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디자이너가 되어도 괜찮은 걸까.
1년 차 주니어 프로덕트 디자이너의 전문성에 대한 의식의 흐름. 다 써놓고 보니 '열심히 하자!' 정도의 결론 없는 푸념이 되어버렸지만 그렇다고 발행 안 하는 건 아쉬워서 일단 질러놓는 일기
맡고 있던 프로젝트가 마무리되어가면서, 며칠 쉬는 시간이 좀 생겼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멈춰있는 느낌도 들고. 그래서 슬랙에 메시지를 던졌다.
이렇게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써봤는데 기분이 묘했다. 이것저것 하는데, 여기서 내가 뭘 가장 뾰족하게 잘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 글을 써 내려가고 있다.
'프로덕트' 디자인을
잘한다는 게 뭘까?
이제는 좀 뾰족하게 '프로덕트' 디자이너의 역량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지만, 호기심 많은 내 성격 어디 못 버리더라. 소위 말하는 마케팅과 디자인의 영역을 왔다 갔다 하면서 결국 '이것저것' 하는 디자이너가 되어가고 있다. 그렇게 지금 회사에서 9개월가량을 보내고 나니 나는 뭘 뾰족하게 잘하는 디자이너일까. 고민과 걱정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작년 한창 구직하던 시절에, 모 스타트업 헤드 디자이너분이 내 이력서를 보고는 '이 분 디자이너 맞아요?'라는 코멘트를 남긴 아픈 기억도 떠올랐다.
근데 나는 원래 호기심이 많다. 책을 읽어도 여러 권을 동시에 조금씩 읽어내는 것을 훨씬 더 좋아하고, 새롭게 배우고 싶은 것들은 항상 많았다. 그래서 그냥 조금씩 다 배웠다. 타이포그래피, 편집, 영상, 모션그래픽, 프로덕트, html/css/js/React, 프로토파이, 노코드 웹사이트 빌더, 데이터 분석 툴 등등. 조직의 비즈니스 맥락을 잘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 1년 가까이 마케팅 인턴 생활도 했다. 아마 내가 요리로 다시 태어난다면, 이것 저것 다 들어간 부대찌개쯤 되지 않을까.
경계가 없는 '이것저것' 디자이너가 되는 건 정말 무덤으로 가는 길일까? 프로덕트 디자이너로서 내 전문성은 어디로 가는 걸까? 우울해하지 말고 원래 호기심이 많은 내 성격을 영리하게 잘 활용해볼 순 없을까.
그래서 '이것저것'을 의도적으로 긍정적인 프레임에서 바라보았다. 프로덕트 디자이너가 페북 광고 소재 만들면 시간 낭비인가? 보통 포트폴리오에 못 써먹는다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실제로도 써먹지 못할 테니까. 근데 페이스북 광고 소재도 유저와 만나는 건데 그럼 광고 소재는 User Interface 아닌가? 제품 상세페이지 만드는 일은? 제품 내에서 CRM 툴로 고객을 어떻게 우리 편으로 만들지 고민하고 실행하는 일은 꼭 CRM 마케터만의 일일까? 디자이너도 똑같이 제품에서 고객 접점을 고민하는 사람인데. 마케터와 디자이너 모두 고객 최전방에 서있는 첨병 같은 존재들인데, 그럼 본질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것들은 서로 경계가 없는 거 아닐까?
그럼 프로덕트 디자인하고 싶은 나는, 지금 잘하고 있는 거 맞나?
커리어를 시작하고 보니 게임 경험치 쌓듯이, 몸 값 계속 올리는 게 나의 중요한 인생 목표가 되었다. 조직에서 더 높은 연봉을 받으려면 결국 큰 전략단의 판단을 하고 결정을 내리는 디렉터가 되어야 할 테고, 디렉터의 역할 중 하나는 뾰족하면서도 넓은 시야를 갖고 팀원들에게 인사이트를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일 거다. 그렇게 어떻게든 일이 되게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할 것이다.
그럼 연봉 높은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커나가는데 지금의 '이것저것' 경험들이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 아닐까? 정말 다양한 일들을 경험해볼 수 있는 지금의 조직에서 디자이너 타이틀 앞에 붙는 프로덕트니 그로스니 UX/UI니 하는 것들을 잠시 떼어놓고, '그냥' 디자이너로서 내가 어디서 어떻게 쓰임을 증명해낼 수 있는지 확인해보는 시간이라 생각하면 어떨까? 그러다가 어쩌면 '프로덕트' 디자이너 말고 다른 수식어가 붙어서 나를 정의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계속 '그냥' 디자이너로 남을 수도 있고. 내 인생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결국 불안감을 잠시 내려놓고 그냥 나를 믿으면 된다는 결론. 그런 말을 나한테 해주고 싶었나 보다. 지금 하는 일들 재밌고 좋은데 겁이 많았다. 조금만 더 단순하게, 아직 병아리니까 머리 아프게 네 편 내 편 구분 짓지 말고 더 해봅시다. '이것저것' 디자이너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