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암으로 투병 중이던 친구의 찐우정
"나 유방암 이래."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친구의 말이 이해가 잘 안 되었다.
"길 가다가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졌어."라고 말했으면 바로 이해했을 텐데.
건강검진하면서 가슴에 좀 이상이 있는 듯하다고, 대학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해 볼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며칠 전에 들었다. 그런데 유방암이고, 바로 수술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픈데도 없던 친구에게 갑자기 암이라니... 한참을 어리둥절하던 나는 친구의 폭풍오열에 현실을 깨알았다.
그렇게 친구의 투병이 시작되었다. 큰 수술 후 친구가 보여준 것은 놀라운 씩씩함과 강렬한 수술 자국이었다.
"왜? 또 무슨 일 있어?"
내가 전화를 할 때면 친구는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친구가 암과 투병 중일 때 나는 마음과 투병 중이었다. 극심한 우울증으로 밤낮으로 울며 세상을 원망하며 살았다. 그 과정을 오롯이 지켜봐야 했던 친구는 몸도 마음도 더 아파야 했다.
어느 날, 몸이 아픈 친구를 더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고 내가 말했다.
"무슨 소리야? 친구는 내가 선택한 가족인데! 형제자매는 선택한 게 아니지만 친구는 스스로 선택했잖아. 뭐가 미안해? 힘들고 아플 때 나누는 건 당연한 거지."
나는 그런 친구가 있어 이를 악물고 잘 살아야 했다.
"행복이(아들 태명) 선물 보낸다. 너는 일하느라 시간 없을 것 같아서 내가 만들었다. 이틀 꼬박 바느질했더니 손가락이 너무 아프네." 첫째 임신 때 손바느질로 아기베개와 모빌을 만들어서 보내준 친구.
"응, 있다 전화할게."라고 대답하고 며칠 동안 전화를 못해도 바쁜가 보다라며 이해하는 친구.
내가 울면 나보다 더 많이 울어주는 친구.
내가 철없는 소리 하면 "그래, 그래." 하며 다 들어주고선 마지막에 철든 말 한 마디로 바른 길의 이정표를 내미는 친구.
친구가 수술한 지 벌써 9년쯤 되어 가나보다. 수술과 약물 치료의 후유증으로 불면증과 우울감에 시달리고, 몸 여기저기 이상 신호가 와서 일주일이 멀다 하고 병원에 다니면서도 여전히 예쁜 내 친구.
"내일 아침에 그냥 눈을 안 떴으면 좋겠다."
가끔 친구가 말한다. 쓸데없는 소리 한다며 나는 구박한다.
이제 와서 친구의 투병을 다룬 <서른아홉>이라는 드라마를 보며 자꾸만 운다. 남편은 보면 눈물 나는 드라마를 왜 자꾸 보냐고 보지 말라고 한다. 재미있어서 보고, 친구한테 미안해서 보고, 친구의 마음을 헤아리고 싶어서 본다.
"네가 행복하게 잘 살아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내 친구 참 대견하고 대단하다."
얼마 전, 두 번째 책 출간 소식을 전하면서 아이들이 5살, 7살이 되니 더 예쁘고 사랑스럽다고 쫑알대는 나에게 친구가 말했다. 예전에 그리 힘든 세월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잘 살아줘서 고맙다고. 나를 보면 흐뭇하다고.
"네가 나를 살린 거지. 너 덕분에 내가 잘 살고 있는 거야."
친구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티격태격하며 노는 걸 보면서 앞으로 어떤 친구의 모습으로 커나갈지, 어떤 친구와 찐우정을 쌓아갈지 기대가 된다.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길고 긴 생에 눈물 콧물 다 보여 줄 수 있는 친구를 만나는 건 인생의 큰 행운이라고.
굳이 많은 친구를 곁에 두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고.
우정보다 더 깊은, 사랑보다 더 따뜻한 사이의 친구라면 한 명도 충분하고, 두 명이면 넉넉하고, 세 명이면 넘친다고.
10년, 20년, 30년... 긴 세월 친구로 지내다 보면 옆에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친구의 아픈 과정을 통해 옆에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뼈 아프게 느꼈다. 속상한 일이 있다고, 몸이 아프다고, 그냥 궁금하다고 전화해 주는 친구가 오늘도 참 소중하다. 있어줌에 감사하다. 문득 피노키오의 '사랑과 우정 사이'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p.s.
피노키오의 '사랑과 우정 사이' : 사랑보다 먼, 우정보다는 가까운
찐친구의 '사랑과 우정 사이' : 우정보다 더 깊은, 사랑보다 더 따뜻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