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까지의 <톡이나 할까?> 촬영지에 이어, 되새길 겸 정리해 보는 2021년 5월까지의 촬영지가 된 곳들.
서울에는 여전히 참 예쁜 곳들이 많다. 한정된 시간, 한정된 동선이라는 조건이 사람을 좀 더 치열하고 창의적으로 고민하게 만드는 것 같다.
기술한 내용들은 '촬영지'와 관련된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 내용의 많고 적음이 출연자가 아니라 공간과 연출에 대한 고민임을 주지해주시길 바란다.
이동진 편
파이아키아 / 서울 성동구
지금도 운전할 때는 '이동진의 빨간책방'을 듣는다. 아직도 오디오 콘텐츠 중에 이 정도의 밀도를 자랑하는 콘텐츠는 없는 것 같다. 하도 들어서 이제 이동진 평론가의 웃음소리까지 따라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니 그를 게스트로 섭외한 것은 다분히 내 사심이 컸다. 그러나 그는 사심과 무관하게 게스트로서도 너무나 훌륭한 인물이기에, 사심은 이렇게 정당성과 명분을 얻을 때 빛이 난다.
그와 이야기하는 장소는 '파이아키아'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영화, 책, 음악과 관련된 수집품들을 총망라한 작업실 '파이아키아'는 이미 여러 차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특별한 공간이고, 우리가 촬영을 논의할 즈음 그는 이 작업실을 소개(자랑)하는 책도 냈으니 촬영도 가능하지 않을까 했다. 그래도 개인 공간이니 만큼 조심스러웠는데, 그가 먼저 여기서 찍으면 어떻겠냐 제안해주셔서 쾌재를 외쳤다.
공간 자체에 이야깃거리가 가득하고, 스무 명 가까운 우리 스탭과 장비들도 충분히 들어갈 만큼 넓은 공간이어서 더할 나위 없었던 곳. 내 책도 한 권 꽂아두고 왔으니 이야말로 성덕이 아닌가. 좋아하는 이의 사인본 책을 받는 것만큼이나, 내 서명이 들어간 책을 그의 공간에 꽂아두고 오는 것도 대단한 일! (물론 선물로 드린 거다. 몰래 꽂아놓고 온 거 아님.)
문소리 편
최인아책방 / 서울 강남구 선릉로 521
어쩌다 보니 두 편 연달아 사심 가득한 게스트가 출연하시게 됐지만, 역시 두 분 모두 그 사심에 충분한 명분을 제공해주시는 분들이라 즐겁기 그지없었다. <가시나들> 때 인연을 맺은 소리 누나와 또 한 번 촬영을 할 수 있어서 반가웠던 회차.
'최인아책방'은 소리 누나와 사전미팅 때 나눈 이야기에서 이어진 곳. 촬영 때 무슨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까 이야기하다가, 온 가족이 제주도에 작은 집을 빌려서 보냈던 여름 이야기를 들으니 참 좋았다. 방송에 나가진 않았지만, 빌린 집 근처의 작은 책방에서 딸 연두와 하염없이 보냈던 이야기들과 함께 사진을 보여주셨는데, 이런 느낌의 장소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말로 '작은 책방'은 실제 촬영지로 사용할 수는 없어서 충분히 크면서도 오붓한 느낌의 '최인아책방'을 찾았다.
'최인아책방'의 2층은 제법 큰 서점 공간이고, 3층으로 올라가면 각자 조용히 책을 읽을 수 있는 '혼자의 서재'라는 공간이 있는데 느낌은 이쪽이 훨씬 좋았다. 하지만 역시 크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다.
소리 누나의 시 읽는 목소리는 참으로 감탄스러운데, 여러 번 읽어봤던 백석의 시도 방송 중에 소리 누나의 목소리로 들으니 새롭게 들렸다. 그리고 분량 문제로 미처 방송에 내지 못한 '울라브 하우게'의 시도 들을수록 여러 번 듣게 되니 들어보시길.
흑백영화 <자산어보>에 맞추어 '변요한 편'은 흑백으로 만들기로 결정하고 나서 몇 가지 공간들을 고민했다.
일단 흑백 영상은 말 그대로 색이 없기 때문에 오로지 명암의 '대비contrast'만으로 화면의 결이 표현되어야 한다. 색이 사라지고 선이 강조되기 때문에 잡다한 미장센 없이 인물만 강렬하게 강조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보통은 그래서 이른바 '블랙박스'라고 부르는 아무것도 없는 검은 무대에 핀 조명을 쏴서 대비를 강조하는 방식을 많이 활용한다. 배경도 시꺼멓고, 조명도 인물에게만 비치기 때문에 인물이 가장 선명하게 부각된다. 그래서 일단 대관 가능한 블랙박스 무대들을 몇 군데 알아보았다.
또 다른 대안이 바로 프로젝션 미디어아트였다. 공간 안에 실제로 다른 물체들이 자리를 잡고 있으면 시선을 분산시키지만, 평면에 투사된 영상은 질감부터 차이가 나기 때문에 블랙박스의 강렬한 대비 효과를 살리면서도 화면을 좀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프로젝션이야 아무 스튜디오나 빌려서 프로젝터 쏘면 되는 거 아닌가 싶겠지만 생각보다 세심한 세팅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무 스튜디오나 빌려서 촬영하면 한쪽 벽이야 어찌어찌 만들어 내겠지만, 두 출연자의 원샷 배경이 될 양쪽 벽까지 3면 영상을 끊김 없이 투사하는 기술은 후다닥 세팅해서 될 게 아니다. 빔프로젝터 세 대 빌려서 세팅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그래서 실제로 3면을 활용하는 프로젝션 미디어아트 장비를 세팅해 놓은 곳을 찾아서 활용하고자 했다. 아주 없지는 않으니까. 그런데 아주 적절한 공간을 막걸리 집에서 발견할 줄이야.
'막걸리는 살아있다'는 압구정에서 막걸리를 파는 술집인데, 실제 영업 중에도 가게 사면 벽에 여러 감성적인 영상을 프로젝션 해 분위기를 연출하는 독특한 컨셉의 공간이었다. 지하 매장이라 빛도 완벽하게 차단이 가능해서 여러모로 프로젝션에 안성맞춤인 공간. 평소에는 꽃이나 은하수 같은 영상들을 음악과 함께 틀어 놓는데 사면에 흐르는 은하수 속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면 얼마나 환상적일까 싶다.
해서 매장의 프로젝션 해상도에 맞추어 <자산어보> 느낌의 밤바다 영상을 새로 제작해서 틀었다. 이런 환경에서 실제 예고편을 감상하는 것도 인상적일 듯해 촬영 중에 예고편도 함께 보았다. 과연 압도적이었다.
실제로 매장은 층고가 그리 높지 않은 공간이라, 세로형인 우리 화면에서는 벽에 투사한 프로젝션 영상이 짧게 끊기고 천장이며 조명 설비가 고스란히 다 잡혔다. 두 출연자를 강조하기 위해 추가로 설치한 조명도 프로젝션이 끝나는 벽에 그대로 걸려서 모양새가 별로였다.
그래서 실제 공간에서 프로젝션이 끝나는 자리부터는 후반 작업에서 CG로 다 덮었다. 다행히 사용한 소스도 우리가 만든 소스라 그 소스를 그대로 활용해 작업할 수 있었다. 밤바다 영상이 딱히 요소의 이동이 없는 정적인 영상이었고, CG로 덮어야 하는 구간에 인물이 걸리지 않았으며, 3면이 모두 평면이라 비교적 합성의 수고를 덜었다. 마침 핀 조명을 설치한 자리가 딱 달의 바로 위였어서, CG로 덮고 나니 정말 달빛에 두 인물이 빛나고 있는 효과가 났다. 그래서 영상을 자세히 보면 달 바로 위의 밤하늘부터 별들의 밀도가 좀 달라진다. 거기서부터 새로 CG로 덮은 영역이라 그렇다.
다른 회차에서 '카톡화면의 재현' 이상으로는 시각적으로 특별한 역할을 하지 않았던 노랗고 하얀 카톡 메시지의 디자인도 이번 회차에서는 흑백화면과 어우러져 화면에 리듬감을 더했다. 흑백판을 만들기로 하면서 이런 시각적 재미를 기대했는데 그 이상으로 느낌이 좋아서 만족스러웠다.
연출적으로 이것저것 시도해보느라 만드는 재미가 있는 회차였다. 변요한 씨는 전에 본 적 없었던 독특한 카톡 활용법을 보여주셔서 편집면에서도 새로운 느낌을 낼 수 있었다. 물론 좋은 이야기도 많이 오갔고, 배우 본인도 만족한 듯했다.
그리고 한참 뒤로 개봉이 밀린 <자산어보>는 정말 나에겐 깊이 다가온 영화였다. 영화가 참 좋아서 그 영화를 홍보하러 나온 변요한 편에 정성을 많이 들인 것이 뿌듯했다.
최강희 편
플레이몽키 by 마이기어 /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3가 555-2
캠핑에 빠져지낸다는 최강희 씨의 말을 듣고 찾은 영등포의 캠핑샵. 소위 글램핑으로 불리는 실내캠핑장은 생각보다 서울 외곽에 많이 위치해 있었고 야외캠핑장에서 촬영하기엔 너무 추울 때였다.
사실 다른 예능들은 좀 춥더라도 패딩 껴입고 장갑 끼고 어찌어찌 야외촬영을 할 때도 많지만, <톡이나 할까?>는 무조건 맨손을 써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손가락 터치를 해야되는데 추운 곳에서 촬영하면 손이 곱아버리니까 촬영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찾아낸 곳. 기본적으로 캠핑용품을 파는 곳이었지만, 뒤뜰에는 텐트와 모닥불을 설치해 실제 캠핑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공간도 있었고 이런저런 이벤트도 하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앉아서 촬영을 진행한 곳은 원래 캠핑 용품들의 사용 예시를 보여주기 위해 디스플레이 되어있던 공간.
촬영 때문에 수많은 연예인들을 일상적으로 보면서도 가끔 덜컹, 하고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 때가 있는데,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오랫동안 TV로 보아온 분일 때 그렇더라. 촬영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최강희 씨가 도착했을 때, <학교>와 <광끼>의 애청자였던 나는 순간 묘한 경이로움을 느꼈다. PD로 지내며 종종 만나는 설렘의 순간들.
이선희 편
영산아트홀 / 서울 영등포구 여의공원로 101
이선희 님을 모시고는 무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아니 이 분과는 무대 이야기를 해야 했다. 무대를 떼어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분일까.
더구나 코로나 때문에 대부분의 무대가 열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 그렇게 닫힌 무대 위에서 무대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면 더 의미 있을 것 같았다.
사실 공연장들은 대부분 촬영지로 쓰기엔 시각적인 재미가 부족하다. 매 공연마다 서로 다른 무대를 준비하기 때문에 공연장 공간 자체는 아주 베이직한 형태일 때가 많고, 심지어 클래식 연주회를 위한 공연장들은 음향의 문제 때문에 무대 위가 아주 간결하다.
촬영지로 선택한 <영산아트홀>은 클래식 공연장 특유의 정갈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무대 중앙에 커다란 파이프오르간이 훌륭한 미장센이 되어 주었다.
무엇보다 정적이 아주 훌륭한 공간이라는 점이 좋았다. <톡이나 할까?>는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오디오 수음의 데시벨 기준을 아주 낮게 잡는다. 피식, 하는 웃음소리나 숨소리까지 잡아내기 위해 타 프로그램에 비해 훨씬 소리를 증폭해서 녹음한다는 뜻이다.
덕분에 출연자들의 미세한 소리까지 녹음되긴 하지만, 스탭들의 부수적인 소음까지 너무 잘 들리게 된다는 게 문제다. 앵글이나 조명을 바꾸기 위해 부시럭 대는 소리, 디렉션을 주고받느라 속닥이는 소리, 촬영이 바빠 끼니를 못 챙겨 먹어 꼬르륵거리는 소리까지. 촬영하는 공간이 작으면 작을수록 부산스러운 소음들이 더 배가 되어 곤란할 때가 많다.
잘 설계된 연주회장은 필요한 소리를 깔끔하게 증폭시키고, 쓸데없는 소리들은 잘 깎아낸다. 어느 촬영장보다 오디오가 깔끔하게 따였던 촬영장. 더구나 발성이 너무 좋으신 출연자였으니.
딘딘 편
감정선 프로젝트 /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647 지하 1층
딘딘 편은 대화를 나누는 방식에 살짝 변화를 시도해 본 회차였다.
'카톡 대화'의 특징 중 하나는, 상대방이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도 다른 경우와 완전히 동일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이다. 음성 대화로 이걸 하려면 <복면가왕>에서 하듯 음성변조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변조된 목소리는 굉장히 부자연스럽기 때문에 평소처럼 대화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카톡은 프로필 사진과 이름만 뜨지 않을 뿐 원래의 말투, 습관, 호흡 등을 그대로 가져갈 수 있다.
상대의 정체를 모른 채 나누는 깊이 있는 대화는 묘한 긴장감이 있다. 여기에 MC 입장에서는 누구일까 추론하는 과정의 스릴도 있을 것이고.
다만 이걸 하려면 첫째, MC와 평소에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사람이되 둘째, 시청자에게는 특별한 설명이 필요 없는 친숙한 인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하는 대화인 만큼 게스트에 대한 자세한 정보도 소개할 수가 없는데, 시청장 입장에서 낯선 인물이면 너무 불친절한 대화가 될 테니까. 동시에 이나 님과 친분이 있어서 정체를 숨긴 게스트 입장에서는 이 상황을 좀 더 재미있게 활용할 수 있었으면 했다. 사실 초면인 사람과는 이런 걸 하기도 좀 이상하지 않나.
딘딘 만한 사람이 없었다. 이나 님과 편한 사이이면서, <1박2일>의 얼굴인 만큼 전 세대에게 친숙하고, 세팅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적절히 써먹을 만큼 기민한 사람.
물론 그냥 게스트로도 딘딘은 충분히 매력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친한 만큼 평소처럼 세팅된 대화의 장은 좀 새삼스러울 수도 있었다. "맨날 얘기하는데 무슨 얘길 또 해요?" 그런 면에서 친했던 사람과 정체를 숨기고 해 보는 대화는, 평소였다면 나누지 못했을 이야기의 새로운 결을 발견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런 의도였던지라, '같은 공간이되 서로가 보이지 않게 분리된 공간'을 찾는 게 중요했다. 촬영지로 선택한 '감정선 프로젝트'는 취미로 미술을 배우는 공방인데, 수강생들이 본격적으로 작업을 하는 공간과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고 각 공간의 서로 다른 분위기도 잘 연출되어 있었다. 두 공간을 교차로 편집할 때 각각의 컷이 비슷하면서도 다른 분위기를 보여줄 수 있어서 좋았던 곳.
이주영 편
더바지 라운지 / 서울 영등포구 여의서로 160
이주영 편은 <톡이나 할까?>를 함께 만드는 이은재 PD가 맡아서 연출했던 회차였고, 이주영 씨가 출연하는 드라마 <타임즈>에서 그의 배역이 정치부 기자라는 점을 활용해 국회의사당이 정면으로 보이는 라운지 바를 섭외했다.
시시각각 야경으로 변해가는 국회의사당의 풍경도 몹시 인상적이었고, 커다란 통유리 너머로 여의도의 도로가 고스란히 들어와 클로즈업 샷에 오가는 차들의 불빛이 영롱하게 잡혔다. 두 출연자의 예쁜 프로필을 더 아름답게 잡을 수 있었던 로케이션.
이주영 배우는 몇몇 독립영화와 <이태원 클라쓰>에서도 인상적으로 보았던 배우인데, <톡이나 할까?>도 <가시나들>도 재밌게 보았다고 언급해주신 적이 있어서 촬영장에서 혼자 내적 반가움 가득한 눈빛으로 맞이했었다.
염정아 편
천장지구 / 서울 강남구 언주로 150길 51
원래 연말에 개봉 예정이었던 영화에 맞추어 복고 컨셉으로 촬영을 진행했는데, 영화 개봉이 연기되면서 방송일정도 조금 미뤄졌고 내용도 약간 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이질감이 없었던 건, 염정아 님이 이렇게 장식적 요소가 가득한 화려함을 늘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배우라서 아닐까.
마침 이나 님이 너무 좋아하는 영화 <장화, 홍련>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오갔고, 촬영지 '천장지구'도 아예 <장화, 홍련>에 맞췄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고풍스럽고 미스터리 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거기에 염정아라는 배우가 앉아있음으로 완성되는 아우라가 있는 것 같다.
이나 님도 너무 좋아하는 출연자라 촬영이 끝나고 두 분이 함께 찍은 사진에서 목이 한껏 나오셨다. 이나피셜 너무 좋아하는 사람 옆에서 사진을 찍으면 쭈굴미가 발산되신다고.
옥주현 편
올드문래 / 서울 영등포구 도림로 433-6
<위키드>의 느낌을 어떻게 연출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녹색이 컨셉인 공간을 찾아볼까, 아니면 '오즈의 마법사'가 컨셉인 공간을 찾아볼까.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노란 길에 포인트에 맞춰 바닥이 노란 곳을 찾아볼까. 후보가 될만한 공간들을 몇 군데 찾아보았지만 썩 이렇다 할 곳이 없었다.
그렇다면 모티브가 아니라 아예 <위키드>의 무대 자체를 모사해보기로 했다. <위키드>는 나도 커다란 감동을 받은 뮤지컬이었고, 세련된 무대 미술도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오즈의 마법사'를 구현한 공간을 찾기는 어렵겠지만, <위키드> 무대의 컨셉인 '스팀펑크' 느낌의 인테리어는 잘만 하면 찾을 수 있겠지 싶었다. 거대한 시계나, 톱니바퀴를 활용한 인테리어. 산업혁명 시기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인테리어는 요즘은 유행이 좀 지났지만, 십여 년 전까지는 꽤 유행했던 터라 남아있지 않을까 싶었다.
놀랍게도 작가님이 커다란 벽에 톱니바퀴들이 돌아가는 공간을 찾아내 오셨다. 오랫동안 철공소 밀집지역이었던 문래동은 몇 년 전부터 이러한 개성을 활용한 젊은 가게들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널찍한 맥주집 '올드문래'는 다양한 톱니바퀴의 인테리어로 문래동의 분위기를 훌륭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톱니바퀴를 찾아냈으니 나머지는 쉬웠다. <위키드>의 상징인 녹색이나, 마녀들이 주인공이라 느껴지는 신비로운 분위기는 우리 장비로도 충분히 구현할 수 있으니까. 원래는 회색톤인 '올드문래'의 벽에 녹색조명을 비추고, 포그를 깔아서 <위키드>의 분위기를 연출했다. 작품을 설명할 때 인서트로 활용할 '오즈의 마법사' 인형들은 물론이고.
옥주현 씨가 들려주신 진솔한 이야기들이 화면과 잘 어우러져 보람 있었던 세팅이었다.
한예리 편
딩가케이크 / 서울 마포구 동교로29길 68
8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미나리>에 맞춰, 역시 80년대 미국을 컨셉으로 하는 공간을 찾았다. 마침 <미나리>와 별개로 국내에서도 미국의 레트로 컨셉이 곳곳에서 유행을 타는 중이었어서 비슷한 공간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다만 늘 그렇듯, 이렇게 컨셉을 꼼꼼하게 갖춘 공간은 보통 굉장히 작다.
그중 연남동의 <딩가케이크>는 이러한 컨셉을 2층짜리 단독주택 전체에 호방하게 구현한 곳이어서 안성맞춤이었다. 얼마 전부터 유행한 미국의 70~80년대 스타일 레터링 케이크를 파는 카페인데, 유행하기 전부터 꽤 오랫동안 입소문이 났던 곳으로 기억한다. 주문제작도 하는 곳이라 우리 부부도 한 번 선물용으로 주문해본 적이 있고, 무엇보다 마침 집에서 도보로 5분 거리라 촬영장 가는 출근길이 너무 가뿐했다.
한예리 씨는 배우로서 아주 오랫동안 멋지다고 생각해 온 분이었다. 어느 작품에서든 넘침도 부족함도 없이 아주 정확하게 배역을 연기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미나리>에서도 내게는 배우 한예리의 연기가 가장 돋보였고, 개인적으로는 그의 영화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우리 출연분에서도 최대한 그의 질감을 잘 살리고 싶었다. 완성된 방송분에도 그의 다양한 결이 담긴 것 같아 애정이 많이 가는 회차다.
유현준 편
테르트르카페 / 서울 종로구 낙산5길 46
<톡이나 할까?> 전체 회차를 통틀어 장소에 대한 문의가 가장 많았던 곳.
건축가를 모시고,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 그래서 앉은자리에서 눈만 들어도 '도시'에 대한 이야깃거리가 줄줄이 눈에 들어오는 곳을 찾고 싶었다.
서울, 특히 강북은 역사의 층위가 더께처럼 쌓여있는 것이 매력이라고 늘 생각해온 바, 이러한 매력이 한눈에 보이는 장소였으면 했다. 숭례문 인근의 루프탑도 가보고, 광화문 인근에서 덕수궁이 보이는 뷰도 가봤지만 가장 매력적이었던 곳이 바로 이 낙산 위의 '테르트르카페'였다.
사실 다른 후보지들보다 다른 조건들은 촬영에 불리한 편이었다. 언덕 위에 있는 카페까지 올라오는 길도 꽤나 복잡했고, 공간의 폭도 작은 편이라 앵글을 잘 잡아야 했다. 하지만 거슬리는 프레임 없이 통창 너머로 보이는 서울의 다층적인 풍경은 다른 조건을 감수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멀리 보이는 도심의 고층 빌딩과, 창신동 일대의 구옥 주거단지, 그리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성곽은 그 자체로 서울의 역사였다. 건축물 하나 만으로도 할 얘기가 많은 DDP도 바로 시야에 들어오고.
실제로 이런 독특한 풍경 때문에 이미 다른 방송에서도 여러 차례 왔다 간 모양이었다. 카카오TV 런칭을 함께 했던 <밤을 걷는 밤>에서도 유희열 씨가 잠시 들러 야경을 즐기다 가셨고, <유 퀴즈 온 더 블록>도 왔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
단지 도심의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는 이유 만으로 항상 그렇게 사람들이 찾는 건 아닐 텐데, 이상하게 이곳의 뷰는 묘한 마력이 있었다. 촬영 전 사전 답사로 들렀을 때는 시간이 살짝 늦어 해가 기울고 있었는데, 작은 의자에 옹기종기 앉아 통창 너머 지는 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득했다.
나도 잠시 그곳에 앉아 그 기분을 즐기고 싶었지만, 답사하는 날 그럴 여유는 없다. 이 프로그램을 하면서 좋고 멋진 곳을 많이 보러 다니는데, 매번 즐길 기회는 없어 괜히 분할 때가 많다.
팽현숙 편
아쿠아플라넷63 / 서울 영등포구 63로 50
예능에서 깔깔깔 웃을 수 있는 재미를 업계에서는 '나까'라고 부른다. 이런 방송계 은어들은 대부분 일본어에서 유래했는데, 그 어원들을 작정하고 한 번 다 파헤친 글을 적은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나까'의 어원은 확인하지 못했다.
어쨌든 <톡이나 할까?>는 이 '나까'의 재미는 별로 없는 프로그램이다. 애초에 그게 목적인 기획이 아니기도 했고, 예능PD로서 내가 잘 소화하지 못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하지만 프로그램은 나 혼자 만드는 게 아니고, 예능을 좋아하는 다른 제작진들은 호시탐탐 이런 재미를 보여주고 싶은 욕구를 내보이곤 했다.
그래서 팽현숙 씨가 섭외됐을 때, 평소와는 좀 다른 결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 이PD에게 맡겼더니 아쿠아리움을 섭외해왔다. 팽현숙이니까 펭귄 앞에서 찍으면 어떻겠냐고. 듣자마자 빵터졌다. 과연 카톡을 하는 두 사람의 머리 뒤로 종횡무진 날아다니는 펭귄들의 그림은 가히 경이로웠다.
고민시 편
CGV 피카디리1958 / 서울 종로구 돈화문로5가길 1
커다란 극장, 비어있는 객석에 나란히 앉아있는 그림은 묘한 차분함이 느껴지게 만든다. 특히 우리 대부분은 객석에 앉아 무대를 바라보는 경험을 주로 하지, 무대 쪽에서 저리도 기하학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객석을 볼 일은 거의 없으니까.
2회의 박은빈 편에서도 활용했던 이 객석의 그림을 이번엔 영화관으로 변주해 보았다. 실제로도 큰 소리를 낼 수 없는 공간인 상영관의 어두운 조명은, 카톡을 주고받는 분위기에도 현실감을 더한다. 그중에서도 구 피카디리였던 극장을 선택한 것은 극장 안에 영화와 관련된 이런저런 오브제들이 있었기 때문인데, 프로그램의 구성상 인트로에만 몇 컷 쓰고 실제 촬영에는 상영관 내부만 하염없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시각적 단조로움에 조금이나마 변주를 주기 위해 영사기와 스크린을 활용했다. 다만 실제 스크린에 영사된 영상의 빛 만으로는 인물의 얼굴을 밝히는 데 한계가 있어서, 스크린에 영사가 되는 장면은 따로 찍고 실제 촬영에는 스크린 앞에 조명을 설치했다.
문제는 그렇게 하면 스크린으로부터 시시각각 드러나는 색감의 변화를 반영할 수가 없다는 거였다. 당연한 일이다. 스크린의 반사광이 약해서 이를 뛰어넘기 위한 조명을 설치한 거니 스크린의 반사광은 먹혀버릴 수밖에. 인물 얼굴 위로 스크린 반사광의 색감이 떨어지는 걸 담고 싶었는데 아쉽기가 그지없었다.
그런데 조명감독 님이, TV톤이라고 부르는 조명 옵션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이걸 이용하면 마치 TV영상의 빛이 불규칙하게 바뀌는 것 같은 효과를 줄 수 있다고. 사용해보니 몇 가지 색감의 조명을 불규칙한 호흡으로 왔다갔다 해서 비슷한 느낌을 연출할 수 있더라. 방송에서 두 사람의 얼굴 위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색감은 이걸 이용한 거다. 물론 실제 영상의 빛이 반사되는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느낌은 충분히 담겼다.
이런 게 있을 줄이야. 역시 뭘 알아야 써먹을 수 있다. 배울 게 많다.
이제훈 편
래프터55 / 서울 영등포구 문래로 55
촬영지를 정하며 가장 난감할 때가, 컨셉이 될 작품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거나 시각적으로 뾰족한 디테일이 보이지 않을 때다. 출연 게스트의 상당수는 공개 예정인 작품의 홍보가 목적인 경우가 많고, 말인즉슨 촬영 시점에는 아직 작품이 공개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심지어 <톡이나 할까?>는 제작 여건상 출연이 결정되는 시점과 실제 방송일까지 한 달 이상 차이가 날 때도 많아 미리 받아볼 수 있는 자료도 한정적인 경우가 잦다.
이제훈 씨가 출연 예정이었던 <모범택시>도 촬영지를 결정해야 하는 시점에는 '액션 느와르'라는 장르와 대략의 시놉시스, 티저영상 정도만 공개된 상황이었다. 티저영상 역시 영상미는 훌륭했지만 이야기의 주 무대가 되는 공간이나 뾰족한 컨셉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일단 느와르라고 하니, 무난하게 티저영상에서 언뜻 보였던 폐공장 같은 공간들을 활용해볼까 했다. 몇 군데 후보지를 둘러보았지만, 다들 촬영장으로 쓰기엔 여건이 너무 열악했다.
작전을 바꿔서, 작품이 <모범택시>고 실제로 작품 속에 모범택시가 주 소재로 등장하니 아예 모범택시를 갖다 놓으면 되겠다 싶었다. 그럼 문제가 쉬워진다. 지붕 아래 차량을 들일 수 있는 촬영 가능한 공간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있긴 있다. 대형 스튜디오들 중에서는 문을 이중으로 열어 차를 들일 수 있도록 된 곳들이 종종 있다.
'래프터55'는 철공소와 정비소가 즐비한 문래에 자리한 촬영용 스튜디오였다. 바로 같은 담장 안에는 여전히 영업 중인 차량 정비소가 그대로 있다. 원래는 창고 거나 정비소였을 옆 건물 하나를 비우고 대관용 스튜디오로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원래 정비소였을 테니 당연히 중문을 열면 차를 끌고 들어와 배치할 수 있는 구조였다. 주차하기도 너무 좋고.
스튜디오로 말끔하게 정리된 공간이지만 동시에 정비소 건물이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어, 적당히 깔끔하면서도 느와르의 거친 느낌이 동시에 살아있는 묘한 공간이라 마음에 들었다.
주차해놓은 택시의 조명을 그대로 켜놓으니 다소 심심할 수 있었던 그림에 입체감이 더해졌다. 특히 그냥 찍었으면 심심했을 하얀 벽에 후미등의 붉은 조명이 반사되는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위아래 노랑까망 모범택시룩으로 맞춰 입고 온 이제훈 씨의 날카로운 콧대가 더 돋보이는 옆얼굴의 조명이 되어준 셈.
엄태구 편
벌스 가든&하우스 / 서울 마포구 성미산로23길 44
엄태구 편은 이제훈 편과 연달아 방송될 예정이었고, 둘 다 홍보할 작품이 느와르라 느낌이 겹칠까 고민이 많이 됐다. 더구나 넷플릭스 <낙원의 밤>은 <모범택시>보다도 자료가 더 없었다. 유일한 자료인 예고편을 유심히 봤다. 제주도의 풍광, 푸른 색감, 낙원... 열대식물 느낌이 많은 공간이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연남동의 벌스가든은 평소 지나다니면서도 눈여겨본 공간이었다. 가든이나 화원을 컨셉으로 한 카페가 종종 있지만, 촬영하려 알아보면 생각보다 식물의 존재감은 그리 크지 않은 곳이 많다. 하지만 이 곳은 확실히 공간의 분위기를 다채로운 식물들이 책임지고 있었다.
또 채광이 워낙 좋아서 큰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의 존재감이 훌륭했다. 싱그러운 식물들 속에서 느와르의 느낌을 연출하려면 이 직사광선에 식물들의 그림자가 어지럽게 드리우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풀샷에도 화면 절반을 덮는 식물의 그림자를 가득 늘어뜨리고, 엄태구 씨의 얼굴에도 그림자가 떨어지도록 배치했다. 클로즈업 샷 너머로도 복잡한 식물들의 실루엣이 화면을 어지럽혔다.
워낙 푸른 톤이 강하게 살아있는 <낙원의 밤>의 화면과 완전히 비슷하게 잡기엔 프로그램 톤의 한계가 있었지만, 색재현도 평소보다 푸른 톤을 강하게 살려 느와르의 질감을 구현하려 했다. 이런 여러 가지 요소들이 어우러져 확실히 시각적으로 차별화된 느낌을 얻었고, 걱정했던 이전 회차의 이제훈 편하고도 전혀 다른 분위기를 만들 수 있었다.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그동안 엄태구 씨가 출연한 예능 중에 가장 편안하게 많은 말을 하고 가신 자리라는 거다. '말을 안 해도 되는 토크쇼+탁월한 호스트 김이나'의 조합이 이루어낼 수 있는 최고의 아웃풋.
내성적인 분들 <톡이나 할까?>로 오세요.
심재명 편
명필름아트센터 / 경기도 파주시 회동길 530-20
처음으로 서울을 벗어난 촬영지...라고 하기엔 평일 낮 파주의 명필름아트센터는 상암에서 어지간한 강남보다 오히려 가까운 곳이긴 하다.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님을 촬영하려면 당연히 명필름아트센터에서 촬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이런 회사 건물들에는 촬영에 적절할 만큼 시각적으로 흥미로운 공간이 잘 없는 게 보통이다. 다행히 명필름아트센터에는 그 명성에 걸맞게 명필름 영화들의 이런저런 요소들이 곳곳에 있었고, 추가적인 설명 없이 이러한 미장센 만으로도 명필름이 어떤 영화사인지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다.
촬영은 1층의 카페 모음에서 진행했는데, 카페 한쪽에 걸려있는 명필름 영화들의 포스터 원본 사진들이 그 자체로 훌륭한 오브제였다. <공동경비구역 JSA>, <해피엔드>, <바람난 가족>, <조용한 가족> 같은 한국영화사에 길이남은 영화들의 포스터 원본 사진이라니. 사진 속 대배우들의 풋풋했던 모습을 보는 것도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방송에서도 언급됐지만 이 사진들은 전부 오형근 작가 한 분이 작업한 사진들이라고. 한 제작사의 색깔을 균일하게 가져가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구나.
위층에서는 명필름 영화들의 시나리오와 소품들의 전시가 꾸려져 있었다. 우리가 촬영하는 시점에는 아직 준비 중이었는데, 실제 배우들이 입었던 의상과 촬영에 쓰였던 소품들, 시나리오들이 있었다. 가장 눈을 사로잡은 것은 <건축학개론> 납뜩이의 의상. 영화 속 캐릭터의 존재감과 더불어, 가장 회자가 많이 된 장면에 입고 있었던 의상이라 한눈에 들어왔다.
중요한 것은 이토록 눈에 띄는 의상이 영화 속에서는 아무런 이질감 없이 잘 녹아들었었다는 것. 시대를 재현한 감각이 다소 과장된 캐릭터와 어우러져 전혀 튀지 않았음에도, 영화 밖으로 나오니 이토록 기억에 남는 의상이 된 것이다. 캐릭터를 각인시키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심재명 대표님은 묘한 매력이 있는 분이었다. 흔히 '남자들의 세계였던 영화계에 자리를 잡은 1세대 여성제작자'라는 수식어를 들으면 떠올릴 법한, 치열하게 버티고 싸워낸 흔적을 자기도 모르게 찾게 되는 그런 이미지는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그게 바로 선입견이라고 존재로 증명해 보이듯.
물론 그 시간들은 충분히 치열했을 것이나, 그럼에도 대단히 온화하고 마주 앉은 사람의 마음을 이상하게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분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어떤 후배 동료에게도 말을 놓지 않으신다고.
한국영화의 역사를 함께 보내온 사람의 그러한 매력이 방송분에도 잘 담겼으면 했다. 만들어놓고 보니 내가 담고 싶었던 만큼은 채 담기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많이 남는 회차기도 하다.
명필름아트센터에 지하에는 주말에만 운영되는 영화관이 있는데, 답사 때 대표님이 이 극장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 보였다. 우리 촬영에는 활용하지 못했지만 실제로 어떤지 궁금해 후일 영화를 보러 다시 찾았다. 과연 자부심을 가질 만한 극장이었다. 영상, 음향, 좌석의 편안함,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훌륭한 영화 경험이었다. 서울의 여러 극장들과 비교해도 단연 압도적이었다. 손 닿는 거리에 극장이 즐비한 마포구에 살고 있지만, 일부러 운전을 해서 종종 찾아가게 될 것 같다. 그럴 만한 극장이다.
노래나 만들까? 편 (윤상, 이원석)
각자의 작업실 /
대형 호리존 와이드 스튜디오 / 경기도 파주시 연다산동 389
윤상 님과 이원석 님이 게스트(?)로 등장한, 본격 김이나 덕심충전 프로젝트였던 '노래나 만들까?'편은 곡을 쓰고, 가사를 쓰고, 녹음을 하는 과정까지 담기 위해 세 번에 나눠서 녹화를 진행했다.
시간적으로도 세 번을 나눴지만, 공간적으로도 세 곳이 나눠졌다. 처음으로 각자의 공간에서 정말 일상적인 카톡을 하듯이 이루어진 촬영이었는데, 사실 이렇게 현장을 쪼개는 것이 촬영에는 꽤 부담이 크다. 팀을 세 개로 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자리에 모여있으면 출연자가 아무리 많아도 동시녹음도 한 팀, 조명도 한 팀, 카메라도 한 팀으로 오퍼레이팅하면 되고, PD도 한 사람이 모든 걸 챙길 수 있다. 하지만 촬영 장소가 나눠지게 되면 출연자가 단 한 명뿐이어도 모든 촬영팀과 장비가 세 배가 되어야 한다. 오디오 감독도 조명 감독도 세 분이 나와야 하고, 메인PD가 세 곳을 동시에 챙길 수 없으니 각 현장의 연출진들끼리 손발이 잘 맞아야 한다.
그만큼 부담이 커지는 촬영이긴 했지만, 그래도 윤상이 곡을 쓰고 김이나가 가사를 쓰고 이원석이 노래하는 과정을 서로 카톡으로 주고받으며 차근차근 담는다니, 포기할 수 없는 아이템이었다. 기왕 할 거면 확실하게 하자는 생각에 아낌없이 공을 들여 찍었다.
곡의 틀을 잡고 데모를 만드는 첫 촬영은 세 사람 모두 각자의 작업실에서 찍었다. (작업실이니까 편한 모습으로 찍자고 했더니 이나 누나가 정말 기대 이상으로 편하게 나와 놀라웠던 날이기도 했다.)
두 번째 촬영 때는 데모가 완성된 상태에서 이나 님의 가사 작업만 필요한 단계였기 때문에, 이나 님만 작업실에서 한 번 더 찍고 다른 두 분 작업실 바로 옆의 카페로 이동해 그림을 좀 바꿔봤다. (놀랍게도 두 분 모두 작업실 바로 옆에, 혹은 같은 건물에 카페가 있었다.)
컷이 바뀔 때마다 세 개의 공간이 계속 바뀌기 때문에 혼란을 줄이기 위해 톤의 정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평소보다 색재현을 좀 더 강하게 잡아 인위적으로 색감을 구분했다. 신기한 것은 의상에 대한 디렉션을 드린 적이 없는데 윤상 님은 두 번 모두 파란 계열을, 이나 님은 두 번 모두 핑크 계열을 입고 왔다는 점이고, 더 놀라운 것은 두 사람의 공간도 의상 색깔과 비슷한 톤이라는 거였다. 심지어 윤상 님은 한 번은 작업실, 한 번은 카페였는데도.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원본의 색감을 그대로 강조해 블루와 핑크 톤을 잡았고, 원석 님의 공간만 기본 톤을 살려 세 장소의 톤을 나눴다.
<톡이나 할까?> 원래의 세팅인 마주 앉아하는 '대면 카톡'은, 그 독특한 긴장감과 특유의 분위기에서 나오는 소통의 결을 담기 위한 기획이긴 했지만 실제로 평소에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사실이니 어느 정도 인위적인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이렇게 각자의 장소에서 실제 작업을 카톡으로 주고받는 과정을 담으니 확실히 새로운 몰입감이 살아났다. 물론 세 사람이 이미 유대관계가 잘 형성되어 있는 사이라서 마주 보고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생략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처음엔 카톡을 주고받으며 간단한 로고송 정도 만들어보자고 시작했던 일이, 세 사람이 작업물을 주고받으면서 진행될수록 점점 사이즈가 커져 결국 제대로 된 노래 하나가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렇게 된 김에 그럼 음원까지 발매하자는 얘기가 나오자 뭐라도 뮤직비디오를 찍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애초에 이렇게 계획했던 프로젝트가 아닌지라, 제대로 된 뮤직비디오를 준비해서 찍을 수는 없는 상황. 심지어 <톡이나 할까?> 제작비 안에서 만들어야 하는 만큼 엄청난 기획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럼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메이킹 필름의 형식을 선택한다. 곡을 작업하는 과정의 이미지들과, 녹음하는 당일 노래하는 장면을 편집해서 만드는 뮤직비디오. 어차피 그 과정을 찍은 방송분이었으니 소스는 다 준비되어 있고, 새로운 촬영 없이 음악에 맞춰 적절하게 편집만 하면 만들 수 있는 뮤직비디오였다.
아무래도 그렇게 가야겠다, 생각을 하다가, 아무래도 그렇게만 가기는 싫어졌다. 너무 무난하잖아.
그럼 어쩌나. 제작비도 별로 없고 심지어 세 출연자와 데이브레이크가 모두 맞출 수 있는 스케줄도 아주 빠듯한데. 그것도 촬영일 기준이고 음원 발매까지 제작을 마치려면 더더욱.
그럼 기존의 소스들을 활용하는 메이킹필름의 서사는 그대로 가지고 가되, 정말 그걸 잘라 붙이기만 하는 편집영상 대신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연습장면들을 사용하되 편집된 화면을 그대로 내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은 투사였다. 원래는 메이킹필름이었어야 할 소스를 대형 스크린에 투사하고, 그 앞에서 다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찍는다면 같은 서사도 다르게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노래도 두 개의 층위를 다루는 내용이었다. 겉으로는 괜찮은 것 같은 일상과, 이면에서는 조용히 무너져가고 있는 감정에 대한 이야기. 그렇다면 뮤직비디오에서도 스크린에 투사되는 괜찮은 일상과, 그 앞에서 노래하는 내면의 목소리라는 두 개의 레이어가 보였으면 했다.
그럼 중요한 것은 영상을 투사할 스크린과 스튜디오의 크기였다. 벽에 투사되는 영상의 사이즈가 충분히 커서 그 앞에서 노래하고 있는 실제 인물의 크기와 대비가 강하게 드러났으면 했다. 원테이크로 이동해야 하는 만큼 가용한 동선의 범위도 충분히 커야 했다.
호리존 스튜디오의 높이가 최소 6m 이상은 되고, 거기에 투사할 프로젝터의 거리도 충분히 확보되는 사이즈의 공간을 찾다 보니 딱 한 군데, 파주의 와이드 스튜디오가 나왔다.
그렇게 완성된 '말 되지 않을 건 없잖아' 뮤직비디오. 장비와 시간의 문제 때문에 카메라 워킹 등에 아쉬움이 좀 남긴 하지만, 주어진 조건 안에서 '선방'했다. 방송은 늘 타협의 연속이다.
<펜트하우스>로 연일 주가를 올리고 있는 봉태규 씨는, 주로 연기하는 괴팍하고 이기적인 배역들과 달리 실제로는 몹시 가정적이면서도 선구적인 가치관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인간 봉태규'의 단정하면서도 단단한 내면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 촬영지였으면 했다. 정원이 있는 단정한 주택이나, 한옥 같은.
그렇게 선택한 곳인데, 우연히도 '더마틴'은 봉태규 씨가 실제로 단골인 가게라고 한다. 그래서 가게 사장님은 당연히 그 이유 때문에 이곳을 촬영지로 정한 줄로만 아셨다고. 봉태규 씨의 친척이 근처에 살고 있어서 왔다 갔다 하며 자주 들르는 가게였다는 걸 촬영이 끝나고 알게 되었다. 크로와상 안에 젤라또를 넣어 먹는 젤라또 샌드위치가 이 집의 명물이다.
실은 방송 화면 속에 두 사람이 앉아있던 곳보다 좀 더 앞쪽의 계단에 앉힐 생각이었다. 그 편이 앉은 자세가 더 편할 테니까. 그런데 날씨가 너무 화창해 강한 햇살에 눈이 심하게 부시다는 말을 듣고, 그늘 안쪽으로 더 들어가시도록 한 게 방송에 나간 자리다. 아무래도 계단 보다는 훨씬 불편한 자세가 되었고, 그냥 의자와 테이블을 세팅해주시면 어떻겠냐는 의견에 잠시 고민했지만 봉태규 편을 맡은 이PD의 강행에 그냥 바닥에 앉는 것으로 했다. 원래 생각했던 그림이 이 느낌이었으니까.
그리고 <톡이나 할까?> 전 편을 통틀어 가장 웃음이 많이 터진, '봉태규 프라다 협찬의 슬픔' 장면이 나왔다. 아마 원래 계획대로 계단에 앉았거나, 의자를 세팅해서 앉았다면 나올 수 없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어떤 결정은 종종 예상하지 못한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본인 피셜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유일한 방송 출연이라는 번역가 황석희 편. 언어를 재료 삼는 두 전문가의 대화가 어느 때보다 흥미로웠던 회차였다. 무엇보다 직접 기타를 연주하며 불러주신 로고송의 가사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만큼 좋았다. (촬영 전까지도 안 치겠다고 빼셔서 일단 내 기타를 준비해 갔다. 조율이 너무 안 돼있다고 한 소리 들었다.)
'황석희'는 당연히 영화와 분리할 수 없는 게스트지만, 동시에 그동안 <톡이나 할까?>에는 영화와 관련된 인물들이 많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니 또 새롭게 '영화'를 테마로 삼을 수 있는 공간이 어디일까 고민이 많이 되었다.
'씨네마포'는 합정에 있는 작은 카페인데, 카페라고 하기엔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작은 관람석도 있고, 영화와 관련된 아기자기한 굿즈와 블루레이, 포스터도 팔고 있는 다채로운 공간이었다.
같은 건물의 2층은 영화수입사 '콘텐츠게이트'의 사무실인데, '씨네마포'도 이 수입사에서 함께 운영하고 있는 공간이다. 팔고 있는 굿즈들도 '콘텐츠게이트'가 수입한 영화들 위주인 것 같다. 황석희 씨가 번역한 유명한 영화 중 하나인 <젠틀맨>도 이곳에서 수입한 영화라, <젠틀맨>의 GV로 이미 와보신 적이 있는 공간이라고.
팔고 있는 굿즈들이 정말 예쁘다. 함께 간 우리 PD들이 홀리듯 구경하고 있길래 하나씩 고르면 사주겠다고 호기를 부렸는데, 촬영이 끝나자마자 다음 촬영지로 정신없이 이동하느라 까먹었다. 괜히 공수표만 날린 인간이 돼버렸다.
아마 발견한 사람은 없겠지만, 황석희 씨의 머리 위쪽에 배치한 블루레이들은 전부 황석희 번역의 영화들이다. 왼쪽부터 <아토믹 블론드>, <나이브스 아웃>, <스포트라이트>,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아토믹 블론드>를 빼고는 모두 나도 본 영화들이고, 동시에 별 다섯 개도 모자란 영화들이기도 하다.
따로 준비해 간 게 아니라 현장에서 눈에 띄는 것들로만 골라서 배치했는데도 한 줄을 전부 황석희 번역의 영화로 채울 수 있었다는 사실은, 새삼 황석희라는 번역가가 얼마나 왕성하게 일을 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셈이다. 물론 전부 탁월한 번역이었다. 왕성하면서도 탁월한.
잘 되면 한 톡 소개❤️ 편
독수리다방 /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 36 독수리빌딩 8층
이나 님의 소녀소녀미가 유독 돋보이는 회차.
'독수리다방'은 유일하게 두 차례 촬영지로 활용한 곳이다. 내 대학생활의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인 만큼 익숙하고 편한 곳이기도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여러모로 활용도가 높은 공간.
먼저는 김영하 편을 찍었던 곳이다. 다만 그때는 카페 내부는 아예 촬영하지 않았고, 오직 테라스 너머로 보이는 풍경만 활용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노을과 야경을 담은 영상미는 지금 다시 봐도 손에 꼽는다.
이번 촬영에는 그때 사용하지 않았던 카페 내부를 찍었다. '독수리다방'은 테라스의 뷰도 훌륭하지만 카페 내부의 인테리어도 굉장히 정갈하면서 기품 있다. 하지만 이번 촬영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분리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분리되어 있지 않은 공간'이었다.
'카톡 소개팅' 편은 그동안 <톡이나 할까?>에 대한 시청자의 반응 중, "나도 김이나처럼 센스 있게 카톡하고 싶다"는 반응을 포착한 기획이었다. 말하자면 대화의 문해력을 컨설팅받고 싶다는 욕구. 일상 속의 대화에서 문해력과 센스가 필요한 순간은 수도 없이 많지만, 모든 기술이 가장 총집합되는 현장은 역시 소개팅이 아닐까 하는 데서 출발했다.
특히 소개팅 전후로 서로를 알아가고 썸을 타는 기간에는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하는 비중만큼이나 카톡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쌓아가는 비중도 무시할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이 <톡이나 할까?>에서 다룰 수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촬영 시간은 몹시 짧고, 실제로 썸을 타는 두 사람의 카톡을 우리가 몇 날 며칠 따라다니며 촬영할 수는 없다. 그럼 짧은 시간 동안 이러한 카톡의 긴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세팅이 무엇일까 고민한 결과가 '따로 있지만 서로의 존재가 은근히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서로를 보려면 볼 수 있고, 존재감도 고스란히 느껴지지만, 어쨌든 서로 다른 공간이긴 해서, 이나 언니가 옆자리에서 코치해주는 작은 소리는 저 쪽에 들리지 않는 그런 공간. 정말 마주 보고 있는데 옆자리에 같이 앉아서 코치해줄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고 서로가 아예 안 보이는 완전히 분리된 공간이면 긴장감이 덜 할 것 같고.
사실 굉장히 까다로운 조건이다. 이런 건 검색해도 안 나온다. 큰 카페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눈으로 확인해 봐야 찾을 수 있는 공간이었을 거다. 심지어 두 공간 다 카메라가 앵글을 잡을 수 있을 만큼의 거리도 나오는 구조여야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게 너무 익숙해서 바로 구조를 떠올릴 수 있는 '독수리다방'에 그런 분리된 공간이 있었다. 편하게 대화를 하는 구역과 조용히 책을 읽는 구역이 분리돼 있는 카페. 그 사이엔 서로를 엿볼 수 있는 유리창이 들어서 있다. 크기도 충분히 커서 앵글을 잡을 수 있는 여지가 다양하게 존재했다.
그러니까 평소에 여기저기 많이 놀러 다녀보는 것도 다 재산이 된다니까.
다만 통유리라고 생각했던 벽이 사실 윗부분은 유리가 없는 블라인드였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고, 그래서 예상했던 것보다 서로의 소리가 좀 더 잘 들렸다는 점이 변수였다. 그 점이 또 다른 재미나 긴장감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비슷한 컨셉의 촬영을 다시 하게 된다면 공간의 조건을 바꿔볼까 하는 고민도 든다. 생각보다 사소한 세팅 하나가 현장에서 많은 영향을 끼친다.
태민 편
실낙원 /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428 내제 2층
입대를 앞둔 태민 씨의 막바지 스케줄로서, 제작진들 사이에서 촬영 컨셉에 대한 두 가지 의견이 있었다.
하나는 솔로 태민 특유의 관능적이고 몽환적인 느낌을 잘 살려줄 수 있는 감각적인 공간에서 찍자.
두 번째는 아끼는 동생 군대 갈 때 고기 먹여 보내는 마음으로 고기 좋아하는 태민을 양껏 먹일 수 있는 고깃집으로 가자.
전자는 그동안 <톡이나 할까?>에서 많이 해왔던 작업이기도 하고 태민 씨를 보는 풍경으로서도 익숙했을 텐데, 후자는 많이 못 본 그림인 거 같아서 후자에 좀 끌렸다.
그래서 작정하고 고깃집들을 알아보러 다녔는데, 이렇다 할 마음에 드는 장소를 찾지 못하던 와중에 첫 번째 컨셉의 후보지였던 '실낙원'도 들러보았다.
그랬는데 이토록 태민과 어울리는 공간이 있을 줄이야. 심지어 여기서 고기도 판다. 그것도 아주 고급지고 탐스러운 스테이크로. 그래서 감각적인 공간도 보여주고 고기도 대접할 겸 정했다.
'실낙원'은 굉장히 넓은 공간의 수제 맥주집인데, 촬영에 사용한 활용한 스팟이 가장 안정적인 앵글을 제공하긴 했지만 거기 말고도 곳곳에 매력적인 요소들이 많았다. 풀샷에 보이는 배경 너머에는 작은 연못처럼 꾸며진 곳도 있었는데, 인서트로 활용하긴 했지만 이런 다채로움을 다 담지 못해 아쉬웠다.
태민 씨는 솔로곡의 뮤직비디오를 볼 때마다 가히 압도적인, 대체 불가능한 아우라를 가진 아티스트라는 생각을 늘 했다. 특유의 그 신비롭고 몽환적인 느낌을 최대한 살리고 싶었다. 원래 <톡이나 할까?>는 화면의 톤을 잡을 때 너무 인위적인 느낌이 나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인데, 태민 편은 색감이나 글로우 필터 등을 평소보다 훨씬 과감하게 잡아 차라리 한 편의 뮤직비디오처럼 느껴졌으면 하고 만들었다.
붙임 머리가 조명을 가려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우는 걸 미처 예상하지 못해 미모를 온전히 다 담지 못한 게 한이라면 한이다.
오연서 편
랑데자뷰 대학로 / 서울 종로구 창경궁로34길 18-5
오연서 편은 촬영지 '랑데자뷰'는 오직 풀샷 각도에서 보이는 마법 같은 앵글 하나만 보고 선택했다. 어차피 이런 절세가인들의 바스트 샷에는 특별한 미장센이 필요 없으니까.
오연서 씨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이 구역의 미친X>에서 그는 "자신이 만든 감옥 속에서 망상과 강박에 시달리는" 인물로 등장한다. '망상과 강박'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공간을 활용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랑데자뷰' 대학로점 지하의 이 독특한 인테리어는, 파사드 바깥쪽과 안쪽 공간이 보여주는 인테리어의 대비가 특정 각도에서 아주 기묘한 느낌을 받게 만들었다. 둥근 통로 너머로 보이는 두 사람의 풀샷은 마치 유명한...아니 투명한 유리구슬 안에 들어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차원 안에 갇혀있는 것 같아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오연서 씨가 극 중 배역의 병적인 자기 방어나 도피처로서의 만화를 언급할 때, 이 그림이 그 느낌을 전달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했다.
가끔은 이 회차에서 오연서 씨가 하는 것 같은 막연한 말들이 반가울 때가 있다. 그냥 다 안 싸웠으면 좋겠고. 그냥 다 행복했으면 좋겠고. 결국 현실 속에서 '다 행복'하려면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하는 순간들이 있지만, 때로 그렇게 싸우다 보면 '다 행복'하려고 시작했다는 걸 까먹게 될 때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