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초 여름, 북쪽이라서 그런지 기온 차가 심하다. 밤에는 긴팔을 입고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자고, 한낮에는 더워서 민소매를 입고 있다. 한 달 전 여기에 처음 왔을 때는 옥수수가 10cm 정도였다. 그 사이 밤에 비가 와주고 낮에는 햇볕이 쨍쨍 내리쬐니 내 키를 훌쩍 넘어 버렸다. 과수원의 과일들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베리류들은 빨갛게 또는 까맣게 변해가고 있다. 요 며칠 라즈베리, 레드크런치, 블랙 크런치 수확을 하느라 바빠졌다. 특히 라즈베리 맛이 기가 막히다.
매일 아침 과수원을 지나가며 아이들과 이야기를 한다. 여름철에만 느낄 수 있는 풍요로움을 맘껏 느끼면서 말이다.
“엄마~ 잠깐만요~~”
“지민아. 하지 마~ 그래... 조금만 따렴~”
“엄마~ 여기 딸기예요. 우리 2개씩 나눠 먹어요.”
“그래~ 우리는 한 가족이니까 같이 먹어야지~ 고마워. 너무 맛있다.”
“엄마~ 이 포도, 우리가 먹고 갈 수 있을까요?”
“글쎄 민서야~ 매일매일 자라고 있으니까 가능할 수도 있겠지~ 떠날 날이 이제 한 달도 안 남았네~“
“엄마~ 우리 여름에 오길 잘한 것 같아요. 과일이 엄청 많잖아요.”
오늘은 레드크런치를 따는 날이다. 이름이 생소해서 자꾸 레드베리라고 불러서 민서한테 지적을 몇 번이나 받았다. 플라스틱 바구니를 하나씩 들고 밭으로 들어갔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작은 열매를 따기 시작한다. 함께 하는 장애인들의 개성이 확연히 차이가 난다. 잭은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하는데 오느 순간 갑자기 사라진다.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역할을 담당하러 가는 거겠지? 추측 정도만 한다고 할까~ 오스틴은 행동보다는 말이 아주 많다. 조이는 바깥쪽 고랑에서, 자기 눈높이에 보이는 열매만 딴다. 그리고 열매를 따면서 한 번은 자기 입에, 한 번은 통에 손가락이 들어간다. 한 시간이 되도록 조이의 통에는 한 줌의 열매밖에 쌓이지 않는다. ‘그래~ 먹는 게 남는 거지~~’ 싶다. 저스틴은 오늘도 자꾸 딴짓을 한다.
“저스틴~ 지금 그네 타는 시간이 아니에요. 이리와요.”
“이...리...요...?”
“자~ 여기 빨간색 크런치를 따는 거예요. 서서 하지 말고, 바닥에 앉아서요.”
“바...닥...에...요...?”
“그렇게 눕지 말고, 엉덩이를 바닥에 대요. 눈은 크게 뜨고...”
아이들은 처음에는 새로운 열매를 수확한다는 기쁨에 열광하더니 시간이 갈수록 지루함을 느낀다. 자꾸 보채길래 닭장에 계란을 담아서 냉장고에 집어넣으라고 했더니 신이 나서 뛰어간다. 저녁식사 준비를 하러 간 앨리, 다른 일을 하러 간 잭, 심부름으로 일이 바뀐 저스틴.... 결국 과수원에 나 혼자 남았다. 다행히 나는 따가운 햇볕을 받으며 하루 종일 과수원에서 단순 육체노동을 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블랙 크런치라는 열매는 여기에 와서 처음 먹어본다. 정말 잘 익은 블랙 크런치는 시지도 않고 달콤하다. 가지들을 잘 따라가다 보면 잎들이 많은 안쪽에 검붉은 색으로 변한 열매가 보여서 내 군침을 돋게 만든다. 그럴때는 ‘내 입에도 하나! 아~ 맛있어라. 내가 언제 이렇게 먹을 거야~’ 혼잣말하면서 손이 빨라진다.
열매를 따라가다 보니 나무 그늘 아래 앉는 자세가 되었다.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리고 평화로움이 가득해진다. 그 소리를 감상하며 열매를 따는데 가지 사이로 무엇인가가 보인다. 가만히 보니 엄청 작은 새둥지가 가지 사이에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작은 알이 3개가 있고, 먼저 부화한 아기 새가 눈도 뜨지 못하고 주둥이를 벌리는 장면이 내 눈 앞에 펼쳐진다. ‘어머~ 이뻐라~’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고 미소가 지어진다. 아까부터 새 한 마리가 왔다 갔다 했는데 어미 새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조금 있으니 어미 새가 나타나서 내 근처를 맴돈다. 나를 발견하고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그 순간 내 손이 무지 바빠졌다. ‘엄마 새야. 조금만 기다려줘~ 내가 여기 있는 열매를 다 따버려야지 다른 사람이 안 오고 너희들이 안전하지 않겠어?’
한숨 돌리고 있으니 저만치 냉장고에 계란을 넣고 돌아오는 아이들이 보인다.
“애들아~ 이리 와봐. 조용히! 쉿~~~”
“엄마~ 왜요?”
“여기에 새 둥지가 있어~ 아기가 있단다.”
“정말요? 쉿~~~ 알았어요. 어머~~ 너무 이쁘다~~”
“그러게~ 우리가 시끄럽게 하면 아기들이 놀래~”
“근데 새 엄마는 어디 있어요?"
"응~ 아기한테 벌레 잡아 먹이려고 나갔지~ 곧 올 거야."
“엄마~ 저 새가 엄마인가 봐요.”
“맞아. 비켜주자. 아기 새한테 밥 주게~ 쉿! 우리 때문에 못 오나보다~~”
생명의 신비에 나도 아이들도 모두 신이 나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엄마 새에게 주둥이를 벌리는 아기 새를 보고 다시 아기가 되는 지민이~ 자기도 덩달아 순한 아기 표정을 지으며 엄마에게 안기고 코맹맹이 소리를 한다.
“엄마~ 나도 아기 때 저렇게 맘마 줬어요?”
“응~ 지민이도 매일 엄마 찌찌 먹었지. 얼마나 많이 먹었다고~~~”
“헤헤~~ 정말요? 어떻게 먹었는데요?”
아이들에게는 한 없이 받아들여지는 순간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또 한 번 느낀다. 하긴... 어른인 나도 그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니...
아직 부화가 되지 않은 알이 있으나 우리 때문에 놀라서 다른 곳으로 이사 가지는 않겠지? 아이들은 이 기쁨을 다른 식구들과도 나누고 싶어서 난리다.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 새를 환영하는 홈스테드 식구들... 다음날 오후에 다시 가 봤더니 한 마리가 더 부화해 있다.
“엄마~ 두 번째로 태어난 새가 불쌍해요.”
“왜~ 민서야?”
“응. 첫 번째 새가 두 번째 새를 깔고 있어요. 힘들어 보여요.”
“괜찮을 거야. 걱정 마~ 엄마 새가 알아서 하겠지~~”
아침마다 과수원을 지나치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생겼다. 새 둥지는 그대로 있는지, 남은 알들이 부화가 되었는지, 아기 새들이 얼마나 자랐는지 확인하며 미소 짓게 된다. 새둥지를 발견하고 생명의 탄생을 경험하면서 나와 아이들 간의 유대감이 옥수수 자라듯 쑥쑥 자란다.