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외에서 취사가 가능한 시절의 이야기다. 여름이 되면 친정 우리 가족은 시내버스를 타고 전주 인근에 있는 신리, 관촌, 완주지역으로 물놀이를 자주 갔다.
산 쪽에서 내려온 시원하고 깨끗한 물이 적당히 있어서 물놀이를 하기 좋았다. 그곳엔 대부분 다리가 있었는데 더운 날이면 사람들이 다리 아래에 많이 모여 쉬었다.
도시의 다리 아래 모습. 반면 시골의 다리 아래는 좀 더 정겹다. 물이 적당히 흐르고 바위가 많이 있어 쉬기 좋은 곳이 많다 .
물놀이를 갈 때 코펠과 버너, 닭백숙 재료 등을 가지고 갔다. 휴일이라서 다들 야유회를 가는 지 차에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사람들 속에서 꽉 끼어있으면서도 자신이 맡은 요리 도구와 먹거리들을 철저히 지켜내야 했다. 한 가지라도 분실을 하면 점심으로 만들 음식의 질이 떨어져서 피서의 즐거움이 감해질 테니까 말이다.
차를 탈 기회가 별로 없었던 나는 어릴 적 멀미를 심하게 하였다. 차를 탄 지 얼마 되지 않아 속이 메슥거리며 내 얼굴은 누렇게 떴다. 금방이라도 토할 기세다. 하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다른 사람의 옷이나 차 바닥에 실례를 하면 안 될 노릇이란 걸 나도 알고 있었다.
심호흡을 하였다. 효과가 없었다. 더 깊게 천천히 반복해서 하였다. 속은 더욱 뒤집어지는 듯하였다. 현재 버스의 상황과 다른 상상을 하며 멀미를 잊으려 애를 썼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 드라마 <초원의 집>에 나오는 '로라 잉걸스'가 꿈에서 보았던 '누런 황금색 돈들이 반짝이는 개울에 가면 얼마나 좋을까' 등 말이다.
힘들면 '도대체 얼마나 가야 목적지에 도착하냐?'고 물었다. '조금만 가면 도착한다.'는 대답을 듣길 벌써 여러 차례였다. 하얗게 변한 내 얼굴을 보고는 이번엔 도리어 가족들이 괜찮냐며 걱정스레 나에게 물었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많은 사람들을 헤치고 나를 버스 출입구 근처로 데려다주었다. 정거장에서 사람들이 내릴 때 나도 같이 내리게 해서 신선한 공기를 잠깐이나마 마시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때는 그게 가능했다. 자가용이 귀했던 때라 빽빽이 차에 타고 있는 탑승객의 수는 많았다. 정거장마다 하차하는 사람 수가 많아서 내리는데 한참이나 시간이 걸렸다. 또한 버스에 사람이 타고 내릴 때 요금을 받는 여차장이 있어서 정거장에 일시적으로 내린 나를 떼어놓고 갈 가능성도 없었다. 그렇게 해서 1시간도 못 되는 거리를 파김치가 되어 목적지에 겨우 도착했다.
힘들게 갔지만 그곳은 매력적인 곳이었다. 멀리서 볼 땐 작고 어두우며, 지저분할 것 같고 볼품없는 다리였다. 놀라운 것은 다리 아래로 걸어 들어선 순간,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정도의 공간도 있고 생각보다 깨끗하고 아늑했다. 무엇보다 바람이 솔솔 불어 땡볕이 내리쪼이는 밖 하고 정말 대조되었다.
다리를 받치고 있는 기둥에는 통닭집 배달 전화번호가 빨갛거나 검거나 파란 글자로 찍혀있었다. 다리 아래를 관통하는 물도 도랑 도랑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찰박찰박 놀기 좋은 높이의 물이 흐르고 있는 곳에서 아이들과 어른들이 놀고 있었다. 한 켠에서 다슬기를 잡는 사람들이 보였다.
장남인 오빠는 자리를 잡을 적당한 곳을 미리 가서 보고 말했다.
“엄마, 저기가 좋겠어요.”
“그래. 편평하고 좋다. 거기에 자리 잡자.”
부모님이 동의한 곳에 먼저 간 오빠가 돗자리를 펴고 자리를 잡았다. 각자 가져온 짐을 옮겼다. 오빠와 아버지가 뒤에서 낑낑대며 오는 가족들의 짐을 받아서 들어다 놓았다.
아이들이 놀 동안 어른들은 버너를 꺼내어 황기와 마늘과 특별히 준비한 인삼 몇 채를 넣고 백숙을 하였다. 물속에서 한참을 놀아 뱃속이 홀쭉해질 정도가 되면 백숙도 다 되었다.
물놀이를 하다가 출출할 때 먹는 백숙은 담백하고 맛이 있었다. 별다른 양념이 들어가지 않아 맛이 강하지 않았다. 남기지 않고 질리지 않게 끝까지 먹을 수 있었다. 배불리 먹고 물놀이를 하다 나와서 수박을 먹고 복숭아, 자두를 먹었다.
물놀이에 지치면 ‘물길의 저쪽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슬슬 궁금하였다. 깊지 않은 물길을 따라 미끄러운 돌에 신경을 쓰며 조심조심 내려가거나 올라갔다.
피라미를 잡기 위해 누군가 설치한 유리병도 보이고 그물로 고기를 잡는 사람도 보였다. 저 너머 논에는 황새가 보이기도 하였다. 어떤 가족은 한나절 동안 휴식처가 된 자리를 정리하고 집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로 도우며 짐을 챙겨서 트럭에 싣고 있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석양에 아름다워 보였다.
몇 해 전 연로하신 부모님이 아파트에 살다가 주택으로 이사 온 직후 바로 한 일은 가마솥을 설치하는 일이었다.
벽돌로 아궁이를 만들고 그 위에 까맣고 반질반질 윤기 나는 커다란 무쇠 가마솥을 사서 걸어두었다. 그리고 벽돌 사이사이와 벽돌과 무쇠 가마솥의 틈을 시멘트로 마감을 하였다. 위에는 연통도 길게 달아 연기가 잘 빠지게 하였다.
주택으로 옮긴 후 까맣고 반질반질 윤이 나는 커다란 무쇠 가마솥을 걸어두었다. 백숙을 할 때 아버지는 감자를 구워 주셨다.
아버지는 우리 남매들이 모이는 날에는 자주 가마솥에 불을 때셨다. 시장에서 어머니가 사 온 토종닭을 넣고 백숙을 만들기 위해서다. 손질된 토종닭을 사서 깨끗이 씻은 후 가마솥에 넣었다. 여기에 땀이 덜나게 하는 한약재인 황기, 당귀, 도라지, 인삼, 대추 등을 넣고 마늘도 많이 넣었다. 이럴 때는 식구들이 앉아서 마늘을 양푼 가득히 깠다.
백숙 재료를 솥에 앉히고 불을 때면 잠시 후 무쇠 가마솥에서 김이 소르르 오르기 시작하였다. 한참을 끓이다 고기가 익었다 싶으면 큰 쟁반에 백숙을 꺼내어 놓았다. 이번엔 닭고기를 삶은 육수에 찹쌀과 녹두를 넣어 죽을 만들 차례다.
가족들이 백숙을 가운데 놓고 둘러앉았다. 어머니는 닭다리를 아버지와 큰아들에게 내밀었다. 그걸 받아 든 아버지는 항상 나에게 주셨다. 가족들이 닭고기를 다 먹을 즈음 완성된 녹두죽을 한 그릇씩 먹었다. 쫄깃한 고기도 맛있지만 부드러운 죽은 배부른 가운데 또 한 그릇을 먹어도 속이 편하였다.
백숙을 보면 아궁이 앞에서 빨갛게 불을 때는 아버지가 떠오른다. 시골에서 닭을 키워 잡을 적에 끝내 모가지를 비틀지 못해 다시 파덕이며 날아다니게 했던 마음 약하고 사람 좋은 아버지. 무쇠 가마솥 아래서 타오르는 장작불 사이에 감자를 묻어놓아 나에게 챙겨주시던 아버지다.
오늘따라 어릴 적 가족과 함께 먹었던 백숙과 물놀이의 추억이 자꾸 생각난다. 얘기꽃을 피우며 먹었던 닭백숙의 담백하고 쫄깃한 맛이, 하얀 속살이 더욱 그리워지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