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며칠 전부터 요청한 식료품들을 윌이 드디어 사 왔다. 물건 정리를 할 겸 냉장고 청소를 하게 됐다. 안 그래도 냉장고가 지저분해서 찝찝했는데, 이때다 싶다. 갑자기 풍성해지는 냉장고를 보면서 민서가 한 마디 한다.
“엄마. 여기가 부르더호프보다 더 좋은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생각해?”
“음. 거기는 있는 물건들만 사용할 수 있지만, 여기는 장도 볼 수 있잖아요.”
“글쎄~ 더 생활해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 1주일도 안되었잖아.”
에구머니나~ 역시 아이들에게는 보이는 것만 보이나 보다. 오래되어서 곰팡이가 핀 빵, 잼, 정체불명의 물건들을 빼내고 나니 공간이 꽤 생긴다. 채소는 깨끗이 씻어 비닐에 넣고, 종류별로 칸을 분류하였다. 며칠 전에 양념을 해 놓은 닭볶음탕을 하고 밥을 해서 점심식사 준비했다.
식사 때가 되면 언제 밥을 먹나 주방을 서성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조이이다. 조이는 50대 장애여성이다.
“조이~ 치킨 좋아해요?”
“네. 좋아해요.”
“조이~ 갈비도 좋아해요?”
“네. 갈비도 좋아요.”
그녀는 평소에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음식 얘기를 할 때면 얼굴에 미소를 짓는다. 사람들이 닭볶음탕에 대해 맛있다고 반응해 준다. 이곳 닭들은 밖에서 자란 건강한 닭인 데다가 몇일간 숙성을 해 놨더니 살이 아주 쫄깃쫄깃하다. 두 딸들도 어찌나 소란스럽게 쩝쩝거리며 먹는지 내가 다 챙피할 지경이다.
오후에는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타운에 나들이를 간다고 한다. 15인승 차를 조안이 운전하고, 직원 2명, 우리 가족 3명, 장애인 7명이 탔다. 주말인 데다가 읍내로 놀러 간다고 모두들 얼굴 표정에서 상기되어 있는 모습이 느껴진다. 조이도 가방을 둘러메고 유치원생이 선생님 따라다니는 것처럼 즐거운 표정이다. 같은 집에 사는데도 조이는 출발 장소에 항상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다.
먼저 도착한 곳은 도서관이다. 모두들 자신이 좋아하는 코너로 움직인다. 잡지를 보는 사람, 비디오를 고르는 사람, 종이 그림에 색칠을 하는 사람... 그들의 진지한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다 행복해진다.
“민서야. 저기 루스 좀 봐. 너무 귀엽지 않니? 색칠하고 있어~”
“그러게요. 엄마. 저 얼굴 좀 봐요. 귀여워요. 하하”
50살이 한참 넘었을 루스 아저씨도 귀엽고, 영, 스틴, 니콜... 각자 자신만의 특유의 표정을 지으며 도서관에서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다음은 볼링장으로 향할 차례이다. 시내라서 그런지 횡단보도가 그려져 있다. 직원이 앞장을 서고, 장애인 7명이 차례차례 줄을 서서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습에 아기오리들이 떠오른다. 나는 20년 만에 볼링을 쳐보게 됐다. 생애 첫 볼링 체험을 하는 우리 아이들도 잔뜩 들떠 있다. 대부분의 장애인들이 두 손으로 볼링공을 들고 레일 앞까지 갔다가 앞으로 쭈욱 던지고 있다. 포즈는 그런데 속도가 꽤 세고 점수도 잘 나온다. 이 장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아하... 장애인들이 나왔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각자 자신의 점수에 신경을 쓰면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 느껴진다. 조이는 자신의 점수가 제일 낮아서 그런지 점수가 표시될 때마다 표정이 심각해진다. 느리기는 해도, 아이 같아도 기분 좋은 것, 나쁜 것은 누구나 똑같이 느낀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일요일 아침, 늦잠을 자고 아침을 챙겨 먹는데 조이가 거실을 서성이고 있다.
“Ray가 입고 있는 초록색 티셔츠가 마음에 들어요.”
“네. 제 옷이요? 다행이네요.”
“나는 초록색이랑 보라색을 좋아해요.”
“그래요. 제가 꼭 기억할게요.”
순간 조이의 표정이 슬퍼 보인다. 그냥 안아주고 싶다. 조이와 눈이 마주쳤고, 조이를 안아주었다.
“Ray~ 안아줘서 고마워요.”
조이의 그 말에 내 마음이 찡하다.
앞 집 Alt하우스에 새로운 봉사자가 왔다고 차를 마시러 오라고 전화가 왔다. 언제갔는지 조이가 벌써부터 도착해서 자리를 잡고 있고 혼자 앉아있다. 커피 한잔 마시며 인사를 하고 수다를 떨다가 앨리네 꼬맹이를 안고 있는데 조이가 나를 쳐다본다. 사람들과 섞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녀의 눈빛에서 보인다.
“조이~ 아기 좋아해요?”
“네. 아기 좋아해요.”
“조이~ 오늘 점심은 갈비찜이에요.”
“Ray~ 오늘 갈비찜 할 때 돕고 싶은데 괜찮아요?”
조이가 무엇인가를 돕겠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무엇인가를 본인이 직접 하겠다고 한 것이 처음인 것 같다.
작은 칼로 오이와 당근을 자르고 함께 식사 준비를 해본다. 오늘은 갈비찜, 오이무침, 불닭 볶음면까지 함께 선을 보였다. 모두들 맛있게 먹어주기 기분이 좋다. 점심을 먹고서는 한가로운 오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저녁식사 전까지 1시간 30분이 남아서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20분만 가면 된다는 폭포가 생각났다. 조이에게 물었더니 자기도 같이 가자고 한다. 카메라를 챙기고, 멋 부린다고 반바지를 입었다. 4시가 넘었는데도 태양이 여전히 뜨거워서 얼마 가지 않았는데 아이들이 짜증을 부린다. 조이의 걸음이 생각보다 느려서 예상했던 시간의 두 배가 더 들었다. 비포장도로를 지나고 풀밭을 지나 모기와 하루살이의 공격을 받으며 찾아간 곳은 공원이라기보다는 그냥 산 속이었다. 완전 실망이다. 이게 폭포라고? 참... 한국의 폭포와 너무 다르구만...
식사 시간을 정말 잘 지키는 조이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Ray~ 지금 5시 40분이라구요? 그럼 늦었잖아요. 내가 뭐라고 했어요. 아까 가지 말자고 했잖아요.”
“조이가 20분 걸린다고 했잖아요. 저도 이런 공원이었으면 안 왔을 거예요. 내가 식사하러 가면 아이들보다 더 먼저 조이를 챙길게요. 걱정하지 말아요.”
조이는 그제서야 마음이 조금 풀리는 눈치이다. 주말 동안 그녀와 조금은 더 가까워진 것 같다. 그 눈빛에서 외로움이 느껴지는 조이에게는 마음을 나눌 사람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