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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태욱 Jan 03. 2019

포르투 한 달 살이, 디 마이너스 여섯

포르투 여행 계획 얘긴 1도 없는, 그냥 의식의 흐름 일기.

여행 D-6. 당장 생각나는 것들.


1. 단골 가게 만들기
2. 50번째 러닝 맞이하기
3. 좋아하는 것들을 부지런히 수집하기.
3-1. 그리고 그것들을 부지런히 기록하기.

3-2. 포르투 문구점에서 조그만 노트랑 펜 사기. 그 곳에 끄적이기.

3-3. 한 달 동안 살면서 주워 담을 동네의 흔적들. 혹은 영수증, 티켓들을 보관할 무인양품 반투명 파우치 구매하기.
4. 그렇지만 애써서 거창한 뭔가를 하려 하지 않기.

5. 영상을 찍고 싶진 않은데 이런 형태의 기록은 남겨놓고 싶기도 하다.


12월 31일. 퇴사를 했다. 오피셜리 백수가 됐다. 그리고 당일날 조금 급한 느낌으로 창원에 내려왔다.

여행 가기 전까지 엄마랑 같이 있는게 좋을 것 같아서. 한 달이나 여행을 떠난다니, 엄마가 내심 걱정을 많이 하고 있는 듯했다.


창원에 내려와서 당장 가장 좋은 건, 아침에 햇볕을 맞으면서 잠에서 깨는 것. 서울 집은 너무 두더지 굴 같다. 구조적으로 햇빛이 안 드는 것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블라인드를 내리고 조명을 쓰게 됐는데, 그러다 보니 점점 더 공간이 어두워져 갔다. 그런데 여기선 아침에 눈을 뜨면 눈이 부시다. 이게 얼마만의 호사야.


거실로 나오면 엄마가 소소하게 차려놓은 아침밥이 있다. 오늘 아침메뉴는 짭조름한 팥밥에 계란말이 그리고 김. 어렸을 땐 자는데 엄마가 깨워서 비몽사몽인 채로 밥 먹는 게 짜증 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혼자 사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아침에 누군가가 차려준 밥을 먹는 게 너무 소중한 일이 되어버렸다.


떡국 그리고 시골 할머니 두부
중학교 때 드나들었던 떡볶이집


창원에 있는 동안은 진짜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해보기로 했다. 한 때 부잣집 고양이 강아지들의 한량 같은 삶을 부러워한 적이 있다. 이제는 내가 그래 보기로 했다. 그런데 생각만큼 미친 듯이 행복하지 않았고, 결국 노트북 챙겨서 스벅으로 나왔다. 그리고 어디로 향하는지 종잡을 수 없는 이 글을 쓰고 있다.


도통 원인이 뭔지 모르겠는데, 요즘 내 감정은 우울한 모양을 하고 있다. 두 세 달 전부턴가. 긴장이 되면 입술이 떨리기 시작했다. 살면서 이런 걸 겪은 적이 없어서 좀 당황스럽다. 사람들 앞에서 스피치하고, 낯선 사람이랑 만나서 이야기하는걸 참 좋아했는데. 지금은 그게 좀 두렵기까지 하다. 당장 유럽 여행을 앞두고 있는데, 엄청 벅차오를 만큼 신나거나 기대감에 차있지도 않다. 첫 유럽여행이 너무 강렬했던 탓일까. 이후에 몇 번 여행 다녀봤다고 이제는 유럽 여행에도 무뎌진 걸까.


요즘 날씨가 너무 추워서 러닝을 못했다. 글 쓰면서 든 생각인데, 그래서 우울하다. 맞다. 그거다. 운동을 안 하면 확실히 사람이 움츠러든다. 몸도 마음도. 산책 못해서 집에서 히스테리 부리는 보더콜리나 리트리버랑 정말 똑같은 모양이다. 맞다. 빡세게 달리고 나면, 조금 더 나 자신이 커진 느낌이 들었고 자신감도 생겼다. 회사 다니면서는 더더욱, 꼭 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난 운동이랑 친해질 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러닝이 이렇게나 내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니. 참 신기하다. 그러니까 50번째 러닝은 포르투에서 맞이하는 걸로.


2년 전에 블로그에 남긴 글


와. 오늘 글 쓰면서 정리가 됐다. 내가 스트레스 푸는 방법 두 가지.

달리기 그리고 글쓰기. 마음이 한결 괜찮아졌다.

오늘 밤에 달리기는 못해도, 산책이라도 다녀와야겠다. 서울보단 창원이 따뜻하니까.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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