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와 함께 한 낭독, 새로운 경험이었다
소설가와 낭독을 한 이야기
“안녕하세요, 토요일 오후 3시. 우리 문고에서 ‘정숙인 작가와 소설을 낭독하다’는 강연을 합니다. 정숙인 작가는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습니다. 귀중한 토요일 오후 시간, 우리 문고에서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배 작가로부터 카톡 메시지가 왔다. 요즘 문학 행사에 관심이 많이 있던 차다. 정숙인 작가에 대해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보았다.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그 신문 해당 기사에 당선자의 사진과 함께 소감도 실려 있었다. 화장을 굵은 선으로 정확하게 했다. 중년의 여성. 회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차분해 보였다.
그런데 소설을 낭독하다니…. 소설을 읽는 거 아닌가? 요즘 작가 강연회를 여러 번 가 보았지만 이런 적은 없었다. 호기심이 생겼다. 시작 시간에 맞추어 서점에 갔다. 벌써 여러 명이 와 있었다. 정숙인 작가와 함께 소설 『봉준이 온다』를 쓴 이광재 작가도 서점에 들어섰다.
정 작가는 자신의 신춘문예 당선작인 단편소설 ‘백팩’에 대한 설명을 시작으로 강연을 풀어 나갔다. 미리 설치한 스크린에서는 이 작품과 관련된 영상과 배경음악이 흘렀나 왔다. 칼 마이던스가 찍은 사진으로 만든 영상이었다. 미국 라이프지 종군기자였던 칼 마이던스는 1948년 10월 23일 순천에 도착하여 참혹했던 여순항쟁 당시 군경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들을 사진기에 담았던 사람이다. 정 작가는 자신의 고향인 여수의 역사에 관한 글을 써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고 한다.
「빛의 증거」라는 소설을 낭독하기로 했다. 낭독하기 전 준비 절차가 꽤 필요했다. 정 작가는 자신이 대학 때 연극을 했다고 한다. 그때 연극을 하기 전에 준비 운동으로 했던 혀 씹기, 입술 깨물기, 발 돌리기, 자신의 아픈 곳 만져 주기 등을 해 보자고 했다. 이름하여 몸 풀기 운동. 복식호흡을 한 후 한 명씩 돌아가면서 “아, 에, 이, 오, 요, 우, 유, 으, 이”를 외치게 하였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음과 동시에 소리를 외쳐야 했다. 한 명이라도 틀리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게 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틀리는 사람이 꼭 있었다. 슬슬 지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속으로 ‘그만 대충하고 낭독에 들어가는 것이 좋을 텐데’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체되어 포기할 법한데 정 작가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다시 해 보자며 연신 독려하였다. 결국 우리 모두는 틀리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명씩 돌아가며 한 글자씩 외치게 되었다. 이 작은 성공을 우리는 박수를 쳐서 자축했다.
이 과정이 재밌다. 자세히 말하면 이렇다. 어떤 사람이 계속 ‘요’를 해야 하는데 ‘우’를 하였다. 그럴 때마다 이 작가는 “‘요’입니다.”라고 말하였다. 훈련소 조교처럼 때를 놓치지 않고 정확히 짚어준다. ‘우’를 말하면 ‘요’로 정정해 주는 상황이 마치 레코더의 반복 버튼을 누른 것처럼 되풀이되었다. 필름을 뒤로 돌린 것처럼 착각이 들 정도다. 피식피식 웃음소리는 점점 커졌다. 그 속에서도 자기 순서를 잊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해내는 센스들은 눈물겹다. 곳곳에서 웃음보가 터졌고 어떤 이는 그 웃음을 억제치 못하고 잠시 밖에 나가 있기도 했다.
정 작가는 마치 거창한 일을 도모하는 양 힘 있고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해 봐요”, “우린 할 수 있어요.” 등의 말을 외쳤다. ‘말한다’보다 ‘외친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그만큼 작가의 소리는 한 치의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할 정도로 분위기를 만들어 갔다. 자못 엄숙하고 경건하기까지 한 분위기. 단호한 작가의 기에 눌려 아무도 작가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진지한 자세로 정 작가를 도와주던 이광재 작가, 그가 뜬금없이 나선다. “우리 8시까지 해야 끝나나요?” 웃음기 없고 나직한 목소리. 우리가 궁금해하던 질문이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갑자기 시각이 궁금해진다. 탁자 위쪽에 뒤집어 놓은 휴대폰을 살짝 당긴다. 슬쩍 시각을 보니 4시가 다 되어간다. 이러다가 8시까지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 풀기로 이렇게 많은 시간을 소비하다니. 소설 낭독은 언제 시작할 것인가, 하여 언제 끝날 것인가. 몸 풀기로 이런 정도이니 소설 낭독은 4시간을 너끈히 잡아먹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우리 모임의 지킴이 배지영 작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8시까지는 안 하죠? 우리 집에 초등학생이 혼자 있어요.” 여유 있는 미소로 배 작가가 말했다. 이런 천연덕스러운 응수.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배 작가. 정 작가로부터 5시 전에는 끝낸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낭독이 시작되었다. 정 작가의 단편소설 「빛의 증거」 인쇄물을 펼쳐 들었다. 주인공 ‘한’과 ‘나 작가’를 맡을 사람을 정하였다.‘한’은 박 샘이, ‘나 작가’는 이 작가가 맡기로 하였다. 서로 돌아가며 한쪽씩 읽어 나갔다. 이 작가가 읽기 시작하였다. 그다음이 내 차례. 성인들끼리 모여 큰소리로 책을 읽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읽는다. 발음이 잘 되지 않았고 호흡도 짧았다. 목소리는 갈라져 나오고 발음도 명확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낭독하는 것을 유심히 들으며 호흡을 가다듬어 보았다. 각자 한쪽씩 읽고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내 차례가 되었다. 연기하듯 흉내 내어 실감 나게 읽어볼까. 무디어진 감정 때문에 여의치 않다. 편하게 읽으려 노력해 본다. 그래 힘을 빼자. 그냥 편하게 읽어보자.
소설 낭독,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것도 소설가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