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랑을 믿지 않기로 했다. 정확히 말하면 사랑을 포기했다. 이는 냉소주의적 허영이 아니라 현실주의자의 고백이다. 사랑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이 실현 가능한 형태로 우리 곁에 남아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사랑이 실현될 수 없는 이유가 문명이 쌓아 올린 온갖 시스템과 가치가 사랑의 본질을 훼손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무한한 선택지와 소비 가능성을 가진 채 연애와 관계를 선택하며 살아간다. 데이팅 앱을 통해 인간은 상품이 되고 프로필은 마케팅이 되며 만남은 거래가 된다. 우리는 더 나은 상대를 찾아 끊임없이 스와이프하며 현재의 관계에 만족하지 못한다.
현대인들은 사랑을 통해 더 높은 존재가 되려 하지 않고 더 많은 선택권을 확보하려 한다. 사랑의 배타성과 영원성은 비효율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시장 경제의 논리가 사랑의 영역까지 침투하면서 사랑은 투자가 되고 연인은 수익률을 따져봐야 할 포트폴리오가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논리는 내게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 논리가 성립되려면 현대 이전의 사회에서는 사랑이 실현되었어야 하고 사랑의 본질을 훼손하는 현대 문명의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가치를 재구성했을 때 온 인류가 사랑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나는 사랑의 실현을 성찰하는 이 지점에서 첫 번째 논리적 모순을 마주했다. 사랑의 실현을 성찰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실현된 상태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고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는 사랑이 실현된 상태가 관찰되어야 하며 사랑이 실현된 상태를 관찰하기 위해서는 사랑 그 자체에 대한 정의가 필요한데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는 사랑이 실현되는 상태에 대한 정의가 필요한 순환논증에 빠져버린 것이다. 이 불쾌한 순환논증에서 벗어나는 순간 사랑은 이미 내가 말하려던 그 사랑이 아니다.
두 번째 모순은 더욱 심각하다. 나는 사랑을 분명히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사건으로 전제하였고 따라서 사랑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였다. 하지만 진정 사랑에 무관심한 사람은 사랑에 대해 어떠한 선언도 하지 않는다. 사랑을 포기한다는 선언으로 인해 이미 사랑의 의미를 다시 호출하게 되며 이는 사랑에 대한 강한 애착의 증거가 되는 셈이다.
이 모든 모순의 근본적 이유는 사랑이 가진 속성 때문이다. 사랑을 정의할 수는 없지만 모순들에 대해 생각해 봄으로써 몇 가지 속성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은 신비성과 우연성이다.
신비성이 사랑의 핵심인 이유는 명확하다. 사랑받는 이유를 완전히 설명할 수 있다면 그 순간 사랑은 그 이유들의 합으로 환원되어 버리고 손쉽게 정의 내릴 수 있는 상태가 된다. 당신의 유머 감각 때문에, 당신의 지성 때문에 혹은 당신의 외모 때문에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거래다. 왜 사랑하는지 모르겠다는 무력감에서 이 신비성이 작용하고 그로 인해 사랑의 완전한 설명이나 정의가 불가능해지며 따라서 우리는 끝없는 순환 속에 갇히게 된다.
우연성 또한 사랑의 필수조건이다. 감정은 계획적으로 발생할 수 없다. 사랑은 예기치 않은 순간 속에서 한순간의 매혹으로 피어난다. 만약 사랑이 필연적이라면 우리는 사랑의 대상을 미리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닌 선택의 문제가 될 것이다. 이 우연성으로 인해 사랑은 사랑을 포기한다는 의지적 선언을 거부한다.
사랑 앞에서 인간의 이성은 무능하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끌림, 합리적으로 판단했을 때 맞지 않는 선택, 미래에 대한 확신 없이도 뛰어드는 모험. 이 모든 것이 사랑의 영역이다. 사랑은 인간이 스스로를 초월하려는 순간 혹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기 이해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욕망 속에서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일상이 아니라 예외다. 반복되는 상태가 아니라 기적적인 단일 사건이다.
그렇다면 주위에서 사랑하고 있다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그들은 모두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이고 나는 운 좋게 그들을 목격한 것일까. 내 대답은 다소 냉정하다. 나는 그들이 사랑 그 자체보다는 아주 높은 확률로 외부적 요인에 의존하고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절박함, 육체적 쾌락에 대한 욕구, 타인에게 자신의 매력을 과시하려는 허영심, 경제적 안정을 위한 의존 관계, 자녀를 갖고 기르려는 생물학적 충동, 상대방의 사회적 지위나 외모와 같은 조건적 요소, 소셜 미디어에서의 과시적 인정 욕구, 브랜드화된 관계에 대한 동경, 로맨틱한 서사에 대한 문화적 강박, 결혼이라는 제도가 주는 사회적 안정감, 노년에 대한 불안, 자아실현의 도구로서의 연인, 트라우마나 결핍을 메우려는 심리적 의존, 성취감을 위한 정복의 대상으로서의 상대방, 일상의 권태에서 벗어나려는 도피처로서의 관계, 자신의 가치를 확인받으려는 수단으로써의 애정, 심지어는 시대적 유행이나 주변의 압력에 의한 관계 형성까지.
이 모든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하고 있고 사랑받고 있다고 착각한다. 다시 말해 사랑이란 감정이 외부의 내러티브에 의해 선제적으로 정의되고 개인은 그 정의에 맞춰 사랑하는 척하는 주체로 변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사랑은 정의할 수 없고 실현은 관찰될 수 없다. 사랑이 실현된다 하더라도 그 가능성은 절망적일 정도로 희박하다. 만약 사랑을 정의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정의에 따라 방법론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고 올바른 방법을 사용하여 사랑을 생산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본질은 정의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정의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랑이고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신비로우며 계획할 수 없기 때문에 우연적이다. 나는 사랑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것에 기대어 살아갈 만큼 용감하지도, 어리석지도 않다.
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 믿음은 너무 불확실하고 너무 위험하며 인간 언어와 논리를 넘어선다. 사랑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예외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나는 사랑을 포기함으로써 오히려 사랑의 초월성과 인간의 무능함을 인정한다. 사랑은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인간을 넘어 스치고 가는 어떤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콰지모도의 종소리는 여전히 울리고 있다. 그 소리는 사랑에 대한 나의 확신을 조용히 반박한다. 한 번이라도 진정한 사랑이 존재했다면 그것은 다시 존재할 수 있다. 설령 내가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다 해도 그 가능성 자체가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