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젊음의 배경음악 28.
I.
직장에서 그룹 홍보실장으로 일할 때이다. 점심식사를 하고 돌아오니, 사무실 책상에 전화 메모가 놓여있었다. ‘부장님, 서울중앙지검 000 부부장 검사가 전화해 달랍니다. 전화번호는 123-4567입니다.’
순간적으로 피가 얼어붙는듯한 긴장감이 들었다. 곧 부서의 주요 직원들을 모아 회의를 했다. 도대체, 서울중앙지검 부부장 검사가 왜 나에게 전화를 하라고 했을까? 나는 물론이고, 직원들도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애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전화를 했다. 통화를 한 상대방은 아주 예의 바르고 친절했으며 내게 아주 가벼운 업무적인 부탁을 했다. 내가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었으며, 문제가 될만한 내용은 더욱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통화가 될 때까지 내가 느꼈던 긴장감은 보통 큰 것이 아니었다.
검사라는 직업은 그렇게 상대방을 긴장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아주 친한 친구 중에 검사가 두 명 있었고, 특히 절친인 B가 서울중앙지검에 근무한 적이 있었기에 별로 의식하지 못했으나, 오랜 시간 후에 막상 그곳에 근무하는 검사가 전화해 달라는 메모를 남기자 그 놀라움은 대단한 것이었다.
두 명의 검사 친구 중 하나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야, 검찰에서 아직도 고문 같은 거 하냐?” “뭐어? 얘가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네?” “근데, 고문도 안 하는데, 왜 사람들이 검찰에 가면 다 술술 불고 나오냐?” “그게 바로, 수사기법이라는 거야.”
순수한 호기심 차원에서 그 수사기법이라는 게 궁금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알기 위해 검찰청이나 경찰서에 가보고 싶진 않다. 내가 뭐 법 없이 살 정도로 착한 사람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검찰이나 경찰에 불려 가서 조사나 취조를 받은 일은 없었다. 사실 나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난 판사나 검사와 같은 사람들의 세계를 잘 모른다. 주변에 변호사는 많으나 그들의 세계 역시 모르긴 마찬가지다. 나 같은 장삼이사에게는 법으로 사는 사람들의 세계는 너무나 먼 나라 이야기 같다.
II.
영화 넘버 3(쓰리).
1997년도에 개봉한 블랙코미디이다. 한석규가 조폭 역할의 주연을 맡았으며, 최민식이 거친 검사 역할로 나온다. 당시만 해도 무명이었던 송강호가 독자적으로 부하 3명을 거느린 폭력 해결사로 나와 일약 스타로 부상했다. “현정화가 라면만 먹으며 금메달을 세 개나 땄어.”라고 하자 부하가 “임춘애입니다.” 했다가 엄청 얻어맞았고, “내가 현정화라고 하면 현정화야. 다른 말을 하면 배 배 배 배신이야, 배신.”이런 코믹한 대사를 크게 유행시키기도 했다.
크게 히트한 영화고 술집 아가씨에서 한석규의 부인이 되는 시인 지망생 이미연까지 개성 강한 연기자들도 많았지만, 당시 내게는 최민식의 검사 역할이 눈에 띄었다. 물론 영화라 과장되었기는 하겠지만, 입에 쌍욕을 달고 살며 조폭 넘버 3인 한석규와 개싸움에 가까운 난투극을 펼치는 것까지, 검사란 저래야 할 필요도 있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 이유는 당시 내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인 B가 검사로 임용되어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B는 고교시절부터 밝고 착하고 대인관계 좋은 친구였다. 고3 때는 내 짝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과 동창들이 그를 좋아했고, 누구 하고도 척을 지는 적 없이 늘 유쾌하고 친절했다. 그러던 B가 엄혹하던 80년, 과외를 같이 받았던 타 고등학교 학생회장과 우리 학교 학생회장을 소개해서 만나게 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끌려갈 뻔한 일은 우리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물론 며칠 피해있다가 큰 문제없이 돌아오기는 했지만, 본인이 가장 놀랐을 것이고,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명문 연세대 법대에 진학한 B는 대학에서도 늘 사교적이고 매력 만점인 인기남이었다. 우리 서클에서 회장도 맡았었고 선배들과의 술자리에도 거의 빠진 적이 없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거의 모든 모임의 연락을 하고 주선을 하는 것이 그였으며, 친구, 선후배들을 챙기는 것도 주로 그의 몫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이었던 것은 법대생이면 거의 모두가 고시공부를 하던 시절이었는데, B도 사법시험을 볼 거라고 말하긴 했지만 도대체 어쩌려고 저러나 싶었다.
다른 친구 L과 K가 대학 3학년 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B는 연이어 낙방을 거듭했다. 내가 군에서 복무할 때 B는 대학원에 진학해서 계속 고시에 응시했는데, 이제 떨어지면 군대에 가야 하는 마지막 기회에 극적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엄청나게 기쁜 소식이고 축하할 일이었지만, 그의 숨은 노력까지 세세히 알 수 없었던 주변의 지인들은 B의 합격 소식에 많이들 놀랐다. 그렇게 사람 좋아하고, 모임 좋아하는 사람도 사법시험에 합격할 수가 있구나, 뭐 이런 반응이었다고 한다.
III.
B는 사법연수원에서, 자신의 고시 합격 기수의 수석 합격자인 미모의 여성을 만나 사랑을 키우고 나중에 결혼에까지 골인했다. 연수원 수료 후 본인은 검사로, 부인은 판사로 임용되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판, 검사 부부가 된 것이다.
내가 대리로 근무하던 시절, B는 멀리 떨어진 지방 K시의 지방검찰청에서 검사로 복무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 회사에서 여러 지방에 동시에 출장들을 갈 일이 있었는데, 나는 남들이 별로 지원하지 않는 K시를 지원해 가게 되었다. 내가 K시를 지원한 이유는 순전히 B가 거기 있기 때문이었다.
출장 업무를 마치고 B가 근무하는 검찰청으로 찾아가 그의 사무실에서 반갑게 해우했다. 어찌 됐던 태어나서 처음으로 검사의 방을 가보았고, 당시만 해도 지방에서는 검사가 영감님이라고 불리던 시절이라 그런지 B의 모습도 의젓해 보였다.
B는 내게 그날 오전 골프를 치면서 독수리를 잡았기 때문에 자기 상사인 부장검사 등 같이 라운딩 한 사람들과 저녁을 해야 하지만, 내가 온다고 해서 다른 날로 미뤘다고 생색을 냈다. 그때 나는 골프를 치지 않은 것은 물론, 룰도 잘 몰랐기에 이글을 했다는 뜻으로 B가 한 얘기에 “너 사냥도 하냐?”라고 되물어 B가 배꼽을 잡았다.
B는 자신의 승용차에 나를 태우고, 밤이 찾아오기 시작하는 K시를 드라이브시켜주었다. 그는 “한 달쯤 전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정말 환상적이었다.”라고 했지만 친구와 함께 하는 K시의 저녁 무렵은 벚꽃이 없어도 충분히 환상적이었다.
드라이브를 하고 그 도시에서 제일 좋은 호텔에 도착하자, 난 B가 정말 영감님이자 VIP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호텔의 높은 사람으로 보이는 분이 나와서 B를 영접했고, B와 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호텔 사우나에서 목욕을 하고 중식당으로 이동했다. 식당에서도 종업원들이 거의 도열을 하다시피 영접했고 최고급 음식을 지나치게 친절하게 서빙해 주었다.
식사 후 우리는 오랜만에 노래나 같이 부르자고 노래방을 갔다. B는 ‘향수’를 부르자며, 자기가 이동원 부분을 부를 테니, 나보고 박인수 부분을 부르라고 했다. 내가 향수라는 노래 모른다고 했더니, 대뜸 “너 요새 공부 안 하는구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곤 자기가 두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그 노래를 멋지게 불렀다. 그 이후에도 스티비 원더의 노래를 김건모가 멋지게 리메이크한 ‘I just call to say I love you’를 비롯해 여러 최신 노래를 가사까지 외워서 불러 젖혔다.
10년도 더 전의 옛 노래밖에 아는 게 없었던 나는 여러 가지로 착잡했다. 취직해 정신없이 영혼을 갈아 넣으며 바쁘게 일하는 동안 B가 아는 노래들을 난 하나도 모르게 되었구나.. 전엔 내가 B보다 노래도 많이 알고 더 잘했던 것 같은데, 이젠 B가 나보다 훨씬 많은 노래를 알고, 심지어는 더 잘 부르는구나.. 뭐 이런 유치한 생각부터 B는 이제 정말 영감님이, 대한민국의 상류층이 되었구나.. 나 같은 서민 하고는 노는 물도 다르고, 완전히 다른 계층의 사람이 되었구나..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 이곳을 누르면 해당곡이 재생됩니다. 유튜브 링크입니다.)
Stevie Wonder 작사, 작곡, 노래
번안곡 리메이크 노래 : 김건모
No New Year's Day to celebrate No chocolate covered candy hearts to give away
축제 기분을 낼 새해가 온 것도 아니고 나누어 줄 사탕 덮인 발렌타인 쵸콜렛도 없어요..
No first of spring No song to sing In fact here's just another ordinary day
새로운 봄도 아니고, 부를만한 노래도 없고 사실은 그저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일뿐이에요.
No April rain No flower bloom No wedding Saturday within the month of June
4월에 내리는 비도, 꽃도 피어나지 않아요. 6월에 들어 있는 토요일엔 결혼식도 없네요.
But what it is, is something true Made up of these three words That I must say to you
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말하고자 하는 이 세 마디로 이루어진 말은 진실이에요.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I just called to say how much I care
난 그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전화했어요. 내가 얼마나 당신을 아끼는지 말하려고 전화했어요..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And I mean it from the bottom of my heart
난 그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전화했어요. 이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진심이에요.
No summer's high No warm July No harvest moon to light one tender August night
여름이 무르익은 것도 아니고 따사로운 7월도 아니에요. 부드러운 8월의 밤을 비추어 줄 보름달도 없네요.
No autumn breeze No falling leaves Not even time for birds to fly to southern skies
가을 산들바람도 떨어지는 낙엽도 없어요. 심지어는 새들이 남쪽 하늘로 날아갈 때도 아니에요.
No Libra sun No Halloween No giving thanks to all the Christmas joy you bring
천칭자리가 있는 것도 즐거운 핼러윈도 없네요. 당신이 가져다준 크리스마스의 모든 기쁨에도 감사할 수 없네요.
But what it is though old so new To fill your heart like no three words could ever do
구식이지만 신선한 말 어느 것도 이 세 마디 말처럼 당신의 마음을 채워줄 수는 없어요.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I just called to say how much I care
구식이지만 신선한 말, 어느 것도 이 세 마디 말처럼 당신의 마음을 채워줄 수는 없어요.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And I mean it from the bottom of my heart
난 그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전화했어요. 이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진심이에요.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I just called to say how much I care
구식이지만 신선한 말, 어느 것도 이 세 마디 말처럼 당신의 마음을 채워줄 수는 없어요.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And I mean it from the bottom of my heart
난 그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전화했어요. 이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진심이에요.
of my heart of my heart baby you're my heart
내 마음 깊은 곳,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그대는 내 마음이에요.
IV.
B는 그 이후 그 이름도 대단한 서울중앙지검을 거쳐 대검찰청으로 전근되어 컴퓨터 수사과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그 당시는 속칭 오양의 비디오 사건과 닷컴 버블을 거치면서 전국에 PC방이 생겨나 컴퓨터 범죄가 신종 범죄로 확산되고 있던 시기였다. 그때 컴퓨터 수사과장은 말 그대로 중책이었을 듯하다.
내가 회사에서 사내방송을 담당하던 90년대 중반, B는 내게 특이한 부탁을 하나 해왔다. 검찰 내에서 ‘친절운동’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처음 그 얘길 들은 나는 좀 어이가 없었다. 검찰과 친절이라는 두 단어가 영 match되질 않았다. 검찰이라고 하면 죄지은 사람을 잡아다가 그 죄를 밝히는 곳, 좋게 말하면 사회정의 구현을 위한 곳이지만 단순한 이미지로만 보면 무시무시한 곳이기 때문이다. 굳이 조선시대의 의금부 같은 곳이라는 사족을 달 필요도 없다. 그런 곳에서 친절운동을 한다고?
B는 자신이 직접 쓴 30여 편의 친절 운동 원고를 우리 사내방송에서 여자 아나운서가 낭독하며 음악과 함께 녹음해 달라고 부탁했다. 원고를 읽어보던 나는 그 친절운동이 단순한 친절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피의자의 인권도 생각하고 검찰의 이미지 자체를 개선하기 위한 문화운동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곤, 어울리는 음악을 선곡해 멋진 여자 아나운서의 음성으로 녹음해 주었다.
그 친절운동 방송은 한동안 계속되었고, 검찰 조직은 물론 검찰청을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꽤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그런 운동을 지금까지 계속했다면, 검찰의 이미지도 지금과는 사뭇 달라지지 않았을까?
여하튼 나는 나와 다른 세상으로 멀리 간 것만 같았던 B가 알고 보니 늘 내가 알던 그의 감성과 성품 그대로 내 곁에 있었음을 느끼게 되었다. 검사라는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는 직업을 가졌지만, 그 안에는 어려가지 업무의 분야가 있을 것이고 검사들의 성격이나 성향도 가지각색일 것이다. 내가 알던 선하고 온유한, 사람 좋아하고 정 많은 B는 역시, 검찰 내에서도 본인의 정체성을 지키며 동시에 인정받고 첨단을 달리던 검사였던 것이다.
B는 그 이후 모교인 연세대 법대 교수로 10여 년을 봉직한 후 퇴직하고, 지금은 일에 욕심내지 않는 변호사로서 다소 여유 있게 자신의 생활을 즐기고 있고, 한 달에 한 번 이상 나를 비롯한 친구들과 만나 산책과 식사와 담소를 나눈다. 한편, B의 부인은 판사로서 최고위직까지 역임한 후, 바쁘고 인정받는 변호사로 지내고 있다.
향수 (鄕愁)�이동원 & 박인수, 자막수록 (HD With Lyrics) ����� (← 이곳을 누르면 해당곡이 재생됩니다. 유튜브 링크입니다.)
향수
정지용 시, 김희갑 작곡, 박인수 이동원 노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 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 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