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타그램을 둘러보다 보면, 그냥 단순히 일상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 이미지, 스타일을 꾸준히 관리하며 하나의 포트폴리오처럼 쓰는 사람들이 있다. 정방형의 이미지 중심 플랫폼인 인스타그램이라 다른 서비스에 비해 스타일을 더 신경쓰게 되는 것도 같다.
이런 사람들은 단순히 각각의 사진 하나하나에만 신경을 쓰는 게 아니라, 이 사진들의 썸네일을 모아서 보여주는 피드까지 관리한다. 낮은 수준으로는 올리는 사진의 전체적인 색감, 오브제, 톤을 균일하게 맞추는 정도부터, 책 표지만 똑같은 사이즈로 찍는다든지, 음료수 용기만 똑같은 구도로 찍는 것처럼 아예 확실한 컨셉을 정해 똑같은 구도로만 피드를 채우는 경우도 있다. 그런 피드는 확실히 한눈에 압도가 된다.
이런 계정들을 볼 때마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상의 순간들 중에서도 사진으로 찍어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고 기록하고 싶은 순간들이 많을 텐데, 정해놓은 컨셉에서 벗어나는 사진은 올리지 않는다. 피드의 스타일을 관리하기 위해 다른 용도로의 활용은 포기하는 절제력. 요새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 복수의 계정을 관리하는 기능도 있는 모양이지만, 부계정을 운영하는 그 정성도 대단하다. 인스타그램에 저장해놓고 싶은 일상의 순간들이 계속 이어지는 나에게는 하여간에 대단한 것이다.
무언가 내 이름을 걸고 만들어 낸다는 것은 피드와도 같다. 만들어낸 것은 내 이름이 걸린 채 그대로 남는다. 그건 포트폴리오가 되고 이력서가 된다. 그래서 종종, 내 의지가 온전히 반영되지 않는 공동 프로젝트에 참여했을 때, 내 생각과 너무 다른 방향으로 결과물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 '아 저는 이거 끝까지 하긴 할 텐데 나중에 이름은 빼주세요'라고 하고 싶은 순간들도 있다. 혹은 어디 가서 '저 이런 것도 했고 이런 것도 했습니다'라고 소개할 때 슬쩍 빼두는, 내가 작업한 리스트에 남겨놓고 싶지 않은 것들도 있을 거고.
이런 것들에 민감한 사람, 기준이 높은 사람일수록 쉬이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일단 손을 대면 그건 내 명함이 될 텐데, 시간이고 비용이고 여건이 좋지 않은 것이 뻔히 보인다. 이런 조건에서 작업했다간 결과야 불 보듯 뻔하다. 그럼 처음부터 손대지 않는다.
사실 똑똑한 생각이다. 아무리 연기를 잘하는 배우도 다작을 하는 순간 대중이 느끼는 아우라는 조금씩 약해지니까. 작품을 많이 하면 당연히 훌륭한 작품에만 참여할 수 없다. 범작 평작들도 두루두루 참여해야 '다작'을 하는 배우가 된다. 그런 배우는 대중이 친근하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어느 순간 피로감을 호소하기도 한다. 신비감을 잃는다.
배우뿐 아니라 창작자도, 게다가 조건에 영향을 많이 받는 영상물을 만드는 창작자일수록 기준이 높으면 참여할 만한 게 없다.
내가 아는 어느 친구는 촬영을 기가 막히게 잘해서, 개인적인 작업이 있을 때마다 이 친구의 도움을 받곤 한다. 헌데 실은 이 친구도 원래 촬영이 아니라 연출을 하고 싶어 카메라를 잡았다. 나도 이 친구가 촬영감독 말고 연출자로서 만든 것도 기대가 되니 좀 이것저것 만들어줬으면 하는데, 좀처럼 찍지를 않는다. 이유인즉, 촬영감독이야 어찌 됐든 '남의 작품'이니 대본이나 여건이 만족스럽지 않아도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데, 자신이 감독으로 참여하는 '내 작품' 만큼은 만족스러운 것만 남기고 싶다는 거다.
과연 기준이 높은 친구다. '남의 작품'이라 좀 편하게 참여한다는 촬영감독일 때도, 나는 오케이 했는데 이 친구가 촬영감독으로서 만족이 안 돼 테이크를 다시 갈 때가 왕왕 있다. 다른 현장에서도 별명이 '한 번만 더'라고 하니 어땠을지 안 봐도 선하게 그려진다.
내가 방송사에서 오랫동안 훈련받은 태도 중 한 가지는 '타협하는 것'이다. 방송PD들도 다 시네마키드들이고 무언가의 덕후들이다. 자기 이름 걸고 5천만 국민에게 송출되는 방송을 완벽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이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방송국에서 완성도보다 중요한 것은 편성이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매주 돌아오는 방송 시간에는 무조건 맞춰 입고를 시켜야 한다. 방송 시간 최소 1시간 전에 완성품을 넘기지 못하면 징계 사유가 된다.
심지어 분량도 초 단위로 정해져 있다. 이번 주는 보여줄 내용도 적고, 이야기를 끊어줄 포인트가 좀 앞부분이라 40분짜리로 만들고 싶어도 그런 거 없다. 내용이 적으면 적은 대로, 꾸역꾸역 정해진 60분을 초 단위까지 맞춰 늘려 채워야 한다.
작품에 대한 기준이 높은 감독님이라면 얼토당토않은 얘기다. 40분짜리 이야기를 어떻게 60분으로 늘려서 만든단 말인가. 그럼 호흡도 늘어지고 감정도 망가진다. 이건 작품을 모욕하는 길이다. 하지만 방송국에는 그런 거 없다. 편성에 맞춰야 한다. 시간을 채우려고 재미없는 부분이 꾸역꾸역 들어가도 어쩔 수 없고, 너무 재미있는 장면이 많아도 눈물을 머금고 10분, 20분씩 서텅서텅 잘라내야 한다.
게다가 영화는 2시간짜리를 1년 동안 만든다. 아무리 빨리 만들어도 서너 달은 걸린다. 3분짜리 뮤직비디오도, 15초짜리 광고도 최소 몇 주씩은 걸려 만든다. 방송은 70~80분을 일주일 만에 만들어야 한다. 그것도 매주. 분량도 딱 정해진 채로. 타협하지 않으면 완성할 수 없다. 성에 좀 안 차도 '대세에 지장 없으면' 그냥 넘어간다. 신경 쓸 디테일과 포기할 디테일을 계속해서 선택하고 집중해야 한다. 방송은 지속되는 타협의 산물이다.
그러면서 배웠다. 여건이 충분하지 않아도, 만들어 보고 싶은 게 있다면 일단 만들어서 완성하는 태도를. 온전히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그렇다고 안 했으면 아예 세상에 없었을 것들이 그래도 완성되어 있는 게 보기 좋다. 너무 부끄러운 수준만 아니라면.
밴드 '자그마치'의 싱어송라이터 김태결과 친구다. 노래들이 참 좋다. 듣고 있으면 이미지가 떠오르는 노래를 좋아하는데, 그의 노래들은 참 다양한 심상들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어떤 노래들은 듣고 있다가, 어 이거 영상으로 만들어 보고 싶은데!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럼 태결에게 묻는다.
"이거 뮤직비디오 내가 만들어도 돼?"
그의 노래들 중 내가 좋아하는 <만선>이나 <서울에 산다> 같이 스케일이 큰 노래들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잠시 짬을 내고 사비를 털어서 만들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아쉽지만, 조용히 일상에 섞여 있는 감정을 담은 노래들은 그래도 해볼 수 있을 것 같더라.
어차피 내가 회사생활을 하며 짬을 낼 수 있는 건 길어봐야 휴일 하루 이틀. 사비를 이리저리 털어도 꾸릴 수 있는 장비나 스탭은 소소하다. 그렇게라도 담아보고 싶은 노래들이 있었다. 그의 노래 <우리는>과 <울컥>의 뮤직비디오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앞서 '여의치 않은 조건 속에서 타협해가며 만드는' 이야기를 길게 한 나머지, 이 뮤직비디오들을 대충 만들었다는 이야기로 들릴까봐 걱정된다. 혹시 태결이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하다. 아니야 그래도 최선을 다했어. 니가 해도 된댔잖니. 만들면서 즐거웠어. 나름 괜찮은 거 같아. 물론 아쉬운 부분이 없진 않지만. 혹시 니가 만족 못한다면... 어쩔 수 없지 뭐. 돈 많이 벌어서 더 잘 만들자.
관계를 맺는데 미숙했던 나머지, 서로 엇갈렸던 감정에 대한 후회를 조용히 읊조리는 노래. 말하는 것 같은 가사와 잔잔한 멜로디가 참 좋았다.
당연히 사랑 노래라고 생각했는데, 태결은 이 노랫말을 연인 관계로만 해석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좀 더 다양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로 들렸으면 좋겠다고. 그 말을 듣고 다시 들으니 또 그렇게 들렸다. 같이 있으면 즐거웠고, 좋은 추억이 많았는데, 이렇다 말할 수 없는, 이유라고도 할 수 없는 그런 이유들로 소원해진 얼굴들.
그럼 어떻게 이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아주 오랜만에 오랜 친구들과 만난 자리를 떠올렸다. 즐거웠던 기억들이 가득한데, 어쩜 얼굴들도 하나도 안 변했는데, 참 반가운데, 예전 그때의 우린 아니구나 실감하는 순간.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고, 나는 이렇게 저 시절을 보내고 지나왔구나 깨닫는 기분. 그런 걸 그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뮤직비디오의 내용은, 정말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러 갈 준비하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이십 대 후반을 넘긴 친구들이란, 누구 한 사람의 결혼 정도 구실은 있어야 모임이 이루어진다. 다들 결혼식이 끝나고 저녁에 술 한 잔 할 모양이다. 오랫동안 조용했던 단톡방은 저녁에 있을 모임으로 모처럼 시끌벅적하다. 남자 또한 좋은 옷을 꺼내 입고 모임을 향해 나서지만, 작은 설렘과 기대감에 묘한 걱정이 슬며시 섞여 든다. 예전 그때 참 좋았는데. 오늘 만나도 그 기분일까. 그럴까.
일부러 느긋하게 걸어 약속 시간보다 한참 늦게 도착한 모임 장소. 떠들썩한 얼굴들이 반갑지만 불쑥 들어가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고, 애꿎은 담배만 한 대 꺼내 시간을 때운다. 누군가 그를 발견하고, 더는 망설일 수 없어 마지못해 문을 열고 들어선다.
역시나 반갑다. 즐겁다. 하지만 어딘지 미묘하게 어긋나는 기분을 모른 척 할 수가 없다. 함께 웃고 떠들지만 물한 컵에 너무 많이 탄 미숫가루처럼 섞이지 않는 느낌. 아 우린 달라졌구나. 변했구나. 그 시절은 끝났구나.
담배 핑계를 대고 조용히 나오는 남자. 한 대를 다 태웠지만 다시 들어가지 않는다.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전반적으로 평이한 연출에 힘을 주고 싶었던 부분은 후렴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구간이다. 처음으로 카메라를 직접 보고 노래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여기서 노래를 부르는 남자의 시간은 나머지 사람들과 다르게 흐른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섞이지 못하는 기분을 표현하고 싶었다. 촬영할 때 실제 노래를 2배속으로 빠르게 틀어 그 속도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이 영상을 다시 2배 느리게 편집해 실제 노래의 속도에 맞췄다. 이렇게 하면 노래를 따라 부르는 입만 제 속도로 보이고, 나머지 인물들은 2배 느린 슬로 모션으로 보이는 효과를 낼 수 있다.
...그 효과가 목표였는데, 생각보다 앵글 안에 다른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지 않아 티가 잘 안 난다. 나름 왁자하게 움직여줬는데, 그 정도로는 부족했는지 2배속의 느낌도 잘 살지 않는다. 장소가 좁은 게 한계였다. 촬영 거리를 좀 더 길게 잡고 더 넓은 앵글로 찍었으면 원하는 그림에 더 가깝게 나왔을 텐데.
어쩔 수 없다. 태결과 그 친구 역할로 나온 배우들 모두 실제 모교 연극동아리 친구들인데, 같은 동아리 원부연 선배 님이 본인 술집을 기꺼이 촬영 장소로 내준 거였으니까. 분위기 좋은 촬영 장소를 공짜로 쓸 수 있는 것도 너무 감사한데! 게다가 그 정도 앵글이 나올 만한 술집은 실제로도 많지 않다. 애초에 장소부터 기획해서 섭외하지 않는 이상.
실은 여기에 불꽃놀이나 폭죽도 함께 터뜨리고 싶었다. 어차피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장면은 판타지이니만큼, 그 비현실적인 효과를 화려하게 극대화하고 싶었다. 그만큼 화려한 분위기 속에 섞이지 못하는 모습을 더 강조할 수 있으니까. 게다가 폭죽 정도 되면 2배속 촬영의 효과도 훨씬 더 눈에 띈다.
하지만 못했다. 남의 좁은 가게에서 그렇게 폭죽을 터뜨릴 순 없잖아. 만약 터뜨렸다고 해도 촬영 시간상 한 테이크 만에 성공해야 한다. 한 번에 오케이가 안 나오면 두 번째 테이크는 폭죽의 잔해들을 전부 깨끗이 치우고 다시 갔어야 했을 테니. 촬영할 때의 비용과 시간이란 이렇게 작동한다. 맘껏 터뜨릴 수 있는 넉넉한 폭죽과 넓은 로케이션, 여유로운 시간 같은 것들.
그래도 즐거운 촬영이었다. 음악과도 잘 붙는 것 같고, 태결과 친한 형인 JUDE님이 작업해주신 색감도 따뜻하게 잘 어울린다. 무엇보다 가사만 들었을 때 떠올릴 수 있는 이야기 이상의 것들을 뮤직비디오가 보여줄 수 있는 것 같아 좋다. 노래를 더 풍성하게 느낄 수 있는 뮤직비디오였으면 좋겠다.
여담1. 맨 처음 태결이 외출 준비를 하는 방은 내가 결혼 전까지 살았던 자취방이다. 책상 위에 놓인 액자 속 사진들도 실제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동아리 친구들의 사진.
여담2. 태결이 술집에 들어가지 못한 채 망설이는 장면에서,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걸린 인물이 하필 여자 배우라 둘을 헤어진 연인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둘의 이야기인가 했다고. 내 실수였을 수도 있지만, 한 번 사랑 이야기로 생각한 노래를 다른 이야기로 바꿔 생각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했다.
<우리는>보다 더 후다닥,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기획으로 찍어낸 뮤직비디오. 음반 발매 일주일 전에 태결이 미리 노래들을 들려줬는데, 이번에도 듣고 있자니 이 음악에 그림들이 떠오르는 거다. 그래서 기왕 만드는 거 발매하는 날짜 전에 완성해보자며, 일주일 만에 배우와 스탭 섭외를 끝내고 안무와 콘티를 맞춰서 촬영했다.
"늦은 밤, 아마도 술 한 잔 하고 들어가는 연인. 술 먹고 먹는 아이스크림이 맛있다며 편의점에서 쌍쌍바를 하나 사 온다. 쌍쌍바를 산 연인답게 익살스레 반으로 쪼개 먹는 두 사람. 농담도 하고 장난도 치며 각자 반쪽 짜리 쌍쌍바를 먹는데, 별안간 남자의 손에 나머지 반쪽이 들려있는 것이 보인다. 여자는 처음부터 없었다. 헤어진 여자를 그리워하며 함께 먹던 쌍쌍바를 혼자 먹는 남자의 기억이었을 뿐.
처연하게 걸어가며 나머지 쌍쌍바를 먹는 남자의 귀에 자신의 마음 같은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한밤 중에 거리에서 연주하고 있을 리가 없는 밴드의 환상을 본 남자는, 환상 속에서 벅차오르는 감정을 춤으로 쏟아낸다. 그리고 돌아온 현실. 밴드도 없고, 음악도 없고, 여전히 그녀도 없다."
원테이크 형식을 취한 것은 연출적으로 재미있으면서 노래와도 잘 어울릴 것 같다는 게 먼저였지만, 현실적으로 편집이 거의 필요 없어 금방 만들 수 있다는 이유도 있었다. 찍을 때도 앵글이 자주 바뀌면 같은 연기를 여러 번하고 그때마다 조명 등의 세팅을 바꿔야 해서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한 테이크로 끝내면 매번 세팅을 바꾸는 시간도 필요 없다.
물론 조명과 동시녹음이 제대로 된 롱테이크를 찍으려면 오히려 컷이 바뀔 때보다 세팅할 게 훨씬 많다. 컷이 바뀌면 바뀔 때마다 딱 그 앵글에 맞춘 세팅만 하면 되지만, 롱테이크는 중간에 스탭이 개입할 수 없으니 긴 동선이 이어지는 동안의 모든 그림이 완벽하게 조명 아래 들어오고 오디오 수음도 이루어지도록 세심하게 세팅해야 하니까. 훨씬 스케일이 큰 작업이다. 하지만 우린 뮤직비디오라 수음도 필요 없었고, 조명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 자연스러운 그림을 원했으니 그것도 한 시름 덜었다.
더 완벽한 원테이크를 원했다면 화면 속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들의 동선을 미리 다 짜서, 마치 군무를 펼치듯 정확한 계산 하에 촬영을 해야 했겠지만, 그러면 일주일 만에 후다닥 섭외해서 못 찍는다. 역시나 타협은 중요하다. 그래도 마음에 든다. 타협하지 않았으면 못 나왔을 뮤직비디오. 있어서 좋다.
촬영은 연남동의 근린 상권에서 했는데, 원래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 곳인데다 밤 11시쯤 되니 인적도 적당히 드물어 촬영하기 딱 좋은 상태가 되었다. 행여 동네 분들에게 폐를 끼칠까 숨을 죽인 채 거의 아무 소리도 안 내고 조용히 찍었다. 그래서 밴드의 연주도 실은 전부 시늉만 하는 에어기타, 에어드럼이다.
과연 힙의 고장 마포구나 싶은 게, 조촐한 스탭이긴 했지만 그래도 뜬금없는 밴드에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춤까지 추는데 아무도 뭐 하는 거냐 묻지 않았다. 조용히 찍긴 했지만 민원 하나 없었고, 불만을 말하는 상인도 없었으며, 구경하는 행인도 없었다. 이 동네에서 촬영한답시고 카메라 들고 다니는 사람이 좀 많아야지. 마포에서 이 정도 촬영쯤은 그냥 주정 부리는 취객만큼의 관심도 받을 일이 없다. 편해라.
정말 후다닥 꾸려진 팀이라, 주연 배우 권성환은 내 동생을 불렀고 연인 역할 나애진은 동생의 친구를 불렀다. 세상 모든 형들은 동생이 하는 일에 후하게 만족하는 법이 없는데, 짧은 준비 기간에도 불구하고 잘 해준데다 춤 연습까지 훌륭하게 해와주어 고마웠다. 연인 역할의 두 사람도 친구끼리 마침 그림체가 비슷해서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좋더라.
여담. 중간에 지나가는 엑스트라 연인의 여자 역을 내 아내가 했다. 내가 섭외한 것도 아니고, 태결에게 연인 역할 엑스트라가 필요하다고 했더니 나에게 얘기도 안 하고 내 아내를 섭외해왔다. 둘도 친구라서.
연인 역할이라고 해봐야 그냥 팔짱 끼고 걸어가는 뒷모습이 나올 뿐인데, 그래도 다른 남자랑 팔짱 낀 걸 보니 기분이 좋지는 않더라. 심지어 둘이 서로 되게 어색해서 팔짱도 저 멀찍이 꼈는데. 아내가 배우가 아니라 다행이다. 나는 배우의 배우자가 되긴 힘들겠다.
*
누구나 무언가를 처음 만들기 시작했을 때는 그저 재미있어서, 좋아서 시작했을 거다. 그렇게 계속하다 보면 기술이 늘고, 더 잘하고 싶고, 더 배우고, 그러다 업이 된다. 업이 되면, 그때부터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어느새 재미를 잃기 시작한다.
그래서 가끔은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내려놓고, 상황이 따라주는 대로 즐겁게 만드는 기회가 필요한 것 같다. 이런 거 해보고 싶은데, 라는 생각이 들면 다른 복잡한 계산 접어두고 정말 해보고 싶었던 걸 해보는 즐거움. 그걸 한 번씩 느끼며 내가 좋아했던 것이 그저 일만 되버리는 순간을 미루고 싶다.
태결의 입장에서는 그래도 자기 노래에 붙는 뮤직비디오인데, 이렇게 부담 없이 상황 따라주는 대로 만들어지는 게 아쉬울 수도 있었을 거다. 그래도 함께 즐거워하며 기꺼이 내 작업을 받아줘서 고맙다. 적은 예산, 촉박한 시간에도 같이 참여해주는 다른 이들도 모두.
영상업을 하면 할수록 모든 게 다 돈이라는 걸 느끼고,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도 당연히 정당한 대가가 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이렇게 없는 돈 서로 긁어모아 그저 즐거우려고 함께 작업하는 순간들이 귀하다. 이런 순간들이 좋아서 이 일을 시작한 거였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또 언젠가는, 모든 조건을 넉넉하게 갖추고 나만의 마스터피스를 만들고 싶은 마음도 당연히 있다. 하지만, 그런 날은 안 올 거야. 절대 안 오겠지. 타협은 영영 끝나지 않을 거다. 그러니까 많이 연습해 둬야지.
이름 난 거장 쯤 되면 그래도 모든 걸 넉넉하게 갖추고 하려나. 아니 스티븐 스필버그도, 크리스토퍼 놀란도 현장에서 제작비 부족하다고 투덜대는 순간이 분명히 있을 거다. 네버엔딩 타협, 그래도 완성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