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성민 Jun 01. 2021

필라테스를 하며 배운 것들.

1년 쯤 전에 '남자가 필라테스를 할 때' 라는 글을 썼다. 남자들은 잘 안 하는 운동이라서 겪게 되는 다소 우스운 상황들을 그냥 농담 삼아 적어두고 싶었다. 그랬는데 그게 이 계정의 글을 통틀어 가장 높은 조회수의 글이 됐다. 지금도 '남자 필라테스' '필라테스 남자'로 검색해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하루에도 여럿 꼬박꼬박 있다.

이렇게 되고 나니 내가 성실하게 하고 있는 운동에 대해 너무 우스운 이야기만 적어놓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필라테스 남자'로 검색해서 들어온 사람들은 '남자도 필라테스를 해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검색해본 것일 텐데, 저 글은 되레 원래 갖고 있던 편견만 더한 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좀 미안한 마음이 들어, 책에 실었던 한 꼭지를 여기에 옮긴다. 필라테스라는 운동을 꾸준히 하며 깨달은 것들.

 




내몸관심총량의 법칙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하며 노동운동에도 헌신적인 친구와 만났다. 이런저런 근황을 나누던 중에 친구가 너무나도 결연한 말을 던진다.


“대학원생들도 요즘 다 운동 안하면 죽는 거다, 그런 얘기해.”


아아, 어느 386이 ‘요즘 젊은이들의 개인주의’를 탓했던가. 오늘날 상아탑은 이렇게나 피가 끓는다. ‘운동이 아니면 죽음’이라니, 이토록 서슬 퍼런 각오가 어디 있단 말인가. 문학을 하는 이가 사회운동에 투신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따지는 해묵은 논쟁은 차치하고라도, 목숨을 운운하는 젊은 신념이 이렇게나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건 인상적인 일이다. 캠퍼스 학생운동의 시대는 사실상 종언을 고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명맥이 아직도 굵직했구나. 적잖이 신기해하는 내 반응에 친구는 호통을 치며 나의 편견을 혼낸다.


“아니, 엑서사이즈, 엑서사이즈! 무브먼트 말고 이 사람아! 이제 몸이 운동 안하면 죽을 것 같다고!”


혼난 편견은 학생운동 정신에 대한 게 아니었다. 운동이란 단어에서 엑서사이즈보다 무브먼트를 먼저 떠올리다니. 이건 다 그 친구가 무브먼트에 열심인 사람이라서다. 내 탓이 아니다. 나는 아주 온건한 소시민인걸.


온건한 소시민으로서 ‘무브먼트 아니면 죽음’이란 구호에는 조금 놀랐지만 ‘엑서사이즈 아니면 죽음’에는 깊이 공감한다. 나는 원래 체력이 좋은 편이었다.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 주변에서도 놀라워했다. 이틀 밤 정도는 거뜬히 새고, 그 다음 날까지 어찌어찌 버텨냈다.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체력이다. 몸은 하나인데 할 일은 많으니 선택권이 없었다. 소화가 잘 안 돼 속은 늘 쓰리고 편두통은 기본에 관절과 근육이 구석구석 뻐근하다는 사소한 부작용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그게 되긴 됐다.


이제 안 된다. 할 일이 많으면 밤새서 해야지 하던 버릇은 이제 안 통한다. 점점 밤을 꼴딱 새는 게 불가능해지고, 한 새벽 어딘가에서 졸기 시작한다. 어쩌다 겨우 새는데 성공하면 다음 날 하루는 초죽음이 되어 하루를 망친다. 대학 때만 해도 신나게 뛰어다녔던 농구코트는 한두 번만 왕복해도 심장을 토해낼 것처럼 숨이 벅차다. 잔병치레는 늘고 몸은 점점 무거워진다. 이쯤 되면 저 말이 생각난다. 아, 운동 안하면 진짜 죽겠구나.

 


일상에 운동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건 정말 쉽지 않다.

안하면 죽겠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라면 이미 몸은 축날 만큼 축났다는 말이다. 어차피 넉넉히 쉬어가며 지내는 사람에게는 좀처럼 들 일이 없는 생각이다. 쉴 시간이 부족하고, 그래서 어쩌다 시간이 생기면 침대에 절여져 있는 사람들에게 떠오를 일이 훨씬 많다.

그러니까 문제는, 그런 사람들은 정말로 시간이 생기면 침대에 절여져 꾸역꾸역 잔다는 거다. 운동을 언제 해, 잘 시간도 모자라 죽겠는데. 짬짬이 난 시간을 긁어모아 침대에 다 쑤셔 넣어도 잠은 모자라다. 으악, 이렇게 피곤한데 운동까지 하자니 죽을 것만 같아. 너무 피곤해서 운동을 해야겠는데 너무 피곤해서 운동을 할 수가 없다. 운동을 안 하면 죽을 거 같은데 운동을 하면 죽을 거 같다.


근데 정말 그렇다. 침대에 눕고만 싶은 마음과 싸워가며 시간을 쥐어짜내 겨우 안하던 운동을 하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정말 죽을 거 같다. 그동안 방치해온 시간을 따라잡고 싶은 마음에 풀리지도 않은 몸으로 무리도 해본다. 그럼 이제 근육도 놀라고 폐도 놀란다. 으아아아 주인 놈이 드디어 미쳤어. 이어지는 온몸의 격한 항의. 그래서 모처럼 운동하고 난 뒤의 며칠은 안했을 때보다 더 괴롭다. 뭐야 운동하면 몸도 개운하고 삶의 질도 나아진다며. 안할 때보다 더 쑤시는데. 어디 갔어, 원래도 없던 내 삶의 질.


잘 맞는 운동을 찾는 게 중요하다. 내가 처음으로 돈을 내고 해본 운동은 크로스핏이었다. 정확히는 내 돈은 아니었고, 내 해직투쟁 때 그 사실이 안타까웠던 한 선배가 자기 돈으로 먼저 등록부터 해놓고 나에게 알려준 거였다. 시간 생긴 김에 운동이라도 하렴. 그 선배도 ‘운동 안 하면 죽겠다’는 걸 느꼈던 사람이고, 그 느낌에서 끝내지 않고 크로스핏으로 탄탄한 몸을 얻어낸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운동을 권하는 그의 태도에서 강력한 확신의 힘이 느껴졌다. 문제는 사람마다 잘 맞는 운동이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지만, 크로스핏은 운동부족보다 먼저 나에게 죽음을 안겨줄 것만 같았다. 아 운동하다 토 나온다는 게 이런 거구나. 선배의 호의를 생각해 꾸준히 나가려 노력했건만 매주 다가오는 크로스핏 시간은 공포 그 자체였다. 운동에 대한 친밀감이 1 하락하였습니다.


두 번째로 돈을 주고 한 운동은 헬스장의 PT였다. 크로스핏보다는 덜 고통스러워 보였고, 다양한 시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점도 좋아 보여 집에서 가까운 곳에 등록을 했다. 나에게 배정된 트레이너에게 “저는 막 근육을 키우고 싶은 생각은 없고 그냥 건강하게…”까지 얘기했을 때 내 말을 자르고 들려온 대답은 “회원님! 남자는 무조건 사이즈입니다! 다 필요 없어요! 사이즈!”였다. 확실히 팔짱도 낄 수 없을 것 같은 사이즈의 이두삼두를 가진 그 트레이너는, 내가 다른 사람들이 하는 재미있어 보이는 동작에 관심을 가질 때마다 “회원님! 저런 운동은 그냥 쓰레기입니다, 쓰레기! 저런 건 막 뚱뚱한 여자들이 운동하기 싫어할 때 재미나 붙이라고 시키는 거예요. 남자는 무조건 웨이트입니다! 사이즈!”라고 대답했다. 이 놀라운 신념.


하루는 옷을 갈아입고 집에 가는 길에 직원들끼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중에서도 예의 그 트레이너의 목소리가 제일 컸다. “솔직히 운동하는 사람 입장에서 엄마 밥은 쓰레기야! 나트륨 높지, 탄수화물 높지, 엄마 밥 쓰레기!” 모든 트레이너가 그런 건 절대 아니겠지만, 어쨌든 난 ‘사이즈’와 ‘쓰레기’를 신봉하는 그 분 덕분에 헬스 PT에도 애정을 붙이지 못했다. 운동에 대한 친밀감이 2 하락하였습니다.


그러다 필라테스를 만났다. 요가에 조예가 깊은 연인 덕분에 함께 요가 수업을 몇 차례 간 적이 있는데, 다른 운동에는 영 재미를 못 붙이면서 요가는 그럭저럭 재미있게 하는 나를 보고 연인은 필라테스를 추천했다. 나에게 필요한 운동이라면서. 과연 연인의 눈이 정확하다. 필라테스는 재미있었다. 요가처럼 느슨하게 쉬어가며 하는 운동인 줄 알았더니 웬걸, 강도 높은 근육 운동이었다. 하지만 크로스핏처럼 토 나오게 힘든 것도 아니고, 헬스 PT처럼 재미없는 ‘사이즈 벌크 업’의 반복도 아니었다. 몸의 자잘한 근육 하나하나에 세심하게 집중하며 늘렸다 당겼다 하는 과정을 샅샅이 느낀다. 나에겐 이게 중요했던 거다. 마냥 몸을 괴롭히고 정신력으로 승부하는 게 아니라, 동작 하나를 해도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세밀하게 움직이는 운동. 역시, 비싼 값을 한다.


내 몸을 세심하게 느껴야하는 이 운동을 1년 가까이 하면서, 내 몸에 대해 두 가지를 깨달았다. 첫째는 어깨다. 나도 모르게 어깨에 쓸데없는 힘을 너무 많이 준다. 다리에 힘을 줘야할 때도 어깨에 힘 빡, 배에 힘을 줘야할 때도 어깨에 힘 빡. 이쯤 되면 어깨에 자유의지가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운동하면서 강사에게 제일 많이 듣는 말이 “회원님, 어깨 힘 빼시고!”다. 선생님 어깨한테 직접 얘기 좀 해주세요. 그래도 자꾸 듣다보니 이제 뭘 할 때마다 어깨에 힘부터 빼는 습관이 들었다. 운동복을 벗고 책상에 앉아있을 때도 말이다.

두 번째는 숨이다. 평소보다 강한 힘을 줘야 할 때면 헙, 하고 숨을 참는다. 근육이 아플 때도 끄으으윽, 숨을 안 쉬고 있다. 그러면 또 “회원님, 숨 쉬세요, 숨!”하고 타이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영화의 출산 장면에서 많이 들었던 것 같은데. 덕분에 숨을 길게 내쉬면서도 힘을 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아, 세 번째로 많이 듣는 말은 “회원님, 배꼽 더 집어넣으세요, 배꼽, 스쿱!”이다. 필라테스가 너무 힘들었던 어떤 네티즌이 이런 말을 했는데 내 마음과 꼭 같다. 선생님 그거 배 다 넣은 거예요. 나와 보이는 건 뱃살이에요. 선생님은 이런 배 가져보신 적 없으시죠.)


힘이 들어간 어깨, 습관처럼 멈추는 숨. 둘 다 필라테스를 하기 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다. 힘이 필요할 때 나는 숨이 멎은 채 어깨에만 힘이 잔뜩 들어가 있구나. 내 몸 구석구석을 느끼며 집중하는 운동을 하며 알게 되었다. 힘을 써야할 때는 오히려 어깨에 힘을 빼고, 심호흡을 크게 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힘이 필요한 곳에 정확히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비단 필라테스를 할 때가 아니어도.


필라테스를 하기 전에 이토록 내 몸에 집중해본 적이 있었는지 생각해보니, 있긴 있다. 아플 때다. 혼자 사는 사람은 평소 자기 몸에 아무리 무심하더라도 컨디션이 이상한 느낌이 들면 몸이 보내는 신호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돌봐줄 사람이 없으니까. 아파서 드러누웠다고 약이랑 죽을 사다줄 사람도 없고, 다 먹은 죽 그릇을 대신 설거지해줄 사람도 없으며, 땀에 젖은 옷을 대신 빨아줄 사람도, 비좁은데 흐트러지기까지 한 집을 정리해줄 사람도 없다. 그 와중에 출근은 해야 하니 스스로 잘 챙기지 못하면 눈 깜짝할 새에 몸도 집구석도 엉망이 된다. 그러니 몸살은 커지기 전에 싹을 잘라버려야 된다. 몸을 예민하게 느껴야한다.


혼자 지낸 시간이 쌓인 만큼 몸살 기운이 느껴질 때 취하는 행동은 거의 매뉴얼이 되었다. 어라, 으슬으슬한 것이 그냥 피곤한 게 아닌 것 같다 싶으면 일단 취소할 수 있는 일정은 모조리 취소하고 곧장 집으로 향한다. 향하는 길에 식당에 들러 뜨끈한 음식을 한 그릇 먹고, 약국에서 해열제와 항생제를 사온다. 집에 오자마자 씻고 약을 삼킨 뒤 옷을 잔뜩 껴입은 채 두꺼운 이불 속에 들어가 눕는다.

답답할 만큼 더운 잠자리를 버티며 의식을 잃듯 잠들면 미열에 머무르던 열 기운이 훅 올라와 자는 동안 몸이 펄펄 끓는다. 정신을 차려보면 이불 속에 껴입었던 옷은 땀으로 푹 젖었고 그 땀과 함께 열도 식었다. 다음 날 세탁기를 돌려놓고 조금 일찍 출근해 링거를 맞고 나면 멀쩡하게 다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겐 몸살이 올 때 거의 예외 없이 먹히는 방법이다. 혼자 살면 아플 때 제일 서럽다고들 하는데, 너무 익숙한 대처법이 있어서 딱히 서럽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기계처럼 딱딱, 절차를 따르는데 집중한다. 오히려 옆에서 걱정하는 사람이 없어서 더 효율적이다. 정말로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의 중병이라면 도움이 절실하고 고맙겠지만, 하룻밤 끙끙 앓으면 끝나는 몸살은 옆에서 누가 걱정해주면 내 마음만 더 안 좋다. 사실 해줄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다. 내 몸에는 결국 내가 신경을 쓰는 게 제일 중요하다.


재미있는 것은, 필라테스를 시작한 1년 여 동안 저 회복 절차를 밟을 일이 없었다는 거다. 그 전에는 1년에 한 번은 연례행사처럼 꼬박꼬박 앓았는데. 몸에 관심을 주지 않고 바쁘게 살 때 몸이 못 받은 관심을 한꺼번에 청구라도 했던 걸까. 몸 구석구석 집중하는 운동을 꾸준히 하니 1년에 한 번 엄청난 관심을 몰아서 요구하는 몸살은 필요 없어진 모양이다. 어떤 식으로든 몸은 자기가 받아야하는 관심을 다 받아내고야 만다. 평소에 골고루 주느냐, 아니면 한 번에 몰아서 주느냐가 다를 뿐.



이건 필라테스를 1년 조금 넘게 했을 때 썼던 글이고, 3년 째 되어가는 요즘에는 또 다른 것을 느끼고 있다. 특별한 진척이 없어 보여도 생각 없이 꾸준히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


이 이야기를 <폴인 fol:in>에 기고했더니 인상적으로 읽은 분들이 많았던 것 같다. 여기에 소개하기엔 유료서비에 투고한 글이니 링크만 남긴다.

https://www.folin.co/story/1712?fbclid=IwAR2nefbhc4HCLVzj63XcR0vAyZj7wJ13vtPksXqnfHfBm6xpAQvP0IwYyKo


어쨌든, 남자도 필라테스를 아주 잘 하고 득도 보고 있으니 궁금해서 검색해보는 이들이 편안하게 시작하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