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해보기 전까지는, 도망치지 말자
앞으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회사를 다녀야 할까
올 해를 보내면 만으로 3년 3개월을 일한 디자이너가 된다. 내가 벌써 3년차를 지나고 있다니. 시간 참 빠르다.
회사의 요구사항을 잘 독해해서 원하는 대로 만들어주는 건 내가 잘해왔던 일이라고도 생각하면서도, 내 생각을 빼놓고 시키는 대로만 성실히 작업하다 보면 애초에 필요한 고객이 없었거나 고객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결과물을 내놓는 경우를 만나곤 한다. 우린 아직 MVP(Minimum Viable Product) 만드는 거니까, 실험이니까, 빠른 실행이 더 중요하니까.라는 말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가끔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여전히 거친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나 자신을 볼 때면 잘하고 있는 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곤 한다. 제대로 해보고 싶은 마음과, 마음만큼 따라주지 않기도 했던 내 역량 사이에서 숱한 고민과 결핍을 느끼는 나날들을 보냈다.
끝까지 해보기 전까지는, 도망치지 말자
뒤숭숭한 분위기에 회피성 이직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다. 환경이 바뀌면 이 고민이 자연스레 해결될까?라는 생각을 했지만, 여기서 극복하지 못한 것이라면 조직을 옮긴다고 내 노력 없이 자연스레 극복되지는 않는다는게 아직까지의 결론이다.
스타트업이라 사수가 없어 불안한 것, 다른 회사 디자이너를 더 많이 만나면 된다. 옆자리 동료와 사수의 어깨너머로 새로운 관점과 자극을 얻는 건 정말 정말 필요하고 좋은 일이다. 그런데 문제 상황에서 내가 직접 판단하고 결정해서 해결해보지 않으면 진짜 내 것이 되지 않더라. 결국 내가 직접 부딪히기 전까지는 모든 게 다 처음이니, 그냥 일찍 매 맞는 거라는 생각을 하면 그제야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사실 요 며칠간 마음에 크게 걸렸던 건, 제품과 디자인에 대한 이해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구성원들이 팀을 떠나간 것이었다. 아직도 시원하게 정리가 안 되는 부분이긴 하지만, 그냥 내가 부족한 밀도를 더 채워주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그것도 나의 성장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 즈음에 머물러있다. 이전에는 PO/PM이 C-Level들과 직접 부딪혔다면, 그걸 이제서야 내가 경험하게 된다는 점에서 앞서 얘기했던 일찍 매 맞는 느낌과도 맞닿아 있기도 하다. 일단 해보고 더 생각해 보는 걸로.
피그마의 빈 대지가 물리적 공간으로 보이는 경험
PO가 ‘이거 해야 한다!’라고 황무지에 깃발 꽂는 사람이라면(Problem Discovery), 황무지를 더더욱 살기 좋은 곳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은 디자이너의 몫이다(Solution Delivery). PO가 고객한테 약관 7가지 동의받아야 해.라는 얘길 한다면, 정말 7가지를 다 받아야만 하는가 하는 고민을 시작으로, 꼭 받아야만 한다면 최대한 고객이 마찰을 느끼지 않게끔 접점을 섬세하게 설계해야 한다. 그래서 요즘은 피그마의 빈 대지가 물리적인 공간처럼 느껴지곤 하는데, 오프라인 공간 경험에 대입해서 상상해 보면 타성에 젖어 있던 생각들을 환기시켜 볼 수 있어서 좋다.
강남역 한복판에서 전단지를 돌리는 건 구글 검색 광고로 우리 제품을 노출시키는 것이고, 전단지를 받아서 매장에 오는 사람은 검색 광고를 클릭해서 랜딩페이지에 도착한 유저와도 같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제품을 쓰는 사람이 느껴지고, 이 사람을 앞에 두고 내가 어떻게 접객을 해야 할지를 상상해 보게 된다. 매장마다 손님을 대하는 직원의 태도가 천차만별인 것처럼, 지금까지 우리의 태도는 어떠했는가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한 번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니, 당장 작업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지고 업무 성과까지도 좋아진 게 큰 수확이다. 정말 오랜만에 제품 개선 실험 타석에 올랐는데, 첫 시도에서 안타를 날려주니 섭섭했던 마음이 조금 시원해졌다.
필요할 때는 표현에 더, 과감해지고 싶다.
디지털 제품을 디자인할 때, 타이포그래피가 다 한다고 생각했었던 때가 있었다. 근데 계속 작업을 하다 보니, 그것만으로는 설계단에서 의도한 경험을 '더 실감 나게' 느껴지도록 하기엔 부족한 경우가 있음을 느낀다. 예를 들어 우리 서비스는 민감한 정보를 안전하게 처리하고 있으니 안심해도 된다. 는 메시지를 고객에게 전해야 할 때, 텍스트만으로도 메시지가 전달은 될 수 있겠다만 왠지 모르게 여기는 신뢰감이 들고 보안이 철저할 것 같은 느낌을 연출하려면 텍스트 외의 더 많은 재료들이 필요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들어 시각언어를 더 더 잘 다뤄내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디지털 공간에서 '느껴지는 경험'을 연출해 내는 사람이 되면 분명 한 단계 성장했다고 스스로를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텍스트 쓰고 버튼 놓고 적당한 일러스트 나 사진 얹어서 적당한 앱 화면을 만드는 관성을 꺾어내야, 다음 단계의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 오래가려면 결국 비주얼도 더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