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제2 공항에서 출국 심사를 받았다. 전자 검사 시스템을 이용해 속성으로 진행되었다. 2차 엑스레이 검색대 검사를 먼저 마친 나는 동행자 화연을 기다렸는데 한참을 지나도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5분 정도가 지나서야 떨떠름한 표정의 화연을 공항 직원 2명이 호위하듯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분명해 보였다. 말끔하게 차려 입은 공항 직원들이 우리를 이상한 눈빛으로 건너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면서 나는 긴장했다. 화연과 나는 그들을 따라갔다. 어떤 사무실 문 앞에 이르렀을 때 그 공항 직원들은 나를 제지하고 화연만 사무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 사무실 문 위쪽을 올려다보니 이렇게 써 있었다. “보안검색실”
밀수꾼들이 귀금속이나 마약 따위를 반입하다 걸렸을 때 끌려가는 곳 아닌가. 영화에서 보았던 그런 장면들이 떠올라 잠시 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혹시 공항 직원들이 화연을 그런 부류로 보고 끌어간 건가. 보안검색실 안에서는 지금 어떤 상황이 펼쳐지고 있을까, 화연은 혼자서 떨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상상을 하던 차에 화연이 다소 어색하고 굳은 표정을 하고 보안검색실 문을 나오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안심이 되는지 그때서야 ‘씩’ 웃는다. 나도 그 웃음을 보고서야 안심이 되어 ‘씩’ 웃어 주었다. 휴우….
화연이 특별 검사를 받은 이유는 이러했다. 영국에서 사용하려고 구입한 복대를 생각 없이 미리 착용하고 있어서 일어난 일이었다. 복대는 둘이서 함께 쓸 공동 여행 경비를 지니고 다닐 용도로 산 것이었다.
포켓 달린 속옷을 입으면 좋다는 글을 인터넷 여행 카페에서 본 적이 있다. 외국 여행 중 현금을 소지하고 다니다 소매치기를 당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그런 옷이 좋다는 것이다. 그런 글을 읽고도 구매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시간도 없었다. 비록 속옷이지만 그런 옷을 입은 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니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여행지에서 물건 값을 치르기 위해 돈을 꺼내는 장면을 상상하는 일도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친척 할머니가 우리에게 용돈을 주기 위해서 치마를 올리고 고쟁이에서 돈을 꺼내는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이것 대신 우리는 중요 물품을 넣는 주머니가 달려 있는 얇은 복대였다.
규정에 맞게 짐을 꾸렸기에 출국 심사는 통과될 줄 알았는데 사소한 부주의로 이렇게 가슴 떨리는 일이 발생할 줄은 미처 생각을 못 했다. 타국에서 이런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마음이 생겼다. 여권 검사를 무사히 마쳤다. 지문 검사, 안면 인식 검사도. 보안검색실에 다녀온 뒤 남은 절차를 마치고 출국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출국이다, 그제서야 마음이 가벼워졌다.
11시간 비행 끝에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영국이다. 영국 공항에서는 인천공항에서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유심칩을 갈아 끼웠다. 화연이 나에게 전화를 하였다. 나도 화연에게 전화를 하였다. 그렇게 하여 각자에게 부여된 영국 임시 전화번호를 확인하였다. 숙소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지하철인 ‘언더그라운드’를 타야 했다. 언더그라운드를 이용하기 위해 히드로 공항에서 15파운드짜리 오이스터 카드를 미리 구입했다.
우리나라 지하철보다 안이 비좁아 보였다. 통로 양쪽에 앉은 사람들이 각자의 캐리어를 자신의 앞에 놓으니 통로가 사라져 버릴 정도였다. 나도 여느 사람들처럼 캐리어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지하철이 생긴 지 오래되어 지하철 내부가 지저분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래도 깨끗한 편이었다. 좌석은 우리의 비둘기호 기차처럼 헝겊으로 길게 덮여 있었다. 건너편 좌석에 앉은 승객들을 보니 영국인들도 있고 우리 같은 여행객들도 여럿 눈에 들어왔다. 마주 앉은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겸연쩍은 미소로 서로 눈인사를 나누기도 하였다.
나는 초등학교 교사다. 학기 초에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다문화 교육을 했다. 교육 자료로 활용한 사진 가운데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 수백 명이 한데 모여 있는 게 있었다. 그때 그 사진을 보며 여러 인종의 사람들을 편집하여 만든 것이라 생각했었다. 진짜 사람들이 그렇게 다양하게 모여 있는 상황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런던에서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사진을 찍으면 그런 사진이 될 것 같았다. 정말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런던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킹스크로스 역에 내려 숙소를 향했다. 일기 예보대로 비가 오고 바람까지 불고 있었다. 날씨도 초보 여행자를 시험하고 있는 듯싶었다. 경량 패딩을 꺼내 입었다. 호텔을 찾아가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보도블록 위의 캐리어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캐리어 바퀴가 매끄럽게 움직이지 않는다. 숙소를 찾으려고 켠 구글 앱 지도에서 방향을 가늠하기도 쉽지 않았다.
외국어 실력이 뛰어난 화연이 유창한 발음으로 길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묻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나도 용기가 생겨 몇 마디 건네 보았다. 옷을 여미가며 비바람을 뚫고 어렵사리 숙소에 도착했다. 아직 숙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호텔 프런트에 갔다 온 화연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으니 나에게 소파에 앉아 기다리라고 하였다. 3일간 여행 가이드를 해 주기로 한 이탈리아 출신 영국 유학생의 방까지 한국에서 예약했었다. 그 방 예약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프런트 데스크 직원은 모르쇠로 일관하였다. 컴퓨터에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그 사이 호텔 이용료가 올랐다는 말도 한다. 예약 당시보다 거의 두 배 가까이 뛰었다고 한다. 화연이 한국에서 예약할 당시 카드 승인 결과를 직원에게 보여 주었다. 호텔 전산 시스템의 착오이니 예약이 안 된 방을 예약한 시점의 가격으로 처리해 달라고 요구했다.
화연과 호텔 직원이 서로 의견을 나눈다. 화연은 목이 타는지 물을 찾는 듯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 생수 한 병을 건넸다. 물을 마시고 화연은 계속 말을 이어간다. 나도 그들에게 우리의 의견을 강하게 어필하고 싶었지만 둘의 말이 워낙 빨랐다. 서로 끊임없이 얘기를 하는 통에 짧은 영어 실력으로는 끼어들 수도 없었다. 거의 한 시간이나 지나갔다. 얼굴이 약간 상기된 화연이 수시로 물을 찾는 것도 당연했다. 긴 시간 동안 서로 낯을 붉히지 않고 웃으며 의견을 말하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내가 그 ‘상냥한’ 직원에게 당신은 참 친절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화연이 차분하게 말을 잘한다 하였다. 결국 희망대로는 되지 않았지만 서로 성격과 매너에 대해 칭찬해 주고 흐뭇한 분위기에서 일을 매듭지었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여행을 해야 하니 시작부터 기운을 빼면 안 되었다.
호텔 체크인을 어렵게 하고 방에 들어왔다. 화연은 내가 친절하다고 했던 그 직원이 우리가 못 알아들을 줄 알고 비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고 하였다. 당신이 한 말 중에 비어를 들었다고 직원에게 웃으며 얘기했더란다. 친절한 직원이 얼굴이 변하며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미소를 띠며 잡아뗐다고 했다. 화연은 분명히 들었다고 했다. 물론 나는 화연의 편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그녀의 표정만 보고 친절하다 칭찬까지 했으니 한심할 지경이었다.
이렇게 런던에서 하룻밤을 맞았다. 피곤이 폭풍우처럼 몰려왔다. 험난한 세상을 헤매다 안식처에 돌아온 뒤 느끼는 편안한 고단함, 하루가 길었다. 오랫동안 여행을 한 느낌이었다. 일단 한숨을 돌렸다. 호텔도 잘 찾아왔고 한 고비는 지났다. 이제 즐거운 여행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 여행을 도와준 사람 §
공항에서 언더그라운드로 가는 길을 알려준 공항
오이스터 카드 만들기를 도와준 공항직원
호텔을 찾아갈 때 길을 알려준 행인
객실 화장실에 있는 화재경보기. 크고 볼록튀어 나왔으며 모양이 오래된 것 같아 눈길을 끌었다 @ 여행을 도와준 사람 @
공항에서 언더그라운드로 가는 길을 알려준 공항 환경미화원
오이스터 카드 만들기를 도와준 공항직원
호텔을 찾아가는 길을 알려준 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