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시작을 위한 마무리
책 원고를 마무리하고 오랜만에 글을 써봅니다. 주변 사람들이 이직을 하거나 준비하는 시기인 만큼 이직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2편은 여기서 보시면 됩니다.
"YJ, 그거 들었어?"
"올레그 말이죠? 그러게요... 저번 주까지만 해도 함께 였는데.."
지금부터 3년 전 여름, 파생 퀀트 부서에 피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수익률이 악화되면서 중요도가 낮은 사람부터 방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몇몇 사람으로 끝나면 차라리 다행일 것이다. 커피 타임에 임원 회의 소식을 어렴풋이 듣자면 부서의 종속 가능성 조차 알 수 없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풍전등화(風前燈火), 우리 팀의 상황에 딱 맞는 말이지."
한숨을 쉬는 시앙의 푸념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였다.
거래 시장 점유율이 쉽사리 늘지 않고 늘어난 데이터 및 서버 유지 비용 때문에 이미 위태로운 상황임을 회의 분위기를 통해서 느끼고 있었다. 고작 2년 정도 일한 회사였지만 이제는 떠날 때라는 것을 직감하였다. 여러 가지 사태가 터지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움직이는 쪽이 유리하다. 팀 해체 같은 일이 일어나면 비슷한 인재가 쏟아져 나와서 새로운 직장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난 글에서도 소개하였지만, 미국의 고용 방식은 대부분 At will 방식이다. At will이란 고용인이든 피고용이든 언제든지 (차별을 제외한) 아무런 이유 없이 고용 계약을 파기할 수 있는 관계를 말한다.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 라는 것에 대한 차이는 보험과 복지 외에는 거의 없다. 회사도 갑자기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면서 해고할 수 있고, 직원도 별다른 예고 없이 퇴사하겠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조심스레 나의 이력서를 다시 열었다. 일 년 전쯤에 업데이트를 해둔 나의 이력서가 보였다. 미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겐 아무리 직장에서 무난하게 일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반년에서 일 년에 한 번씩 이력서를 업데이트하라고 조언한다. 언제 어떻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거나 레이오프(Lay off : 대규모 구조조정)가 일어나는 등의 나쁜 일일 수도 있지만, 헤드헌터나 유망한 회사에서 링크드인이나 떠돌아다니는 이력서를 찾아보고서 연락이 오는 좋은 일일 수도 있다. 새로운 팀이 생기거나 대규모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헤드헌터들이 인재를 찾아서 동분서주한다. 이럴 때 업데이트가 되어있지 않은 이력서가 있다면 당연히 기회를 놓치게 된다.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반년 간 어떤 프로젝트들을 하였는지 쓰기 시작하였다. 지난 한해간 많은 일을 하였다. 여러 가지 고속 트레이딩 시스템과 시뮬레이터를 만든 것은 물론, 이자율 및 옵션 가격 데이터 분석을 하였고 그를 토대로 수익률이 꽤나 괜찮은 3가지 트레이딩 인공지능을 만들었다. 시간 순으로 서서히 기억을 더듬어가며 이력서에 적어나가기 시작하였다. 자세한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아 이메일을 들춰보거나 코드를 다시 열어서 어떤 식으로 했는지 찾아보기도 하였다. 이래서 인생 선배들이 그때그때 한 일들을 틈틈이 정리를 해놓으라고 한 건가 보다. 지나가던 팀원들 중에 내가 이력서를 수정하는 모습을 본 사람도 있었지만 아무도 뭐라 하지는 않았다. 그만큼 이력서를 고치는 일은 미국 직장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대비해야 하는 일이었다.
평소였으면 프로젝트와 알고리즘에 관한 대략적인 내용 정도만 쓰겠지만, 좀 더 진지하게 이직을 할 수도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여러 가지 말을 덧붙였다. 수익률과 좀 더 각 시장별 대처법, 기간과 투자 리스크 한도 등이 그것이다. 퀀트 트레이더가 이직을 할 때는 자잘한 프로젝트와 기술보다는 진정으로 어느 정도의 수익을 내줄 수 있는 알고리즘을 가지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메인 알고리즘인 '지니'의 이야기를 최대한 심혈을 기울여서 썼다.
'미국 주식 시장, 러셀 2000개의 주식을 타깃으로 함, 1분에 약 3천 번 정도의 주문을 보냄. GPU 병렬 처리 시스템을 이용해서 동시 주문 처리를 함. 시그널은 팩터 분석을 통한 잠깐의 틈과 주기적 패턴. 회귀와 추세추종 모두 섞어서 사용. 수익률 대략 X..'
이력서를 완성하고 나서 퇴근을 한 뒤에 머리 속에 생각이 나는 유명한 헤지펀드와 투자은행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공고들을 찾기 시작하였다. 학교에서 취업 준비를 할 때 수없이 많은 회사에 넣었기 때문에 많은 회사들이 머리 속에 생각이 났다. 예전 문서에서 정리해뒀던 퀀트 회사 목록도 참고하였다. 학교 리크루팅 홈페이지도 오랜만에 접속하였다. 예전에 인턴을 구할 때도 학교 공고 게시판이 굉장히 유용하였다. 유망한 회사들 리스트도 볼 수 있고 졸업생 중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도 보여주기 때문이다. 회사 홈페이지에는 올라오지 않지만 학교에 비공개로 모집을 하는 경우도 많다. 미국 회사들은 대기업도 좋지만 작은 기업들의 대우도 파격적인 경우가 많은데, 학교 커리어 부서에서 이런 회사들이 제대로 된 회사인지 검증을 해주는 역할도 한다. 그러나 공개 채용이든 캠퍼스 리크루팅이든 신입을 뽑는 공고는 많았지만 2-3년 정도의 경력직을 찾는 회사를 쉽사리 찾기 어려웠다.
딩동- 새로운 메일이 도착하였습니다.
글로벌 Q 소속 퀀트 전문 헤드헌터 리처드라고 합니다. 요즘 그쪽 은행의 퀀트 부서 일은 어떠신가요? 새로운 기회를 찾거나 변화를 찾고 싶진 않으신가요? 저희는 10조를 운용하는 글로벌 헤지펀드부터 초특급 퀀트들과 스탠퍼드 박사들로 이루어진 신생 트레이딩 회사까지 다양한 클라이언트를 위한 인재를 찾고 있습니다. 현재 연봉에서 20-50%의 연봉 상승이 거의 확실한 상황입니다. YJ 씨의 배경과 경력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지는데 10분만 시간을 내서 통화할 수 있을까요?
여느 때와 같은 헤드헌터의 이메일이다. At will 중심의 유연한 (그리고 무시무시한) 고용 문화 때문인지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끊임없는 헤드헌터의 이메일과 전화를 받는다. 특히나 이런 이메일과 전화는 이직 시즌인 3-5월 사이에 가장 많이 받게 된다. 월스트리트에서는 분야마다 약간씩은 차이가 있지만 보통 세금 정산 시기인 2-3월 정도에 연봉 협상을 하고 보너스 금액을 결정하게 된다. (뱅킹 분야는 7-8월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보너스 지급이 얼추 끝나는 3-4월쯤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직을 고려하기도 하는 시기가 된다. 어떤 사람은 새로운 연봉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진작에 옮기려 하였지만 보너스 시기까지 미룬 것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직을 하고, 공석이 많이 생기기 때문에 회사들도 가장 활발하게 리크루팅을 하는 시기이다.
물론 그동안 진취적인 프로젝트와 좋은 직장 동료와 상사들 때문에 이러한 헤드헌터의 연락을 정중히 거절하거나 무시하였다. 일주에 5번도 넘게 오는 헤드헌터의 연락을 매번 일일이 받아주다가는 일 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믿을만한 헤드헌터와 이직 생각이 없어도 꾸준히 시장 상황에 대한 정보도 얻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지만 아직 초년생이었던 나는 그다지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무게가 조금 달랐다. 처음으로 헤드헌터와 함께 일을 해보기로 하였다.
"여보세요? 리처드 씨 맞나요?"
"아 YJ 씨! 정말 반갑습니다. 지금 시간 괜찮으신가요?"
"네 지금 카페에 잠시 내려와서 시간 괜찮습니다."
"그렇군요! 저는 이메일에 말씀드린 대로 다양한 퀀트 펀드들과 트레이딩 회사, 그리고 투자 은행과 일하고 있습니다. 시카고, 홍콩, 뉴욕에 주로 클라이언트가 있고요. 먼저 클라이언트들을 소개하기 전에 그동안 어떤 커리어를 걸어오셨고 어떤 커리어 플랜이 있으신지 알려주시겠어요?"
헤드헌터는 먼저 가벼운 면접처럼 나의 커리어에 대해 묻는다. 이는 각자의 목표를 제대로 진단하고 최대한 맞는 회사와 포지션을 찾아주기 위한 선행이다. 회사 면접처럼 잘 보이기 위해 꾸미기보다는 최대한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자신의 성향을 확실히 인지시켜주는 것이 서로 일하기 좋다. 어떤 사람은 규모가 큰 기업에 들어가는 게 목표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글로벌 마켓에서 일하는 것이 목표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회사와 상관없이 좀 더 개인 연구 시간이 많은 일을 하고 싶을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정확히 이야기해줘야 한다.
"저는 회사와 상관없이 스스로 포트폴리오를 거래하는 완전한(stand-alone) 트레이딩 인공지능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는 다양한 시뮬레이터 시스템과 플랫폼을 만들었고 여러 가지 트레이딩 알고리즘들을 분석해서 이를 조합한 수익을 내는 3가지 알고리즘을 만들었습니다. 그중에 가장 좋은 수익을 내는 알고리즘은 팩터 기반 회귀형 알고리즘입니다."
"오호 그렇군요,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시뮬레이션 시스템을 만드셨다면 코딩은 어느 정도 하시죠?"
"네 C++을 개발자 수준으로 하긴 합니다. 다만 거래 경력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약 반년 정도입니다."
리처드가 마우스 클릭과 종이를 넘기는 소리를 요란하게 내더니 잠시 후에 말을 꺼냈다.
"좋습니다, 현재 2-3년 경력 급을 구하는 회사가 5군데 정도 보이네요. 한 곳은 거대 퀀트 펀드인데 이름만 말하면 알 수 있는 곳입니다. 30조 정도의 자산 운용을 하고 있고, 다만 알고리즘 트레이더를 뽑고 있네요. 알고리즘 트레이더는 효율적인 거래 및 비용 감소를 위해 노력하는 부서이죠. YJ 씨의 퀀트 트레이딩 목표와는 약간 거리가 있지만 아주 좋은 기회라 생각이 들어요."
"아 네! 저도 아직은 커리어 초창기이기 때문에 알고 트레이더나 좋은 회사의 퀀트 개발자도 염두하고 있습니다. 물론 퀀트로 들어가는 기회가 있으면 그게 우선이겠죠."
"그리고 다른 한 회사는 시카고의 성장하는 트레이딩 회사입니다. 트레이딩 회사이기 때문에 수익 배분이 철저하고, 알고리즘의 능력에 따라 연봉이 크게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 인재 부족 현상을 겪어서 팀장 자리를 줄 수도 있다고 하네요. 혹시 시카고나 홍콩처럼 다른 지역에도 생각이 있으신가요?"
뉴욕에 이제 막 적응해서 즐거운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좋은 기회를 따라가는 게 먼저라 생각이 들었다.
"예 저는 좋은 기회가 있다면 지역은 크게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회사는 뉴욕에서 방금 창업한 3인 회사입니다. 지금 YJ 씨가 있는 파생 팀과 완전히 같은 비즈니스이고, 유명한 T사와 D사에서 나온 사람들이 합심해서 만든 유망한 회사입니다. 회사를 처음부터 같이 성장시킬 사람을 찾고 있는데, C++ 프로그래밍과 플랫폼 설계에 능한 사람을 찾고 있네요. 이 쪽은 연봉 자체는 그다지 높지 않지만 굉장한 지분을 줄 예정입니다."
"아 저는 그런 회사가 더 마음에 드네요. 전체 시스템을 설계하고 거래까지 해보면 완전한 인공지능을 만드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현재는 몇만 불 낮은 연봉이라도 좀 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리처드는 10분을 약속했지만 결국 1시간 가까이 통화를 하였다. 그는 굉장히 친절하고 똑 부러졌다. 내가 정신없이 이야기해도 핵심만 정리해서 다시 확인을 하였다. 그 후 며칠이 지나고 리처드는 바로 세 회사 모두와 전화 면접을 잡았다. 일반적으로 공고를 보고 지원을 하면 면접을 잡는데 까지 짧게는 1주, 길게는 한두 달까지도 걸리는데 확실히 프로가 진행을 해주니 속도가 빨랐다. 놀라운 점은 그중 리처드가 거대 헤지펀드라고 하였던 회사는 내가 몇 주 전에 지원을 하고서 이미 서류에서 탈락한 곳이었다. 그러나 리처드는 그의 능력으로 면접을 잡아주었다. 헤드헌터의 능력을 새삼 느끼기 시작하였다.
헤드헌터는 지원자와 한 편이다. 지원자가 회사에 입사하게 되면 통상 지원자 연봉의 20-40%에 해당하는 수수료를 고용한 회사가 헤드헌터에게 지급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헤드헌터는 최대한 지원자가 입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보통은 입사하고 나서 1년을 유지해야 하는 조항이 있기 때문에 이들이 일 년간 일을 잘할 수 있도록 꾸준히 전화해서 관리해주는 역할도 한다.
그 와중에도 여러 회사에서 지원 결과가 나왔다.
'죄송합니다. 저희는 새로운 사람을 더 이상 뽑지 않습니다.'
'저희는 5년 이상의 리더급 포지션을 뽑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필요한 기술이 맞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라는 식이다. 워낙 취준생 시절에 많이 보았던 이메일이라 덤덤했다.
나는 처음 학교에서 취직 준비를 하던 때처럼 여러 가지 자료를 들춰보면서 면접 준비를 시작하였다. 기본적인 수학 문제나 알고리즘 문제들을 많이 잊었기 때문에 다시 공부를 해야 했다. 게다가 경력직 면접은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지금까지 한 프로젝트에 대한 개념을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한다. 신입처럼 그냥 똑똑한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고 좀 더 방향이 맞는 사람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리처드는 회사별로 대략적인 면접 문제를 뽑아주었다. 그리고 회사마다 어떤 인재상을 좋아하는지도 알려주었다. 하나하나 문제도 세세하게 알려주었고 공부해야 할 강의나 논문 등도 챙겨서 보내주었다. 나는 점점 리처드를 신뢰하고 여러 가지를 의논하기 시작하였다.
세 회사와의 전화 면접은 대부분 무난하게 흘러갔다. 왜 옮기려 하는가, 어떤 기술이 있는가,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등을 물어봤는데 이런 부분들은 이미 3년 전쯤에 취업 준비할 때 신물이 나도록 연습한 것이라 유창하게 대답하였다. 옮기려는 이유는 당연 팀이 위태로워서이지만 '일이 진취적이지 않다'라는 이유로 통일시켰다. 그렇게 세 회사 모두 최종 면접으로 초청받았다. 리처드의 도움이 컸다.
그와 동시에 리처드를 통하지 않고 지원한 뉴욕 유명 헤지펀드 T사에서도 전화 면접을 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이 회사는 학교 다닐 때부터 굉장히 가고 싶었던 회사라 따로 지원을 했었다. 이 곳은 신입들도 거래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게 해준다는 것으로 유명해서 두세 번 문을 두드렸지만 매번 낙방하였다. 순조롭게 흘러가는 이직 준비에 신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금요일 아침에 A사와 면접을 보러 갔다. 회사에는 '오늘 좀 쉬겠습니다.'라는 짧은 전체 이메일만 남겼다. A사는 맨해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어서 기차를 타고 가야 했다. 그랜드 센트럴에 있는 쉑쉑에서 계란 버거를 먹으면서 면접 준비를 했다. 쉑쉑에 아침 세트도 있는지 그날 처음 알았다. A사는 대형 헤지 펀드답게 입구와 로비도 거대하고 화려했다. 리셉션에도 젊은 여자가 네 명인가 있어서 호텔을 방불케 하였다. 그렇게 세명과 차례로 면접을 시작하였다.
처음으로 들어온 사람은 나와 또래로 보이는 알고 트레이더였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와 과는 다르지만 같은 학교를 나왔다고 한다. 동문이라며 굉장히 반가워하면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거래량이 이런 방향으로 움직이고 너의 현재 주식 보유 상황이 이럴 때 견적 제출을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 알고리즘을 만들 것이냐?'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의 특징, 그리고 정적 다형성과 동적 다형성의 차이를 설명해보아라.'
'5 카드를 뽑는 포커에서 투페어가 나올 확률을 계산해보아라.'
나와 또래여서 그런지 교과서적인 문제를 많이 물어봤다. 그리고 어느 정도 헤매는 부분에서도 친절하게 힌트를 주며 답을 유도해주었다. 아무래도 이런 게 학연인가 싶기도 하고, 아니면 아직 면접 경험이 적어서 편하게 하는 건가 싶기도 하였다. 어찌 되었건 유창하게 대답을 하였고 나는 나와 약간 다른 알고 트레이더의 삶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하면서 면접 시간을 마무리하였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커피를 한잔 마시자 조금 더 연륜이 있어 보이는 두 번째 면접자가 들어왔다. 그는 러시아에서 물리학 박사를 하였고 현재 알고 트레이딩 팀 리드를 맡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딱 보아도 매서운 눈빛으로 찬찬히 이력서를 보고 있었다. 큰 서론 없이 바로 면접에 들어갔다.
"미시 구조에 대해서는 좀 아나?"
"아... 네! 파생 초단타 팀이다 보니 어느 정도 미시 구조에 대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 그럼 거래 후 비용 분석(Post trade analysis)은 주로 어떤 모델을 이용했나?"
머리가 하얘졌다. 사실 그런 부분을 크게 신경 쓰지도 않았고 잘 모르는 부분이었다.
"아.... 제가 주로 분석한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Implementation Shortfall 모델을 주로 이용해서 분석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 Implementation Shortfall 모델에 대해 설명해보게."
또 한 번 침이 바싹바싹 말랐다.
"아... 그게.... 기대 거래 비용과.... 그... 실제 비용을 비교해서.."
"기대 거래 비용은 어떤 식으로 계산하지?"
"음..... 자...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군. 좋네 그러면 너의 알고리즘이라는 것을 거래할 땐 무슨 방식을 썼는가?"
"네 주로 그냥 시장에 나와있는 물량을 취하거나 VWAP(거래량 가중 평균 가격) 알고리즘을 사용했습니다."
"허허.. 미시 구조를 한다는 사람이 시장 물량을 그냥 산다니...."
그는 못 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이력서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프로그래밍에 자신이 있는 것 같군. C++ 이 주 언어인가?"
"예 그렇습니다."
프로그래밍 문제에서 만회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면 가상 소멸자를 사용하는 경우에 대해 설명해보겠나?"
"아.... 그건..."
당황스러웠다. 가상 소멸자라니...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아주 조용하게 한숨을 한번 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좋아 그럼 이번엔 통계 문제를 몇 가지 물어보겠네. 혹시 최소 자승법에서 왜 제곱을 하는지 아는가?"
"아 그것은 부호를 제거하기 위한..."
"부호를 제거하려면 절댓값을 붙여도 되지 않을까? 왜 제곱을 할까?"
난 또 대답을 하지 못 하였고 그토록 듣기 싫어하는 '그래 좋네 혹시 뭐 질문 있는가?'라는 말을 들었다.
저 말은 곧 떨어진 거나 다름없다.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는 뜻이니까.
일반적으로 면접은 끝까지 진행하는데 세 번째 면접관이 들어오지 않았다. 안내를 했던 여자분이 들어오더니 안타깝게도 더 이상 진행할 필요를 못 느껴서 세 번째 면접관을 취소하였다고 한다. 나는 적잖게 충격을 받고 풀이 죽은 채로 로비문을 나서서 돌아오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리처드의 전화가 왔다.
"면접 어땠어요? 될 것 같나요?"
"아쉽게도 100% 떨어진 면접이에요. 심지어 세 번째 면접관이 들어오지도 않았어요."
"아... 그렇군요. 뭐가 문제였던 것 같나요?"
"일단 알고 트레이딩과 미시구조 분야에 대해 제가 잘 몰랐던 것이 문제였어요. 그리고 기초적인 면접 문제들은 기억이 나는데 고급 수학 문제들이나 개념들은 많이 잊은 것 같아서 다시 공부해야 할 것 같아요."
"애초에 인재상(Fit)이 잘 안 맞았던 것 같았긴 했으니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해야죠. 다음 면접은 다음 주 목요일입니다. 원래 이직 과정은 수많은 시도가 필요하니 너무 걱정 마시고 힘내세요. 다시 통화합시다!"
서류 전형이 통과한 회사도 점점 생기고 쉽사리 면접이 잡혀서 잠시 자만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이직은 신입처럼 문제를 조금 틀리거나 관심사가 약간 달라도 봐주지 않는다. 더욱 철저히 준비하고 대비해야 했다. 시장에 대한 부분도 공부해야 했고 내가 한 일에 대한 부분도 다시 한번 점검하기로 하였다.
공교롭게도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페이스북으로부터 이메일을 한 통 받았다. 뉴욕 오피스 확장을 하고 있으니 개발자 면접을 보지 않겠냐는 연락이었다. 예전 같으면 IT 회사들은 크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페이스북에게 답메일을 보냈다. 좋은 면접 연습이 될 수도 있고 여차하면 플랜 B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까진 인공지능을 만드는 퀀트가 꼭 해보고 싶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이력서를 다시 열고 공부할 내용을 다시 정리했다. 이직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머릿속에 꽉 차서 금요일 밤임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매번 몇 년에 한 번씩 이런 과정을 겪어야 한다니 답답한 마음도 생겼다. 이러니 미국 직장인들이 실력을 안 쌓을 수가 있을까? 공부와 거리가 먼 나는 언제나 걱정이다.
뉴욕 직장 생활 - 7.이직, 2편 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