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라는 자폐

by 고승환
출처: Pinterest


체슬라브 밀로즈는 말했다. 한 가족 안에 작가가 태어나면 그 가족은 끝장난다.


문학을 배운 뒤로 모든 세계는 텍스트가 되었다. 그 텍스트의 유일한 독자는 나였고 이것은 나를 현실에서 분리시켰다.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삶을 관찰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세계 속에서 모순과 억압, 위선과 불합리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친구가 슬퍼할 때 그 속에서 문학적 모티프와 서사의 가능성을 찾아내며 타인의 고통을 미적인 텍스트로 전환시켰다. 삶의 지혜를 가르쳐준다던 문학은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삶에서 박피시켰다.


세계를 텍스트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개념의 언어화다. 내가 오늘 경험한 것들, 목격한 것들, 들었던 것들을 언어 속에 가두는 작업이다. 텍스트는 단일한 감정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서로 무관한 감정들을 억지로 가두기 위해서는 사유라는 폭력이 필요하다. 생각 생각 생각. 생각 지옥.


생각이 많아지면 생기는 문제가 하나 있는데 바로 삶이 점점 머릿속 일이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경험은 그 자체로 아무런 가치를 갖지 못했다. 모든 경험은 해석되어야 했고 모든 감정은 의미화되어야 했다. 나는 삶을 온전히 살아가는 대신 그 속에서 공유할만한 가치를 찾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생각과 습작들이 하루를 채워갔지만 그 속에서 본래의 나는 점차 희미해져 갔다. 문학이라는 자폐, 언어의 우리 안에서 중얼거리며 세계와의 모든 접촉을 의미라는 필터를 통해서만 받아들이는 병리적 고립.


모든 것을 비판했다. 친구들의 결정과 행동을 도덕적으로 평가하며 선악을 정의했고 대중을 문학적 기준으로 재단하며 그들을 계몽의 대상으로 삼았다. 문학이 제시한 잣대로 천박한 현실을 측정하며 그것이 완전한 모습에 부합하는지 끊임없이 단죄했다. 문학의 잣대는 너무나 가혹해서 지구상 어떤 사회도 그 기준을 통과할 수 없다. 현실은 언제나 문학보다 더러웠고 사람들은 언제나 문학보다 비겁했다. 혐오, 차별, 비하, 멸시, 허무, 허탈, 무능감, 무력함. 나는 문학을 배움으로써 문학이 경계하던 것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문학이 가장 낮은 곳에서 삶을 살피는 법을 가르쳐주었다면 철학은 가장 높은 곳에서 세계를 관조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곤 말했다. 보라!!!


이런 시각의 변화는 나에게 일종의 해방감을 가져다주었는데 모든 것을 개인적으로 짊어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친구의 배신도 사회의 부조리도 내 안의 비겁함도 이제 거대한 구조의 일부다. 개인의 도덕적 실패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조건이었고 치유해야 할 상처가 아니라 분석해야 할 현상이었다. 나는 드디어 세계의 무게에서 벗어나 그것을 관찰할 수 있는 특권적 위치를 얻었다고 믿었다. 철학은 시선을 허락했고 그곳에서 바라본 세계는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럽고 한편으로는 숭고했다. 모든 것이 필연이었고 모든 것이 우연이었다. 나는 마침내 자유로웠다.


하지만 이 자유는 또 다른 감옥이었다. 심연을 들여다보는 자는 심연 또한 그를 들여다본다. 니체가 한 말이다. 철학은 판단 이전의 침묵을 허락했다. 문학이 모든 것을 의미화하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철학은 모든 의미를 해체하고 무화시켰다. 의미를 만들고 해체하고 만들고 해체하는 반복. 이게 시지프스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모든 것이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는 강박, 모든 것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믿음, 모든 것이 서사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욕망. 전부 다 허상이다. 철학이 보라는 것은 이것이다. 네가 보고 있는 것은 또 다른 공허이고 모든 언어 이전에 존재하는 정적이고 해석을 거부하고 판단을 유보하여 지금 여기에 없음, 그 자체를 응시하라는 것이었다.


높은 자리에서의 관조. 이것은 문학이 제시한 낮은 삶의 대척점이 아니다. 철학이 올려다 준 높은 자리란 거리 자체를 의식하면서 그 거리가 창조하는 시선을 탐구하는 것이다. 새가 되어 땅 위의 개미를 내려다보는 게 아니라 내가 지금 어떤 자리에서 무엇을 관찰하는지를 끊임없이 인식하면서 그 거리감을 보는 것이다. 많이 보려면 자꾸 멀어져야 한다. 자꾸 멀어지며 자꾸 관찰하는 이 무한 후퇴의 시선 속에서 절대적인 것들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상대적인 위치와 맥락 속에서 희미한 의미를 갖게 될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철학이 선사한 이 무한한 거리 앞에서 나는 무력해졌다. 매일 술을 마십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매일 담배를 피웁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매일 혼자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매일 돈이 없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철학이 던져놓은 이 병신 같은 질문의 답을 도대체가 찾을 수가 없다. 만약 철학이라는 것이 어떤 악랄한 신이 온 힘을 다해 인간을 속이고 회유하여 멸종에 이르게 하기 위한 초우주적 6차 대멸종의 계획이라면 반쯤은 성공했다. 신, 축하한다. 니체는 신을 죽였지만 신이 없었다면 지금 나를 여기에 세워놓지 못한다.


작가의 탄생이 한 가족을 끝장낸다는 것은 작가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작가가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정확히 알면서도 헤어나지 못하는 지옥 같은 굴레에 떨어졌다. 지옥은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문학적 우월감도 철학적 관조도 결국 같은 병리의 다른 증상에 불과하다. 내가 서 있는 이 고고한 (그렇다고 믿어지는) 자리에서 바라본 세계는 한없이 왜소하고 무의미해 보인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의 일상을 살아가며 사랑하고, 절망하고, 희망하지만 나에게는 그 모든 것이 하찮게 보인다. 영혼의 단짝을 만나 친구를 만드는 것도, 내 삶의 반쪽을 찾아 사랑을 한다는 것도,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도, 좋은 직장에 들어가 안정적으로 돈을 벌며 화목한 가정을 꾸린다는 것도 먼지보다 하찮게 보인다.


지금 끔찍한 것은 이 모든 과정을 생생히 의식하고 있으면서도 중단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나의 삶에서 소외되는 것을 관찰하면서도 그 관찰 자체에서 도망칠 수가 없다. 내가 감옥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 감옥의 구조를 분석하고 감옥에 갇힌 나 자신을 해부했지만 그 어떤 지식도 나를 해방시키지 못한다.


반복과 무의미. 침묵과 회피의 일상화. 그저 지속되는 어떤 종류의 생존이다. 끝장난 삶. 그리고 이것을 명확히 알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더욱 끝장난 삶. 시지프스는 바위라도 있었다. 꼭대기라는 목적지도 있었다. 나는 이조차도 없다.


나는 이제 완전히 혼자다. 텍스트만이 나의 유일한 동반자이고 텍스트마저 나를 배신한다. 이것이 밀로즈가 예견한 끝장인가. 한 가족의 끝장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소멸인가. 살고 싶지 않다. 도대체가 살아지지가 않는다.


그런데도 글을 쓴다. 왜 인가. 이 글조차 나를 더욱 깊은 자폐로 밀어 넣을 것을 알면서도 쓴다. 왜 인가.


아마도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의 기도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를 배신한 도구로 나를 구원하려는 모순된 희망이지만 이것이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유일한 증거이다. 쓰는 동안만큼은 내가 존재한다고 믿어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혼자 중얼거리며 계속 쓸 것이다. 밀로즈의 말이 옳았다. 한 가족이 끝장났다.


절망적인 삶. 절망하면서도 절망을 야기한 그것이 필요하여 마음 놓고 절망할 수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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