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멘의 자유

by 고승환
carmen.jpg?type=w1 출처: Pinterest

오페라 카르멘을 보고 요즘 하바네라만 듣고 다닌다. 여러분도 들어 보시라. 카르멘을 다 본 것은 아니고 정확히 하바네라가 나오는 부분까지만 봤다. 세상이 참 좋아졌다고 느낀 것이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고화질에 한글 자막까지 있는 오페라 공연 풀버전을 유튜브로 볼 수 있다. 카르멘은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나에게 익숙한 작품이다. 피아니스트 유자 왕을 알게 된 것도 카르멘 환상곡을 치는 영상 덕분이었고 비제를 알게 된 것도 카르멘 서곡 덕분이었으니 말이다. 곧 방학을 하게 되면 당분간 본가에서 지낼 텐데 그때 카르멘을 끝까지 봐야겠다.


카르멘은 사랑을 예측할 수 없는 존재로 본다. 직접 보고 느낀 것은 아니고 이왕 카르멘으로 글을 시작했으니 가볍게라도 다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여기저기 찾아본 결과다. 카르멘은 극 중에서 많은 구애를 받지만 누구도 그녀를 소유하지는 못한다. 끝까지 자신만의 법칙을 따르며 자유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사랑은 정의될 수 없는 것, 통제될 수 없는 것이었다. 최근 사랑에 대한 나의 생각을 쓴 「사랑의 폐허 속에서」라는 글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나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카르멘을 반가워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나 역시 누구나 하는 진부하고 따분한 생각을 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할까. 답은 뻔한데 쉽지 않다.


카르멘의 자유, 글쓰기의 자유. 나는 자유에 대해 사유한 적은 많지만 진정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싸워왔는가에 대한 질문에는 회의적이다. 당장 글만 봐도 그렇다. 오랫동안 글을 쓸 때마다 장르의 경계를 의식했다. 우선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을 나누고 장르문학을 배척했다. 그 다음으로 문학인지 비문학인지를 구분하고 또 그 다음으로 산문인지 운문인지, 서정인지 서사인지, 에세이인지 논문인지 계속해서 규정하고 매듭지으려 했다. 같이 글을 쓰는 친구는 자신의 생각을 담은 토막글을 자주 쓰는 편인데, 어느날 그런 글은 어떤 장르냐고 물으니 그냥 잠언같은 형식의 개인적인 단상이란다. 띵! 그런 장르는 내 사전에 없다. 이렇듯 나는 정해진 형식 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썼고 그것이 완성도를 담보해줄 것이라 믿었다.


특히 시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했다. 장르문학을 배척했듯이 시를 배제했다. 시점을 꼽자면 작년 겨울 졸업작품으로 시집을 낸 이후이다. 목적이 사라지자 허무가 밀려왔고 시라는 장르 자체가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시는 완벽해야 하고 정제되어야 하며 깊어야 한다고 너무나 손쉽게 믿어버렸고 그 무게감이 나를 시에서 점점 멀어지게 만들었다. 밀어낸 건지 밀려난 건지 분간도 하기 전에 말이다.


이런 완벽주의야말로 창작의 본질을 구속하는 족쇄였음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다만 행동으로 보여내기 어려웠을 뿐이다. 진짜 귀찮고 어려웠고 잘 쓸 자신도, 잘 쓴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카르멘을 대하며 문득 든 생각으로 다시 시를 쓰기로 결심했다. 여태 몰랐던 진리를 발견하여 대성오견의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 그냥 그리 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다시 시가 찾아왔다.


사실 최근의 글들을 마냥 비문학 산문으로만 보아도 될지 의문이긴 하다. 개인적 체험이나 사회적 개념을 토대로 주제를 잡아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 안에 문학적 장치를 배치하기도 했고 동시대의 감각이나 문학에서 말하는 시대적 요청에도 나름 응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비문학이라기보다는 산문을 즐겨 써왔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시를 오랜만에 써서 그런지 감각이 많이 흐려진 것이 느껴졌다. 최근 쓴 「안경」이라는 시는 배수연 시인의 『쥐와 굴』 시집에 실린 「쥐와 노인」이라는 시를 오마주 한 것에 가깝고 「나는 시인이 될 거란다」라는 시는 김개미 시인의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 시집에 실린 「사촌」이라는 시 중 "오빤 가수가 될 거란다"라는 문장을 변용한 것이다. 그래서 블로그 외 다른 플랫폼에는 업로드 하지 못했다.


사실 이 감각이 흐려진 상태는 내가 가장 경계하는 상태다. 보통 이럴 때는 이전의 독서 경험에서 체득한 표현과 서정의 그림자가 글에 투영되기 때문이다. 최근 두 시를 쓸 때에는 인지하였지만 보통은 나도 모르게 투영이 된다는 것이 문제다. 이게 참 골치 아픈 것이 내가 쓰려는 내용을 쓰다 보면 표현이나 문체에 자연스럽게 섞여버리고 설령 알아차린다 해도 어디부터 손 봐야할지 감을 잡을 수 없다. 블로그에 올리는 글이라면 얼레벌레 올리겠지만 수익이 발생할 수 있는 플랫폼에 공개하거나 공모에 투고해야 하는 작품이라면 과감히 엎어버리는 수밖에 없다. 작품명이 떠오르는 것은 고사하고 작가의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라 인용 표기는 물론이요, 정확한 작가와 작품의 이름을 알고 있다고 해도 어디부터 어디까지 인용 표시를 해야할지 또다른 문제가 생긴다.


나는 「나는 시인이 될 거란다」에서 "나는 시인이 될 거란다"라는 문장을 쓸 때 「사촌」이라는 시에 "오빤 가수가 될 거란다"라는 문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이것을 참고해서 쓴 것이 맞다. 그런데 "나는 ◯◯이(가) 될 거란다"라는 한 문장만 두고 보면 인용 표기를 해야할 지 의문스럽다. 김개미 시인의 시를 모르는 사람도 이정도의 일반적인 표현은 충분히 우연히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안경」은 또 어떠한가. 「안경」은 명백히 오마주한 것이지만 만약 "이봐, ◯◯", 정확히 말하면 "이봐"라는 표현만 사용했다면 이것에 대해서 인용 표기를 해야하는가에 관해서는 곤란해진다. "이봐"라는 표현은 너무나 일반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표절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작가가 "이봐"를 쓰는 과정에서 배수연 시인의 시에서 사용된 표현이 떠올라서 쓴 것이라면 마땅히 인용 표기를 해야 할텐데 이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겠냔 말이다. 그리고 지금 글을 쓰면서 김개미 시인의 시 「사촌」을 찾아읽다가 알게된 것인데 “오빤 가수가 될 거란다”만 인용한줄 알았는데 “결혼도 하지 않고”라는 문장도 그대로 사용됐다.


이러한 현상은 대학에서 과제로서 작문을 할 때나 직장에서 업무상 작문을 할 때 자주 발생한다. 실제로 작년 희곡 수업에서 내가 발표한 대본과 주제의식이나 전개가 동일한 다른 학우의 대본을 본 적이 있다. 나는 내가 발표한 대본과 그 학우가 발표한 대본의 유사한 문장, 동일하게 드러나는 주제의식과 전개 방식에 형광펜을 칠해서 교수님께 전달드리며 표절 의혹을 제기하였다. 학부 교수님들이 모여 회의를 하였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와 내 친구들은 아직도 그 학우가 집필 과정에서 내 글을 참고하였다는 것을 안다. 의도하였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말이다. 이 얘기는 이쯤하고 혹시 궁금해 할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안경」을 쓸 때 오마주한 배수연 시인의 「쥐와 노인」 전문과 「나는 시인이 될 거란다」를 쓸 때 인용한 문장이 있는 김개미 시인의 「사촌」전문을 첨부한다.


쥐와 노인 배수연


이봐, 노인

늦잠을 자는 노인은 없나? 열 시 열한 시까지 자는 노인

나는 그런 노인이 될 거다

치익- 열 시면 밥솥의 김이 빠지고 있겠지 그걸로 김밥을 말 거다

꽃을 싫어하는 노인은 없나? 돌만 좋아하는 노인

나는 그런 노인이 될 거다

예쁜 돌에 푸른 이끼가 있다면 락스로 박박 닦아 버려야지

줄무늬 책을 들고 다니는 노인은 없나? 레자에 지퍼를 단 성경책 말고

줄무늬로 된 책을 써야겠다 흰 선과 푸른 선에 손가락을 얹고

“좋아하는 책은 다섯 권씩 사지요”라며 씨익 웃기 위해




사촌 김개미


오빤 가수가 될 거란다. 학교 운동장만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거야. 물고기 댄서들이 조명을 끊어내며 춤을 추겠지. 오빤 가수가 될 거란다. 여자 대신 기타와 사랑에 빠졌지. 배신이나 하는 여자보다는 온몸으로 우는 기타가 좋아. 하모니카도 여자보다 낫다는 걸 알아둬. 차갑긴 해도 외면하지는 않지. 오빤 가수가 될 거란다. 그러니 개울에 나와 앉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노래만 하는 오빨 이상하게 보지 마라. 오빤 가수가 될 거란다.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고 평생 노래만 부르다 영화처럼 죽을 거야. 폐병쟁이같이 창백한 얼굴도 꼬챙이 찔린 듯한 눈빛도 빨대같이 가느다란 손가락도 베짱이처럼 게으른 천성도 오빠텐 꼭 필요한 거란다. 하루종일 시냇물만 들여다보고 휘파람이나 분다고 오빠가 논다고 생각하니? 오빠한텐 저주받은 예술가의 피가 흘러. 오빤 가수가 될 거란다. 오빤 잘 대도 노래를 부른단다. 꿈에서조차 목이 터지지. 오빤 가수가 될 거란다. 앞으로 영원히 방학만 계속된다 해도 레코드가게 하나 없는 이 촌구석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오빤 가수가 될 거란다.


글이 잘 나오지 않으니 학부 시절 배웠던 현대시 작법과 이론도 들춰보았다. 예술에서 이론을 따르는 것을 혐오하는 내가 직접 찾아보았다는 것 자체가 감각이 많이 닳았다는 증거다. 나는 왜 예술에서 이론을 혐오하는지 정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그냥 예술은 자유로워야 한다고 마땅히 믿고 있는 것인지 자유로움을 좇다 보니 예술을 택했던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요즘에는 미학을 공부하고 있다. 철학의 하위분야로만 생각했는데 마냥 그렇게만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고 예술과 철학 그 경계에 서 있는 것 같다. 아니 애초에 미학이라는 것이 철학과 예술의 경계 자체를 허물어버리려는 시도가 아닐까 싶다.


사실 오늘 마케팅 과제를 마치고 카르멘에 대한 간단한 소감을 이야기하며 일상글을 쓰고 집에 가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또 4시간을 붙잡고 있었다. 나는 이게 문제다. 떠나야 할 타이밍에도 계속 하고 싶은 말이 머리를 스친다. 시를 쓸 때는 더하다. 시는 언어로부터 빠져나오는 방식이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나는 늘 언어 안에 너무 오래 머문다. 글을 떠나는 것도 하나의 능력이라고 했던가. 괜히 아쉬운 사람들만 떠나지 못하고 자꾸 글 근처를 맴도는지도 모르겠다. 글 떠나는 얘기 나온 김에 마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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