 이런 신체적 증상이 아니었다, 이런 발작 증상은 10여 분이 지나면 안정을 찾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상시 모습을 찾는다, 하지만, 발작 증상을 완화하기 위해 복용했던 약은 일종의 신경안정제 같은 역할을 해서 극도의 정신적 불안정 상태를 만들었다. 술에 잔뜩 취한 사람과 대화를 시도해 본 사람은 끝나지 않는 공허한 되돌이 상황을 이해할 것이다. 집에는 소란함과 사건 사고가 끊임없이 이어져졌고, 나에게 집이라는 곳은 가능한 한 오래 머무르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우리에게 가족은 이런 것이다. 내가 원해서 만들어진 관계가 아니고, 불편하다고 해서 떼어 버릴 수도 없는 존재이다. 만약 우리에게 힘이 되고, 의지가 되는 가족을 곁에 두었다면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때로는 아픈 만남도 있고 이 만남도 우리에게는 부인할 수 없는 소중한 가족인 것이다.
아프지만 사랑해
인간사회가 야생 세계와 다른 것 중의 하나는 약자를 보호하는 사회적 장치가 있다는 것이다. 야생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동물들의 세계에서는 무리들보다 평균적으로 병약하거나 결함이 있는 개체는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다. 제한된 먹이와 척박한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생존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건강한 개체를 우선 돌보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다. 하지만 인간은 약한 자를 오히려 더 보호하는 제도를 만들어 왔다. 그것은 인간만이 물질세계를 초월해서 영적인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물질세계의 결여는 주변 공동체에 의해 보상되어야 한다. 이것을 우리는 인권이라고 한다. 건강한 사회는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이다. 이상적인 사회는 모든 사람의 인권이 완벽히 보호되는 곳이다. 하지만 지구 상 어느 그곳도 완벽한 인권사회를 이룬 나라는 없다. 그러면 약한 자의 인권을 최대한 보호하는 역할은 누구의 몫일까? 바로 가족의 몫이다.
당신의 가족을 아프게 하는 건 뭘까? 어떤 것이 당신을 지치게 하고, 절망 속에 빠뜨리고 있는 것일까?
상황과 정도는 다르겠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가족의 상처를 보며 살아가고 있다. 어느 가족도 아무런 상처 없이 완전무결한 상태로 살아갈 수는 없다. 그런 일은 이 땅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어떤 가족은 상처를 자꾸 후벼 파거나, 방치해서 점점 심하게 커져가고, 어떤 가족은 상처를 잘 살피고 정성스럽게 치료해서 견딜만한 상태로 만들어 가고, 또 어떤 가족을 그 상처를 통해 외부의 공격에 더 단단한 가족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저마다의 방법으로 상처를 쓰다듬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가족의 상처에 가장 효과 좋은 치료약은 긍휼의 마음과 사랑이다.
치유를 위한 여정
당신의 가족을 생각해 보자. 어떤 마음이 떠오르는가. 그 마음에 따라 치유를 위한 여정은 다르게 펼쳐진다.
하나, 아프지만, 사랑해
감당할 마음이 있고 감당할 만해 하지만 고통이 있다. 가족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이경우는 희망이 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 있기에 인내할 수 있고, 작은 변화에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 그 짐이 너무 벅차면 견디다 못해 증오로 발전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이미 충분한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약간은 관찰자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을 권한다. 중학교 때 그렇게 어렵기만 하던 방정식이지만 시간이 지나서 보면 왜 그걸 이해하지 못했는지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다. 조금 먼발치에서 보면 사실 큰 문제가 아닌 것도 그 소용돌이 안에서는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책임감과 자책감을 잠시 내려놓고 고통의 대상을 관망해 보는 자세를 취해보는 것도 좋다. 좀 냉정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런 자세가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작은 전환점이 될 수 있다.
하나, 지긋지긋해, 생각만 해도 화가 나
지금 화가 많이 났다. 너무 많은 짐을 지다가 지쳤을지도 모른다. 가족들 모두가 당신에게만 기대고 모든 것을 당신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이 경우 우선 당신의 화를 해결해야 된다. 잠시 가족을 떠나 보는 건 어떨까? 당신 없이는 도무지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진상 같은 가족이지만 결국 인생은 다 각자의 삶의 무게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경제적인 문제라면 국가 기관이나 이런저런 단체에 도움을 좀 청해보고, 정서적인 문제라면 훌쩍 떠나서 당신을 먼저 돌아보면서 화를 분출해 보는 것을 제안한다. 당신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가족이 될 수 있도록 당신 스스로를 가족과 분리해 보는 건 어떨까? 당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면 어차피 감당해야 할 자신들의 삶이다. 가족들에게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하고 훌쩍 떠남을 실천해 보는 건 어떨까?
하나, 하루하루 사는 게 힘들어. 당장 현실적인 도움이 필요해
주변의 도움을 청해보자, 의외의 도움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특히 경제적 어려움이라면 적극적인 도움 창구를 찾는 게 필요하다, 당신이 속한 지역 주민센터 나 종교단체는 좋은 창구가 될 수 있다.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신뢰할 만한 창구를 찾아 도움을 청해보자, 그리고 당신은 또 다른 이웃의 도움의 창구가 되는 것이다. 서로를 돌보는 윈윈의 사회를 꿈꾸어 본다.
하나, 죽. 고 . 싶. 어
외로워, 사실 많은 친구가 필요한 건 아니다. 내 말을 묵묵히 들어주고, 그 말들이 어디론가 번져 나갈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안전한 친구 한 사람이 필요하다. 너무 강한 척하다 주변이 친구를 다 떠나보낸 건 아닌지, 너무 내 넋두리만 하다 친구를 질리게 한 건 아닌지. 생각해 보자. 그리고 누군가의 믿을만한 친구가 되어 주는 거다. 그러면 당신에게도 묵묵히 함께해줄 누구가 친구가 다가올 것이다.
상처받은 가족의 문제는 너무 어렵다. 어찌 보면 나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 만큼 많이 아파보지 않아서 쉽게 이야기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분명한 건 어떻게 하든지 극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내 고난도 내 삶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그냥 견디고 살기보다는 해결하기 위한 노력과 지혜가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아직 고통받는 가족을 위한 실제적인 도움 창구를 찾기 쉽지 않다. 다행히 최근에는 가정문제 상담이나 개인 심리 상담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는 게 반갑다. 조금 용기를 내고, 시간을 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관을 찾아볼 것을 제안한다. 많은 도움이 되지 못한 것에 미안한 마음으로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